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22
제122화. 인형의 주인
-벌떡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뜬 히블즈.
“여긴?”
사실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불과 정신을 잃기 전까지 있던 곳이었으니.
바로 벨져의 저택이었다.
열린 창문에서 넘어온 쌀쌀한 아침 공기가 그의 피부를 감쌌다.
“일어나셨나요?”
옆에서 여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디작은 여린 손으로 물컵을 건네주고 있는 익숙한 마족 소녀.
메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아님 안 나는 척하는 거예요?”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이사벨이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히블즈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지난밤의 일을 돌이켜봤다.
“그렇군. 난 벨져 후보와…….”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우리 지금 당신 심문하는 거예요 히블즈.”
이사벨은 그 말과 함께 히블즈의 앞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짚으로 엮어 만든 익숙한 인형이었다.
“그거 당신 몸에서 나왔어요. 거기에 대해 할 말 있나요?”
“달리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믿어주시겠소?”
“그럼 기억나는 것만 말해보시던가요.”
히블즈는 말없이 손에 잡힌 짚 인형을 유심히 보았다.
굳은 눈빛에선 혼란스러움이 잔뜩 느껴졌다.
이에 메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들어 계신 동안 몸 상태를 살펴봤었는데……, 정신 조작 마법에 걸린 흔적이 있으셨어요.”
“그랬던 것 같군. 기억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어.”
그때 방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미 누구인지 예상한 듯, 이사벨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를 음미했다.
“히블즈 님!”
해가 뜨자마자 온건파 지부에서 막 달려온 브릴리스,
“살아있었네?”
그리고 세나였다.
우수에 차 있는 브릴리스의 눈을 본 히블즈는 그녀가 어떤 심경으로 하룻밤을 보냈는지 얼추 예상할 수 있었다.
“널 볼 면목이 없구나 브릴리스.”
급기야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메이가 등을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이에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히블즈는 그제야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벨져 후보와의 첫 싸움 이후, 난 정처 없이 마계를 돌아다녔다네. 그래도 간간이 단원들을 통해서 소식은 접했지. 들으면 들을수록 온건파의 내가 있을 자리는 없다고 느껴지더군.”
이는 벨져와 브릴리스가 그만큼 일을 잘 해왔음을 의미했다.
“그래도 아직 건실한 이 몸을 계속 썩힐 순 없었기에, 마수 토벌을 해왔었지. 그러던 중 한 의뢰를 받았어. 마계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숲 지대에 어느 정체 모를 마족이 한 명 살고 있는데, 그 마족을 따르는 하수인들이 인근 마을을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더군. 작은 피해라곤 하나, 자칫 가만 놔뒀다간 더 큰 피해로 이어질 염려가 있다고 생각해서 즉각 달려갔지. 그러곤…….”
쭉쭉 설명을 잇던 히블즈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미안하군. 내 기억은 거기서 멈췄네.”
“지부를 지킨 일과, 벨져 님의 집에 제 발로 오신 일도 전부 기억이 안 난다는 겁니까?”
“기억은 있네.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지부가 습격당할 거라고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냥 내 몸이 알아서 움직인 기분이야. 이곳도 마찬가지고…….”
“정신 조작 마법에 제대로 당했네요. 당신은 그 숲에 발을 들이자마자 인형의 주인이 쳐놓은 함정에 걸린 거예요. 그리고 지금까지 꼭두각시처럼 움직인 거죠.”
이사벨이 단번에 상황을 정리했다.
히블즈는 잠시 눈을 감으며 당시에 들었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페로나…….”
그의 입에서 읊어진 이름에 모두의 눈이 번뜩였다.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하네. 날 조종한 마족의 이름! 그녀는 자신을 페로나 룩스리아라고 했어!”
그 말에 이사벨이 벌떡 일어났다.
“룩스리아? 그럼 루비아와 관련 있는 몽마족이란 거예요?”
“그 마족은 벨져 후보를 노리고 있소! 그를 자극해서 뭔가를 유도하려는 것 같아! 벨져 후보는 어디 있지?”
히블즈는 휙휙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벨져를 찾았다.
허나 정작 집주인인 벨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메이는 대답하기 모호한 듯 우물쭈물거렸고,
이사벨은 아예 한숨을 내쉬었다.
덩달아 상황을 모르던 브릴리스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말들이 없으시죠? 벨져 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디 갔겠어요? 당연히 사태의 장본인을 잡으러 갔죠.”
이사벨의 대답에 히블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 어디인 줄 알고 갔다는 말이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에 장소를 말해주기라도 했소?”
“그 수호인지, 호수인지 모를 꼬맹이가 당신 몸에 있던 짚 인형의 냄새를 맡더니, 인형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며 소리쳤어요.”
“그, 그럼 지금 벨져 님은?”
“물어 뭐해요? 당연히 그 페로나라는 마족을 잡으러 갔죠. 우리는 여기서 노인네 간호나 잘하고 있으랬어요. 브릴리스가 당신이 돌아오면 알아서 상황 설명도 해달라고 했고요.”
이사벨은 자신을 두고 간 것에 토라진 듯,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왜 매번 혼자서 일을 해결하려 하시는지…….”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자신의 위치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한다곤 하나,
정작 이런 중요한 상황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단 사실에 자괴감을 느낀 듯, 브릴리스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한탄했다.
“……본인의 성격이라더군.”
히블즈의 말에 브릴리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남들을 지키고자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는 삶. 그게 자신의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었다. 벨져 후보는…….”
그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적극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
늘 그래 왔듯, 집주인이 없는 집에서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마계 어딘가, 어두운 숲.
듬성듬성 자란 나무줄기 사이에 걸려 있는 짚 인형의 목이 갑자기 떨어졌다.
인형의 주인은 바닥에 나뒹군 목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네요? 쉽게 으스러질 인형은 아닐 줄 알았는데…….”
그녀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잘린 인형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금발의 익숙한 몽마족이 나타났다.
“인형 모으기 취미는 여전하구나. 으슥한 곳을 좋아하는 취향도 그대로고.”
그의 기척을 진작에 눈치챈 듯, 페로나는 여유롭게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미켄 오빠? 잘 지냈어요?”
“나야 집 나간 동생 생각에 하루도 편히 잔 적이 없었지.”
“능글맞은 농담은 여전하시네요.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말했잖니? 너의 보금자리는 이 오빠가 항상 인지해두고 있다고.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달려오게 말이야.”
미켄의 손엔 룩스리아 가 정원에서 가져온 붉은 꽃이 쥐여 있었다.
그 꽃을 바닥에 심고선, 페로나를 향해 다가갔다.
“차라도 한 잔 내드릴까요?”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들도록 하마. 오늘은 말만 전하러 왔다.”
반원을 그리고 있던 미켄의 눈썹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직선이 되었다.
“지금 당장 여길 떠나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 거라. 그리고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적 타야 할 것이다.”
“어째 말이 아니라, 경고를 전하러 오신 것 같네요?”
페로나는 굴하는 기색 없이, 몽마족 특유의 눈웃음으로 받아쳤다.
“경고가 아니라, 부탁이다. 이번 한 번만큼은 이 오빠 말을 들어라. 넌 지금 건들면 안 되는 마족을 건드렸어.”
“누구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오빠도 벨져 후보가 그리도 두려우신가요?”
미켄은 살짝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온건파 지부를 습격한 건진 몰라도, 사망자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거라. 그분은 선을 넘지만 않으면 매우 이성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야. 이쯤에서 멈춘다면 그분도 너를 애써 찾으려 하진 않을 거다.”
“그럼 굳이 보금자리를 옮길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그냥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 거잖아요?”
“……누님이 너를 찾고 계신다.”
여유가 가득했던 페로나의 얼굴에 비로소 동요가 일어났다.
“넌 누님의 심기를 건드렸다. 내가 널 찾아왔다는 건 누님이 몰라.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러니 그 전에 도망가거라.”
“조금 이해가 안 가는데요? 루비아 언니와 벨져 후보는 경쟁 관계 아닌가요? 어찌 보면 제가 언니의 적을 상대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게 왜 심기를 건드렸다는 거죠? 혹시…….”
페로나는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언니가 그 남자에게 욕정이라도 품은 건가요?”
“욕정이 아니다.”
“그러면요?”
“마음이지.”
미켄의 대답에 페로나는 급기야 얼굴을 부여잡으며 웃어댔다.
“미켄 오빠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더 느셨네요?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
“뭐 재밌는 얘기하나 봐?”
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넋이 나간 몽마족 남매를 유심히 바라보는 흑발의 마족.
바로 벨져였다.
“베, 벨져 님?”
미켄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벨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누님은 어디 가고, 너만 있냐?”
“아마, 지금쯤 저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겁니다…….”
그럼 지금은 여기 없다는 소리였다.
벨져로선 오히려 그게 나았다.
사실 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쨌건 여기 온 이유는 루비아 때문도 미켄 때문도 아닌,
전혀 다른 마족 때문이니.
“그쪽인가? 나한테 불만이 엄청나게 많다는 마족이?”
벨져가 묻자, 페로나는 조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예상보다 더 빨리 뵙게 됐네요. 벨져 후보님?”
“우리가 웃으면서 인사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스릉!
그녀의 인사를 벨져는 검을 뽑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러자 미켄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뭐 하자는 거지?”
“저에게 3분 아니, 1분만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벨져는 가당치도 않다는 차가운 시선으로 미켄을 노려보았다.
“제 동생이 벨져 후보님에게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압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추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설득하러 온 겁니다.”
“네 누님이 지시한 일이냐?”
미켄은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은 채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부정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절 믿어주신다면 제 모든 걸 걸고 약속드리죠. 다시는 페로나가 벨져 님에게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타이르겠습니다.”
미켄의 또렷한 눈엔 진심이 녹아 있었다.
그 진심을 벨져도 못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싫다면?”
그렇다고 그 진심이 벨져가 물러설 이유가 되어주진 못했다.
미소를 지은 채로 숨을 들이쉬던 미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벨져 후보님을…… 막아야겠지요.”
“막을 자신은 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무리 쫓겨난 동생이라도, 어쨌든 피로 이어진 가족의 정인데, 외면할 순 없지 않습니까?”
가족, 그리고 정.
힘이 전부인 세계에선 낯설기만 한 단어.
하지만 마냥 낯설기만 한 건 아니었다.
벨져 역시 마족이 된 이후, 마족과 지내면서 인간 시절 때와 똑같은 정, 그리고 유대 관계를 형성했었으니.
가족이니 외면할 수 없다는 미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지,
“비켜.”
받아들이겠단 뜻은 아니었다.
벨져는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미켄에게 명령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약 5초.
그 안에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벨져는 망설임 없이 미켄을 벨 생각이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4초의 시간이 흘러가고,
마지막 5초를 마음속에 되새기던 그때,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광경이네요.”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페로나가 입을 열었다.
“못난 동생을 위해, 마왕 후보의 앞을 막아주는 가족이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진심보단 조롱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냥 입 닫고 있거라 페로나. 네가 좋아서 해주는 일이 아니니…….”
“하지만 저도 가족 된 도리로서, 미켄 오빠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꼴은 보지 못하겠네요. 차라리…….”
뭔가 조짐을 느낀 벨져는 급히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지만,
-챙!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크베리아를 쳐냈다.
“싸우는 거라면 또 모를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