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24
제124화. 악몽과 악몽
셋, 다섯, 열.
나를 공격하는 분신의 수가 점차 늘어난다.
아니 애초에 분신이 맞긴 할까?
말이 ‘몽환의 환영’이지 속도도 그렇고, 힘도 그렇고, 그냥 하나하나가 다 미켄 녀석의 본체 같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요? 제 환영을 이리도 오래 버티신 분은 벨져 후보님이 처음입니다.”
수십에 달하는 환영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낸 탓에 고막이 찢어질 듯 울렸다.
“하지만 슬슬 결단을 내려주셔야 할 겁니다. 저의 정신이 끊길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정신이 끊긴다.
그 말은 즉, 녀석의 제어권이 완전히 페로나의 손으로 넘어간단 뜻이 되겠지.
그럼 지금보다 더 괴랄한 방식으로 나를 막으려 들 거다.
물론 그때가 되도록 방관할 생각은 없다.
늘 그래 왔듯, 언제나 방법은 있으니까.
순간적으로 발현한 마력을 검에 전승했다.
“마검술: 번지는 불길!”
검신에서 열기와 함께 검은 오라가 번뜩였다.
이를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휘둘렀다.
-화르륵
검은 불길이 날아간 곳은 미켄의 환영이 아닌 내 주변.
몸에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원형의 불길이 치솟았다.
살짝만 닿아도 즉각 전신에 번질 마력의 불길에 환영들은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난 아지랑이 속에서 나를 보고만 있는 환영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유심히 살펴보던 차,
“찾았다!”
원했던 목표를 발견하고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팍!
“커헉!”
목표의 입에서 뱉어진 피가 내 옷을 적셨다.
아크베리아의 검신은 정확히 미켄의 왼쪽 어깨를 관통하며 나무에 박혔다.
미켄은 웃는지, 당황했는지 모를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케 찾아내셨군요.”
“이 뜨거운 불길 속에서 땀을 흘리는 건 너밖에 없었으니까.”
“벨져 후보님이라면 좀 더 다정한 방법으로 절 깨워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할 땐 또 따끔하게 해주시는군요.”
자기 몸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미켄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을 더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검을 빼주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냐?”
“덕분에 확실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 벨져 후보님의 발목을 잡을 순 없을 것 같군요.”
미켄은 상처를 부여잡으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제 동생을… 아닙니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염치없겠군요. 원하시는 대로 해주십시오. 제 동생의 일탈을 멈춰주신다면 전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진심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녀석은 내게 거짓을 지껄일 만큼 가식적인 남자는 아니란 걸, 그동안 접해보면서 느꼈으니.
“쉬고 있어라.”
그 한마디만 남기고선 바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벨져 님.]바로 수호의 정신감응이 들려왔다.
[잠시, 이쪽으로 좀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이쪽? 너 지금 어딘데?”
[어…….]수호는 잠시 침묵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니?”
[그, 그러셨죠….]“움직이지 말고 거기 그대로 있어.”
즉시 수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미켄과 전투를 벌인 장소에서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머지않아 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수호의 모습이 보였다.
뭘 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차, 나를 발견한 수호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의미였다.
[가급적이면 저 혼자 상황을 해결해보려 했는데, 저로선 감히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아서 벨져 님께 도움을 요청 드렸습니다.]“대체 뭔데 그…….”
수호를 따라 앞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허….”
자연스럽게 외마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왔어? 벨져 후보?”
내가 온 걸 기척으로 느꼈는지, 루비아가 요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허나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앞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머리채를 붙잡힌,
페로나 룩스리아를 향해.
* * *
상황은 잠시 20분 전으로 올라간다.
속박 마법으로 수호의 움직임을 봉인한 페로나는 수호의 곁으로 다가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촉에 수호는 몸을 떨었다.
속삭임에 이어 페로나의 가녀린 손가락이 수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경로를 잇듯 점점 아래로 쓸어내렸다.
수호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고, 그렇게 점차 눈동자마저 보라색으로 변하는가 싶었지만,
[그렇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언제 그랬냐는 듯 수호는 바로 본래의 눈 색을 되찾았다.
이내 수호의 전신에서 강한 파동이 일었다.
-터엉!
파동에 휩쓸린 페로나는 순식간에 바깥으로 밀려났다.
겨우내 몸을 추스르고선 놀란 눈으로 물었다.
“뭘… 한 거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 몸이 당신을 거부했을 뿐이에요.]사실이었다.
실제로 수호는 어떠한 저항도, 힘의 발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드래곤의 강인한 신체와 정신이 몽마족의 유혹을 스스로 뿌리쳤을 뿐.
유혹을 물리친 수호의 눈엔 태초의 종족만이 드러낼 수 있는 신성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제가 당신을 얕본 모양이네요. 좋아요. 보석을 얻기 위해선 그만한 수고를 덜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페로나는 자신의 실수를 깔끔히 인정하며 본인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덕분에 더 소유하고 싶어졌네요. 단순히 정기만이 아닌, 당신의 전부를 저의 것으로 만들어야겠어요!”
[저에겐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뺏으면 그만이니까!”
다시금 광기에 젖은 미소를 띤 페로나는 품에서 또 하나의 인형을 꺼냈다.
그 인형을 곧장 수호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내 인형이 되세요! 수호!”
-턱!
하지만 그 인형은 수호에게 닿지도 못한 채, 다른 마족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루비아의 손으로…….
“주인 있는 물건은 건드는 게 아니라고, 내가 그렇게 얘기한 것 같은데……. 우리 여동생은 대체 언니 말을 어떻게 들은 걸까?”
상냥한 말투와 그렇지 않은 눈빛.
손에 잡힌 짚 인형을 한 손으로 찢은 루비아는 서서히 페로나를 향해 다가갔다.
페로나는 당황하지 않은 채, 루비아와 똑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왔어요 언니? 못 뵌 사이에 더 예뻐지셨네요?”
“왠지 내가 올 거란 걸 알았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저야 항상 언니가 오길 기다렸었죠~!”
분명 입은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루비아의 얼굴엔 차가움이 가득했다.
페로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저도 좋지만, 지금은 좀 미켄 오빠에게 가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왜~?”
“미켄 오빠가 지금, 벨져 후보와 싸우고 있거든요.”
그 말에 루비아의 얼굴은 비로소 완벽하게 굳어졌다.
슬며시 움직인 그녀의 눈동자는 숲의 반대쪽, 미켄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미켄이……, 벨져 후보와 싸우고 있다고?”
“이 어리석은 동생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서주시던데요? 그래서 제가 힘을 내시라는 의미로 작은 보탬도 해드리고 왔어요~!”
작은 보탬.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루비아로선 도저히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켄 오빠는 약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언니가 더 잘 아시잖아요?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을 거예요! 벨져 후보에게 무시 못 할 상처쯤은 주지 않겠어요?”
벨져와 미켄.
체구도 다르고, 전투방식도 전혀 다른 관계.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으로 봤을 때 미켄이 벨져를 이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현명할 정도.
만약 벨져 후보가 정말 마음만 먹는다면,
미켄을 완전히 끝장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무시 못 할 상처?”
루비아는 가소롭다는 듯 다시금 페로나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네 오빠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아니지. 네가 벨져 후보를 너무 얕잡아 보는 거겠지. 넌 아직 그 남자를 직접 보고 경험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미켄 오빠에게 들은 대로네요. 벨져 후보에게 마음을 품었다고 하시더니, 그 남자에 대한 믿음이 꽤 두터우신가 봐요?”
“그럼 두텁고말고~! 다른 남자도 아닌, 내가 마음을 품은 남자란다. 그런 남자라면 내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다시 걸음을 뗀 루비아는 입술을 매만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알아서 좋은 길을 찾아줄 남자야.”
홀연히 떠오른 벨져 생각에 루비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허나 그 부끄러운 얼굴이 섬뜩한 얼굴로 변하는 데엔 한순간이었다.
“그러니, 그쪽은 신경 끄고, 이제 우리 일에 집중해볼까?”
루비아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던 인형 마족들이 전부 제자리에서 터져버렸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당황스러워 할 시간은 없다.
곧 주변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흑의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악몽의 세계(The Nightmare World).
선을 넘은 여동생을 교육하기 위한 특별 공간이 루비아의 손에서 단숨에 만들어졌다.
조금은 위협을 느낀 듯, 페로나는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 마계를 악몽으로 물들이자고 그렇게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더니…….”
“왜 안 하려고 했는지 지금부터 알게 해줄게. 악몽에 빠져들면 공포고, 두려움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페로나를 보던 루비아는 어느새,
“악몽을 통해 한 번 망가진 정신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페로나의 등 뒤로 이동해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몽마의 속삭임을 들은 페로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급기야 땅바닥을 보며 구역질을 하는 등,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벌써 그런 표정 지으면 곤란한데? 이 언니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단다?”
“제, 제가 이래서 언니를 좋아했지요! 향기로운 꽃잎 속에 이런 치명적인 독을 품고 계셨으니까요!”
페로나는 괴로움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하, 하지만 그 독이 되려 언니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지요!”
“또박또박 말도 잘하는 걸 보니, 아직 버틸 만한가 보구나? 그럼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좋죠! 근데 분위기만 바뀌진 않을 거예요!”
페로나는 사시나무처럼 떠는 손가락을 간신히 들어 올렸고,
-따악!
그 손가락을 루비아가 한 것과 똑같이 튕겼다.
암흑으로 물들여졌던 주변은 순식간에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제 악몽에 오신 걸 환영해요 언니!”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나무들은 이윽고 하나둘, 성인 마족만 한 크기의 짚 인형으로 변했다.
루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의 인형들을 둘러보았다.
“뭘 그리 놀라시죠? 저도 엄연한 룩스리아 가의 몽마족인데, 이런 악몽의 세계를 만드는 것도 당연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맞는 말이었다.
페로나는 엄연한 룩스리아 가의 혈육.
루비아, 미켄과 마찬가지로 악몽의 세계를 창조할 능력을 충분히 보유했다.
문제는 루비아의 악몽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그걸 깨고 새로운 악몽을 만들었다는 것.
루비아로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장소라면 어림도 없었겠죠! 하지만 이곳은 저와 저의 인형들이 만들어낸 독자적인 영역이에요! 이곳에서 전!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아요!”
페로나의 섬뜩한 웃음이 루비아의 귀를 메웠다.
상황 역전.
이제는 루비아가 고통받을 차례라는 듯, 페로나는 혀를 날름거렸다.
“우리 동생이, 그동안 성장을 많이 했구나?”
“물론이죠! 이게 다 언니를 위한…….”
“근데 동생아. 나는 뭐 꽃밭 속에서 잠만 잤을 것 같니?”
-콱!
순간 뒤통수에서 느껴진 날 선 감촉에 페로나는 멈칫했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붙잡은 의문의 손.
의문의 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손의 주인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콰장창!
페로나의 악몽은 그대로 붕괴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