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30
제130화. 말하지 않아도
“오옷! 이 맛은?”
표정을 보아하니, 지구(특히 대한민국)에서 익숙한 BGM이라도 틀어줘야 할지 싶다.
수프를 맛본 코흐는 수저를 쉼 없이 움직이며 입안에 계속 욱여넣었다.
“끝내줍니다! 그동안 마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열매를 먹어왔었는데, 이런 맛은 정말 처음입니다! 단순히 맛만 있는 게 아닌, 비타민 등의 영양소도 풍부해 보입니다! 나중에 성분을 조사해봐야겠어요!”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아주 씨앗 속까지 탐구해볼 기세다.
보상이라고 하기엔 작지만, 그래도 영지민들을 치료해준 것에 보답하고자, 코흐를 주점으로 데리고 왔다.
코흐는 수프만이 아닌, 체르타 열매로 만든 다른 음식들도 차례대로 맛보았고, 연달아 감탄을 표했다.
“적림을 떠나고서도 계속 돌아다녔다고?”
“예! 우연히 근방을 돌아다니다가, 벨져 님의 영지가 근처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오게 되었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요! 한데, 이렇게 멋진 영지를 다스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실질적으로 내가 다스리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난 알아서 하라고 지시만 했을 뿐, 이 영지를 실질적으로 완성한 건 브릴리스다.
“적림은? 이제 역병에서 완전히 해방된 거야?”
“예! 제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조사해본 결과, 역병의 잔재는 더 이상 적림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이걸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코흐가 들이민 것은 회초리로 쓰면 딱 좋을 길이의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잖아? 이게 뭐?”
“제가 이 나뭇가지를 어디서 꺾어왔는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내가 나무 감별사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차,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려진 나뭇가지의 색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거 적림에 있던 나무냐?”
“맞습니다. 60년 전, 혈마족의 시조가 처음 역병의 균을 퍼트린 근원체였던 그 나무입니다.”
역병의 균.
온몸이 검게 썩는 희귀 질병을 앓던 한 마족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자신이 겪은 아픔을 모두에게 똑같이 선사해주고 싶단 마음으로 적림에 퍼트린 악행의 증거.
이후 나타난 혈마족이 재앙의 땅이 된 적림을 정화해 구원자로 칭송된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었지만,
사실 그건 베누스라는 단 한 명의 마족이 꾸민 간계였을 뿐.
구원자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베누스는 적림에 사는 마족들이 목숨을 쥐며, 언제든 웃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행위를 계속 강요해왔었다.
그냥 그놈 자체가 역병의 근원이었단 사실을 놈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었었다.
“역병은 사라졌지만, 계속 궁금했었습니다. 원래 순혈 마족이었다고 하는 베누스는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혈마족이 된 걸까? 전 그 해답이 이 나무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봤는데…….”
“해봤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군요. 하하…!”
코흐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런 녀석을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었다는 그 말 전하려고 내 영지에 왔다는 거야?”
“무, 물론 아니지요! 전 혹시나 벨져 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무슨 도움?”
“전해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마력을 못 쓰는 몸인지라, 이 나무에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끽해야 이런 식으로 변화를 지켜보는 게 다였습니다.”
코흐는 조사에 썼던 약병들을 꺼내 보였다.
이쯤 설명하니, 대충 무슨 도움을 원하는지 감이 왔다.
“그러니까, 그 나뭇가지에 담긴 성분을 마력으로 정확히 확인해보고 싶다 이거지? 그래서 내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고?”
“저, 정확히 보셨습니다!”
마음은 알겠지만, 솔직히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본다.
대신 이런 쪽은 나보단 메이나, 세나, 그리고 이사벨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녀들에게 도움을 구하면 얼추 될 수도 있다곤 보는데…….
이거, 설마 적림을 다시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먼 곳을 가자고 한다면 솔직한 심정으론 살짝 귀찮긴 한데….
아니지? 그때는 두 발이었지만, 지금은 수호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몇 시간에 가는 것도…….
“벨져 오빠!”
그때, 클로이가 다가왔다.
“벨져 오빠 그 인형은 뭐야?”
“인형? 무슨 인형?”
“주머니에 있는 그 인형 말이야! 오빠 인형 놀이 좋아해?”
바로 주머니를 보니, 익숙한 짚 인형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페로나가 만들어낸 가짜 마족들로부터 수거한 그 짚 인형이었다.
이게 아직도 주머니에 있었네.
“되게 특이하게 생겼다! 짚으로 만든 거야?”
“뭐, 그렇지? 너 가질래?”
“진짜? 고마워 벨져 오빠!”
옷은커녕, 얼굴 형태조차 어설픈 인형이었지만, 클로이는 진심으로 좋아했다.
괜찮겠지?
지금은 그냥 가지고 놀게 놔두고, 나중에 더 좋은 인형으로 바꿔주는 게 좋을 듯싶다.
“저, 벨져 님?”
그때 코흐가 다시 나를 불렀다.
“저 인형 혹시……?”
“왜? 너 저 인형 알아?”
“아, 아닙니다! 인형이 무척 조잡하게 생겼길래 혹시 벨져 님이 직접 만드신 건가 해서……. 아,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래! 굉장히 멋있는 인형인 것 같습니다. 신체 비율의 아주 선명하게 잡혀 있습니다! 하하!!”
실없는 소리를 하는가 싶던 코흐는 다시 음식 먹기에 돌입했다.
뭔가 말을 얼버무렸다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이윽고 음식을 다 먹은 코흐는 사뭇 차분한 표정을 나를 바라봤다.
“벨져 님께선, 정말 다르신 것 같습니다.”
“뭐가?”
“마왕 후보이시지만, 정작 저희가 아는 마왕이 되고자 하시진 않으신 거 같습니다.”
자연스레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럼 네가 봤을 때, 난 뭐가 되려는 거 같은데?”
“글쎄요? 굳이 표현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또 실없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사, 라고 해야 할까요?”
코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실없는 말이 아니었다.
내 몸은 한순간에 근육 경직이라도 난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뭐?”
“아, 무례가 됐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냥 생각 없이 머리에서 나온 말인지라…….”
무례?
이건 무례란 말로 치부할 상황이 아닐 텐데?
만약 이 안에 있는 영혼이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다면, 이 떠돌이 의사는 즉각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사실 이마저도 그냥 코흐의 말대로 생각 없이 나온 말 정도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이 녀석.
절대 생각 없이 말하지 않았다.
말투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명백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물은 말이다.
일단 솟아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을 꾹 억누른 채, 입을 열려는 순간,
[벨져 님!]대뜸 밖에 있는 수호로부터 정신 감응이 들려왔다.
감응에는 이유 모를 다급함이 느껴졌다.
[지금, 집으로 귀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집에? 갑자기 왜?”
[서쪽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오고 있습니다! 위치상 벨져 님의 집으로 추정되는데, 제 느낌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먼 곳에서 불어온 좋지 않은 냄새.
후각이 발달하지 않은 마족으로선 무슨 냄새가 나겠냐며 의아해하겠지만,
드래곤이 맡은 냄새라면 다르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코흐를 보았다.
“너도 따라와.”
“예? 어딜 따라오라는 건지……?”
“그 나뭇가지에 조사해보고 싶다며? 도와줄 테니까 따라오라고.”
“예엡!”
코흐는 우렁찬 대답과 함께 기쁨에 찬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 * *
출발했을 때와 더 빠르게 도착한 집.
다행히 집 자체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벨져 님. 같이 오신 분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다시 인간으로 변한 수호는 축 늘어진 코흐의 몸을 부축하며 말했다.
“머, 머리랑 속이…….”
코흐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낀 듯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흠. 좀 속도를 줄여줄 걸 그랬나?
(당연하겠지만) 평범한 마인족이 감당하기엔 수호가 너무 빨랐던 모양이다.
“알아서 데리고 와줘 수호야.”
일단 수호에게 떠넘기고선,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갔다.
-벌컥
대문을 열자마자 몸이 뚝 멈춰 섰다.
“오셨습니까 벨져 후보?”
뭐야 이 상황은?
“영지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웬 익숙한 마족이 마치 자기가 집주인인 것마냥 능청스럽게 질문을 건네고 있다.
“당신이 왜 제집에 있습니까?”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만, 이제 해결이 됐습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다 보면 잠시 사고가 정지하기 마련.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남의 집에 멋대로 찾아온 것도 모자라, 뭐? 용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자리한 불청객의 정체는 바로 경합 중재 위원회의 수장,
위즈 메디아였다.
그때, 뒤에서 헐레벌떡 브릴리스가 달려왔다.
“오, 오셨습니까 벨져 님? 영지의 일은 어떻게 되셨는지?”
“해결했어. 근데, 왜 이 마족이 내 집에 있는 거야?”
“그 중재 위원회 일과 관련해서 벨져 님과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하고 싶은 말?
그럼 날 기다렸다는 건가?
“하하. 나누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도록 하죠. 그럼 이만…….”
위즈는 그렇게 나를 지나쳐 문밖으로 나갔다.
그를 붙잡고, 정확히 뭐 때문에 온 건지 심문해야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브릴리스에게 물었다.
“저 마족, 와서 뭐 하다 갔어?”
“1층 접견실에서 벨져 님을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갈 때가 되었다며 일어나더니, 문 앞에서 벨져 님과 마주친 겁니다…….”
뭐야 그건?
그냥 애초에 날 만날 생각 자체가 없었단 거잖아?
“다른 건? 다른 일은 없었어?”
“예. 위즈 님은 그냥 접견실에만 있었을 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한데…….”
잠시 뜸을 들인 브릴리스가 다시 말을 이으려는 차,
2층 계단에서 이사벨과 메이가 내려왔다.
“왔어요 벨져?”
표정만 봐선 뭔가 일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바로 올라와 주세요. 봐야 할 게 있어요!”
조금 얼떨떨하긴 했지만, 일단 둘을 따라가 보았다.
그녀들이 이끈 곳은 다름 아닌 페로나가 있는 방.
집을 떠나 영지를 갔다 오기까지 불과 1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방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변해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페로나? 뭐 때문에 그러는지 말 좀 해보라니까!”
“미, 미안해 언니! 하, 하지만…….”
감기라도 걸린 듯 이불을 뒤집어쓴 페로나와 그걸 속 터질 듯한 눈으로 지켜보는 루비아.
미켄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허탈하게 서 있었다.
나는 곧장 이사벨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겠어요. 벨져가 떠나고 뭣 좀 말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기 머리를 붙잡고선 비명을 질렀어요. 이후엔 쭉 저 상태였고요.”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할 수 없단 말만 반복하고 있어, 아무래도 정신에 문제가 생겼나 봐.”
덩달아 답변한 세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빙글 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라.
불현듯 하나의 추측이 떠오른 나는 천천히 페로나에게 다가갔다.
“히익!”
나를 발견한 페로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많이 봤던 눈이다.
특정 대상을 향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있던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됐다는 건,
필시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그녀에게 닿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페로나가 아닌 남은 모두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다들 나가줄래?”
이사벨을 비롯한 모두는 순순히 나갔지만, 루비아 남매는 그러지 못했다.
“걱정 말고, 나가서 기다려 주시죠.”
나와 페로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루비아는 끝내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 남겨진 건 나와 페로나 둘뿐.
나는 그녀가 누운 침대에 앉아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 나 말 못 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말 안 해도 돼.”
사람, 마족에게 있어 의사소통 수단이 말만 있는 건 아니까.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나는 넌지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페로나는 눈을 끔뻑였으며, 이에 그녀의 손가락을 집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많은 걸 전달할 필요는 없다.
내 궁금증을 풀 수 있으면 작은 단서만 전달하면 되니.
비로소 내 뜻을 이해한 듯 페로나는 눈빛이 밝아졌다.
이윽고 내 손바닥 위로 일련의 글씨를 써나갔다.
‘관조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