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40
제140화. 정(情)
마계 대륙 중부, 이뉘디아 가의 저택.
해가 저문 한밤중이지만, 하늘엔 이 근방에서 보기 드문 먹구름이 몰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분위기에서 이사벨은 저택 서재에 홀로 앉아 독서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시녀가 들어오니,
이사벨이 앉은 책상 위로 차를 내었다.
할 일을 마친 시녀가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는데,
“이름이 뭐죠?”
이사벨이 대뜸 시녀의 이름을 물었다.
화들짝 놀란 시녀는 이사벨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도, 재빨리 대답했다.
“리리엇이라고 합니다 이사벨 님!”
이사벨의 시선은 리리엇이 아닌, 읽고 있던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리리엇 양은 이 집에 몇 년이나 있었나요?”
“오, 올해로 딱 5년 됐습니다!”
5년.
이사벨이 종주에 부임한 기간과 비슷했다.
“꽤 오래 있었네요? 어때요? 일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예 없습니다! 사실 들어오기 전엔 가문 내에 싸움이 잦다 해서,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이사벨 님께서 잘 관리해주신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관리라는 말에 이사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행이네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셔도 좋아요. 그만 나가보세요.”
“예 이사벨 님.”
시녀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이에 이사벨은 책갈피에 껴놓은 종이 하나를 꺼내, 리리엇이라는 이름이 적힌 부분을 두 줄로 그었다.
종이엔 리리엇 외에 저택에서 일하는 다른 시종들의 이름이 쭉 적혀있었는데, 전부 이름 위가 두 줄로 그어진 상태였다.
명단을 보던 이사벨은 한숨을 쉬며 천장을 보았다.
“이게 뭐 하는 일인지…….”
마음 같아선 주변 마족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당신이 관조자인가요?’라며 대놓고 묻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찾는 건 이사벨의 방식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비밀리에 수사를 이어 나가며 관조자란 범인을 찾은 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자 계획이었다.
-쿠구궁!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엔 급기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사벨은 어릴 적부터 비에 젖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오늘 같은 날은 마당 밖에도 나가지 말고, 집에서 관조자나 찾자는 마음에 열린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키융~!”
창밖으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소리의 주인은 분명,
“수호??”
벨져의 드래곤 수호였다.
이사벨은 급히 저택 정문이 보이는 다른 쪽 창문으로 달려갔다.
방금 소리가 정말로 수호의 것이라면, 그 혼자 왔을 리 없었다.
분명 그의 주인도 함께 왔을 거란 마음에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빼니,
“뭐야?”
정문 앞에서 비를 쫄딱 맞고 있는 벨져와 드래곤 형의 수호가 보였다.
이사벨은 지체할 것 없이 곧장 저택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선 가문 소속의 마족들이 벨져와 대치 중이었다.
대표로 나선 로베르토가 정문 너머의 벨져를 마주하며 물었다.
“이 야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이사벨 님을 좀 보러 왔는데? 안에 있어?”
“계시긴 합니다만, 어떤 일이신지를 먼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사벨 님은 비를 맞는 걸 싫어하시는 터라, 용건을 먼저 말씀해주시면…….”
“다들 비키지 않고 뭐 해요!?”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잇던 로베르토는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이, 이사벨 님?”
비가 쏟아지는 밖을 우산도 없이 나온 그녀를 보며, 마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사벨은 상관없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 것을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시종들이 재빨리 문을 여니,
“어쩐 일이에요 벨져? 이 야밤에?”
이사벨은 헐레벌떡 다가가 벨져에게 찾아온 이유를 직접 물었다.
벨져는 잠시 말없이, 이사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괜찮으신 모양이네요.”
“네?”
“다행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벨져를 보며 이사벨은 미간을 좁혔다.
“어디 아파요? 다짜고짜 찾아와선 무슨 말이에요? 관조자 찾는 일은 어떻게 된 건데요?”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무사하신 거 봤으니, 전 이만 가보죠.”
“아니 잠깐만요! 벨져! 또 어딜 가는 건데요?”
이사벨은 돌아서는 벨져를 따라가며 연신 물었지만, 벨져는 어떠한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수호의 등에 올라타고선 하늘로 날아오를 뿐.
그 모습을 이사벨은 빗물에 젖은 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설명은 제가 대신해 드리죠…….”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사벨은 고개를 돌렸다.
돌린 곳엔 다일과 페르가 자리했다.
“다일 후보? 당신은 왜 또 여기 있어요?”
“벨져 후보는 지금 청해로 갔을 겁니다.”
“청해라면 세나가 있는 곳에요?”
다일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을 이었다.
“이 마왕 후보 경합은 애초부터 짜여진 판이었습니다.”
두 후보는 빗물에 온몸이 젖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그 자리에서 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 * *
내가 모방된 이노투스로부터 울타비스를 구하던 사이, 다일은 그 근처에 있던 경합 중재위원회의 마족들을 협박해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캐물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동안 쥐새끼처럼 숨어있던 그들로부터, 우리가 원하던 진실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아무튼, 그에게 들은 진실은 이렇다.
경합 중재위원회.
그들은 전대 마왕 사후, 힘의 세력이 갈라진 마계에서 마왕 경합을 처음으로 계획하고 제안한 집단이다.
선별된 N명의 후보들 중 가장 강한 한 명을 선발하고, 선발된 마족에겐 나머지 후보들이 가진 힘과 마력을 마혈석을 통해 전부 넘긴다.
이것이 그들이 제시한 경합의 목표다.
여기만 봐선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허나 이것만큼은 짚고 나가야 한다.
‘마왕이 선출되면 그들에겐 어떤 이익이 따라오는가?’
어느 계획에서든 목적 없는 목표는 없다.
후보들에겐 경합이라는 나름 평화적인 방법으로 혼란스러운 마계를 제패할 수 있단 이점이 있고, 이를 통해 마계 최강의 존재라는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으니, 그들에겐 나쁠 것 없는 과정이다.
하지만 경합 중재위원회는?
새로운 마왕이 선출되면 거기엔 어떤 이점이 따를까?
마계의 평화?
브릴리스가 있는 마계 온건파처럼 뭔가 주장하는 바라도 있다면 모를까,
경합 중재위원회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떠한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았다.
속된 말로 나 말고, 네로나 그룸 같은 막 나가는 후보들이 마왕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 같으면 지금까지 경합을 중재해줘서 고맙다며, 앞으로 너희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겠다고 할까?
절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경합 중재위원회는 원했다.
자신들의 중재를 통해 선출된 마왕이 자신들의 뜻을 받아들여 주길,
더 나아가 자신들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줄 것을 말이다.
이를 위해 각 후보 곁에 비밀리에 붙였던 존재들이 바로 관조자였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후보들을 관찰한다.
절대로 후보들이 하려는 일엔 직접 개입하지 않으며, 대신 은밀히 방향만 제시한다.
그러다 보면 관조자들은 어느새 마왕 후보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될 것이다.
자신이 관조자라고 직접 말은 안 했지만, 거의 말한 거나 다름없던 울타비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인간은 우리 마족에겐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자신들은 그 무언가를 마왕 후보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있다.
그리고 그가 본 나는 이미,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라고.
그 무언가가 뭔지, 난 계속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것은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면 모두가 내면에 품고 있는 것.
바로 정(情)이다.
용사 시절의 나는 당시 힘으로 비교하면 마왕보다 압도적 열세였다.
그런 내가 벨시페르와의 혈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정’ 때문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그렇기에 내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존재들을 지켜야 한다는 그 마음 때문에, 나는 최후의 최후까지 싸웠고, 끝내 승리했다.
이렇듯 정은 생명에게 있어, 때로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선 약점이 될 수 있다.
마왕을 물리쳤지만, 수십 년 동안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정만을 앞세워 현자들과의 무리한 싸움을 감행했던 나는,
결국 현자들에게 패해 용사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이렇듯 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경합 중재위원회는 단언하건대, 마왕 후보들에게 힘으로 대적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대신 후보들 마음속에 이 ‘정’이란 것을 심어 일종의 약점을 만들려 했을 것이다.
내게 검을 만들어준 울타비스,
루비아의 없어선 안 될 가족 페로나,
다일에게 때때로 유용한 정보를 가져다준 마르샤까지.
우리는 전부 관조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왔다.
심지어 다일은 마르샤를 공격한 마족을 찾으면 그를 죽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다.
다일에겐 그 상인 할머니가, 이미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됐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앞서 말했듯, 관조자들은 중재위원회와 한통속이다.
게다가 저주 마법이라는 관조자들을 다스릴 수 있는 수단까지 그들은 가지고 있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그들은 관조자들을 약점 삼아 마왕 후보를, 더 나아가 마왕을 컨트롤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게 바로 중재위원회가 가진 진짜 목적.
하지만 계획이란 건, 본래 매끄럽게 진행되는 법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
그 변수를 막기 위해 나는 지금 청해로 향하고 있다.
이사벨의 저택에서 떠난 이후, 줄곧 말이 없는 내게 수호가 처음으로 감응을 보냈다.
“왜?”
[조금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가줘,”
…라고 하기엔 나도 내 몸 상태가 느껴진다.
매서운 장대비를 몇 시간 동안 맞으며 고속으로 비행하긴 했지만, 그걸로 인해 몸이 아프다거나 하진 않다.
마족의 신체는 인간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하니까.
문제는 몸이 아닌 정신이다.
이성의 끈이 풀릴 듯, 안 풀릴 듯 간당간당한 상태.
허나 풀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잡고 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바다내음이 느껴집니다. 말씀하신 청해가 가까워진 듯합니다.]하늘은 이제 막 해가 떠오르려는 듯한 새벽.
수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밤새 날아온 덕에 하루도 안 돼서 청해에 도착했다.
익숙한 모래사장 위로 안착하니, 수평선 너머로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잠잠하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비도 어느덧 그쳤다.
내가 알던 청해는 이런 날씨가 아닐 텐데?
수호와 함께 잔잔한 파도를 멍하니 보고 있던 차,
뒤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벨져 님?”
다행히 경계할 대상은 아니었다.
세나의 퍼밀리어인 제임스와 그 뒤론 이전에 카리브디스 안에서 보았던 마족들이 보였다.
정작 세나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제임스에게 물었다.
“세나를 좀 보러왔습니다만……. 어디 있습니까?”
“세나 님께선 지금 청해에 안 계십니다.”
내면에서 불안이 싹을 틔웠다.
“그럼 어디에?”
“애석하게도 저희는 모릅니다. 저희에게 어딜 가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대신…….”
제임스는 속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곧 눈앞에 작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걸 벨져 님께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선홍빛이 감도는 익숙한 돌.
더 볼 것도 없는 세나의 마혈석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제임스를 마주했다.
“저희는 오직 세나 님의 말만 따르고, 세나 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 저희에게 세나 님의 지시는 절대적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제임스의 뒤에 있던 마족들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결연한 눈빛을 밝혔다.
“하여,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는 세나 님의 지시를 저희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온단 말은 했습니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켰지만, 곧 모두 지운 채 단 하나의 생각만을 남겼다.
“뭘 하러 간 겁니까? 세나는?”
어디에 갔는진 모르더라도, 뭘 하러 갔는진 알 거란 생각에 물었다.
제임스는 비애가 서린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으며, 그 시선을 나는 말없이 받아주었다.
“원수를 갚으러 가셨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