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44
제144화. 기억
세나는 2년 전 비극의 날을 기억했다.
생애 세 번째로 외출을 했던 그날, 세나는 생애에서 가장 잔혹한 광경을 봐야만 했다.
바로 세이론의 죽음.
선대 나태의 종주이자 그녀의 친부였던 그가 피를 토한 채, 절벽 밑에서 쓰러져 있었다.
그 광경을 온전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족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누구한테 당한 것이냐는 시종들의 질문도 전부 무시한 채, 세이론은 나직이 세나를 불렀다.
그러곤 말없이 마혈석을 세나에게 주었다.
그때 보았던 세이론의 눈빛은 마치,
자신이 짊어질 짐을 딸에게 떠넘겨야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꼭 이루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등이 섞여 있었다.
애석하게도 마혈석을 받고 난 후의 세나에게 기억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카리브디스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혹여 악몽이라도 꾼 건가 싶어 세이론을 찾아봤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악몽이 아니었다.
“세이론 님과 올리비아 님.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깨어난 그녀에게 제임스가 비보를 전해주었다.
세이론은 세나가 쓰러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고,
평소 지병을 앓고 있던 올리비아는 세이론이 죽었단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쓰러져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허나 비보를 들은 세나는 오히려 덤덤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제임스를 비롯한 시종들과 카리브디스, 그리고 피그리티아 가문의 마혈석뿐.
“이젠 내가 나태의 종주인 거지?”
세나는 마치 자신의 할 일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손에 쥔 마혈석을 빤히 보면서 말했다.
“나, 마왕이 될래.”
마왕이 된다.
그건 다시 말해 마왕 후보 경합에 참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때만 해도 세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엔 슬픔이 너무나도 많다고.
그런 슬픔이 만연한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봐야 무얼 하겠는가?
차라리 마계를 멸망시켜 모두를 영원한 잠에 취하게 한다면?
슬픔을 느낄 일도 없을 테니, 그거야말로 진정 마계가 평화로워지는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나는 벨져를 만나면서 그 마음을 접었다.
나태함에 젖어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재미라는 걸 가르쳐준 마족.
벨져를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세나는 모든 걸 내어줄 수 있었다.
허나 그러면서 어느샌가 잊고 있었다.
자신은 어쩌다가 마왕 후보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얼 잃게 되었는지.
세이론은 누구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며,
그가 자신에게 마혈석을 넘겨준 이유는 무엇인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기억의 흐름을 막은 것처럼, 그동안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이유였어? 우리 파파가 마왕 후보직을 원하지 않아서, 그걸 나로 대신하기 위해 파파를 죽인 거야?”
위즈로부터 모든 계획의 전말을 들은 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위즈는 디버프에도 굴하지 않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서, 선대 나태의 종주를 안식으로 인도한 독은 제가 전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세이론의 사인은 중독사.
그날 떠돌이 의사에게 받은 독을 섭취하고 죽은 게 맞았다.
하지만,
“그걸 음독한 건 세이론 피그리티아! 바로 본인입니다!”
세나의 눈이 순간 초점이 풀리며 흐트러졌다.
스스로 음독했다. 그 말은 곧,
“파파가 자살을 한 거라고……?”
세나로선 당연하게도 쉬이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믿지 못하겠으면, 제 기억을 들춰보시지요. 당신도 나태의 종주라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왜? 파파는 왜 독을 마신 건데?”
“제가 왜 이리 마왕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보셨기 때문이죠. 더불어…….”
디버프가 조금 약해진 틈을 타, 위즈는 몸을 일으켰다.
“세이론 님은 할 수 없던 일을 세나 님에게 넘기기 위해서입니다!”
“넘겨? 뭘?”
“그야 당연히 마왕이겠지요! 세이론 님은 세나 님이 마왕이 되길 원하셨던 겁니다! 그다음엔 이 마계를……!”
“아니야아아아!!!”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세나의 울부짖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급 밀려오는 두통에 세나는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뭐야? 기억이 안 나! 파파는 대체 왜? 나한테 이걸 왜 준 건데?”
전말을 들었음에도, 세나의 의문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어지러운 기억 속에는 그날 마혈석을 주었던 세이론의 마지막 모습이 넘실거렸다.
-벌컥!
그때, 세나가 들어왔던 문이 열리며 한 마족이 다급히 들어왔다.
흑발의 마족은 고통에 울부짖는 세나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세나는 고개를 들었다.
“파파?”
새 생명으로 세상 밖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날,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바로 그 손길.
허나 그 손길의 주인은 세나가 생각한 마족이 아니었다.
그 마족은 다름 아닌,
“무사해서 다행이네…….”
벨져였다.
비로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서일까?
혼란에 일그러졌던 세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잠이 든 세나를 벨져는 말없이 안고 일어섰다.
“그냥 가실 겁니까?”
아무것도 않고 떠나려는 벨져를 위즈가 불러 세웠다.
부름에 멈춰선 벨져는 고개를 돌리진 않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다시 올 겁니다.”
목소리에는 무거움이 가득했다.
“그러니 여기 그대로 있으세요.”
그 뒤로 이어야 할 뒷말이 있었지만, 벨져는 거기까진 뱉지 않았다.
다시 왔는데 없으면,
평생 도망갈 신세로 만들어주겠다는 뒷말을 말이다.
벨져는 그 길로 은거지를 떠났다.
* * *
처음 세나가 나와 단일화를 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마혈석을 내게 망설임 없이 주었다.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이사벨과 마찬가지로 힘은 원래 다뤘던 주인이 사용할 때 가장 큰 효율을 낼 수 있기에, 그녀들이 계속 다뤄주면서 나를 도와주길 바랐다.
하지만 세나의 마혈석은 지금 내 손에 있다.
마치 더는 이 마혈석을 돌려받을 일이 없다는 듯.
“파파…….”
애달픈 마음이 느껴지는 부름과 함께 잠들었던 세나가 눈을 떴다.
“벨져?”
“어. 나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널 만나러 왔으니까.”
당연한 걸 묻고 있다.
벌떡 일어선 세나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온 건데?”
[세나 님의 냄새를 따라왔습니다.]바로 뒤에서 들려온 수호의 응답에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린 지금 산들바람이 부는 초원 한복판에 드래곤 성체로 변한 수호의 품에 몸을 누이고 있다.
상황을 알게 된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리한 드래곤이네…….”
그러면서 다시 내 무릎 위로 머리를 눕혔다.
나는 그녀의 머리 위로 마혈석을 꺼내 보였다.
네 잘못을 네가 알렸다!
“내 마혈석이네. 그건 왜?”
괘씸함이 솟은 나머지,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어디서 모른 척을 하려고?
세나는 아야 하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고, 나를 무심히 쳐다봤다.
“나 지금 혼나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지금.
“나한테 이걸 홀라당 남기고 가면, 내가 좋아라 하고 널 둘 줄 알았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경합 그 남자를 찾아간 거야?”
세나는 말없이 시선을 회피했다.
“그 이노투스란 놈이 왔었지?”
“어….”
“그놈이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카리브디스를 넘겨주면 마마랑, 파파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알려준다고 했어.”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네.
“그래서 넘겼어? 카리브디스를?”
“아니. 이상한 소리 하길래 그냥 몸을 짓눌러서 터트려버렸어. 근데 피가 아니라 흰 가루 같은 게 튀어나와서 놀랐어. 본체가 아니었나 봐.”
울타비스 때와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이것도 같이 있었어.”
세나는 작은 쪽지 같은 종이를 내게 보여주었다.
바로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더 볼 필요도 없단 생각에 바로 찢어버렸다.
이 내용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건 이미 중요하지 않다.
“그래. 직접 물으러 간 것까진 좋다 이거야. 근데 마혈석은 왜 남겨두고 갔어?”
“그건….”
세나는 대답하기 곤란했는지 다시금 시선을 회피했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 그 진실을 알면, 내가 더 이상 벨져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말이 어딨어? 왜 있을 수 없는데?”
“나야 모르지. 정신이 붕괴될 것 같은 기분? 아무튼 그랬어.”
얘가 또 멀쩡히 지내다가도, 이상한 데서 삐뚤어지려고 하네?
딱밤을 한 대 더 때려줄까 하다가 손을 내렸다.
“파파는 정말 암살당한 걸까?”
“그걸 여태 물어봤던 거 아니었어?”
“독을 준 건 자기가 맞지만, 그걸 스스로 마신 건 파파래.”
세나는 다시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이상해. 파파의 죽는 순간을 분명 목격한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불분명해. 마치 누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파파가 내게 마혈석을 전해줬고, 그 이후론 기억이 안 나.”
“그럼 확인해보면 되잖아?”
“어떻게?”
“네 마혈석에 담긴 기억으로 말이야. 거기 너의 부모님의 기억도 담겨 있다면서? 네 파파의 마지막 기억도 있지 않겠어?”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전에도 여러 번 시도해봤어. 근데 안 돼.”
“안 된다고? 그럼 그 기억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거네?”
“응. 파파의 마지막 기억을 들춰보려고 하면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들춰보지 말라고 마혈석이 거부하는 느낌이야.”
어떤 방어 장치가 있다는 뜻인가?
그럼 그 방어 장치를 만든 마족은 정황상 선대 종주인 세이론밖에 없을 것이다.
딸아이가 보지 말아야 할 기억이라…….
잠깐만.
그럼 다른 마족은 봐도 된다는 건가?
“그럼 내가 봐줄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세나는 눈을 깜빡였다.
“너 예전에도 그 마혈석으로 나한테 기억 보여줬었잖아. 같은 방식으로 내게도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야?”
카리브디스 안에서 세나를 처음 만났던 그날, 나는 마혈석에 담긴 선조들의 기억을 거부감 없이 봤었다.
만약 세나가 보고픈 기억을 세나는 볼 수 없게끔 마혈석이 거부하는 거라면,
세나가 아닌 제삼자는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잖아?
세나는 잠시 어 하고 멍한 소리를 내며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벨져 역시 똑똑하네.”
“똑똑하기보단 발상의 전환이야. 어쨌든 가능은 한 거지?”
“응.”
나는 세나에게 다시 마혈석을 돌려주었다.
세나는 마혈석을 두 손에 꼭 쥔 채 가슴에 얹었고, 이마를 슬그머니 내 이마에 갖다 댔다.
“눈 감아 벨져.”
그녀의 말에 따라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감긴 눈앞으로 요상한 붉은 광채가 번뜩였고,
-철썩철썩
익숙한 파도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파도 소리…… 가 들리면 안 될 텐데?
나 지금 초원 한복판에 있지 않았나?
의문스러운 마음에 눈을 뜨니,
“엥?”
맑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붉은 하늘 밑에 푸른 바다라면, 여기 청해란 소리잖아?
공간이동 마법에 휘말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게 뭔…….
“이건 좀 의왼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소리에 이끌리듯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절벽 끝에서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보고 있는 낯선 마족.
어딘지 모르게 누굴 좀 닮은 느낌이 있었다.
“짙은 흑발에 이목구비를 보아하니, 너! 전대 마왕의 후손이구나? 그렇지?”
말투 자체는 가벼웠지만,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강자라는 걸 파악한 나는 검 자루에 손을 얹었지만……,
검이 없다!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경계할 필욘 없어. 여긴 마혈석에 담긴 기억 속 세계니까.”
“그럼 그쪽은?”
“나도 물론 기억 속에 있는 허상 같은 존재지. 누군가가 마혈석을 통해 기억을 들춰보러 오면 친절한 설명을 해줄 수 있도록 존재하는…….”
기억 속 세계 주제에 별 게 다 있다.
근데 이 마족, 보면 볼수록 누굴 계속 닮은 느낌인데?
저 똘망똘망한 눈이 반 정도 감기면, 딱 떠오르는 마족이 한 명…….
마족은 머리를 굴리느라 미간을 좁히고 있는 나를 보며, 낯설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바로 생각이 났다.
그가 누굴 닮았는지.
“반가워. 전대 마족의 후손. 난 선대 나태의 종주. 세이론 피그리티아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