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45
제145화. 마왕이 필요한 이유
세이론 피그리티아.
방금 전까지 줄기차게 이야기를 하고 왔던 세나의 친부다.
이걸 뒤늦게 깨달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녀와 아주 똑 닮았다.
내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분위기에 있었다.
세나의 눈은 눈꺼풀이 항상 반쯤 감겨 있어서 우울하고 나태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또렷하고 생기 있는 눈빛에서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향이 엿보였으며, 이는 세나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저 눈이 딱 반만 감기면 세나랑 아주 판박이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게 중요하진 않다.
이 남자는 왜 여기 있냐는 게 중요하지.
자신의 정체를 밝힌 세이론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세나의 마혈석에 담긴 내 마지막 기억을 보러 온 거지? 혼자 볼 수 없는 세나를 대신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볼 수 있는 겁니까?”
“어. 이 기억은 마혈석을 지닌 두 명의 마족이 서로 교감을 이루었을 때, 개방될 수 있게 되어있어. 즉 세나가 다른 마왕 후보와 단일화하거나, 혹은 굴복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성립돼야 한다는 거지.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지금 같은 경우는 그 반대에 해당될 것이다.
세나는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면서 나와 단일화를 한 거니까.
세이론은 급기야 내 전신을 위부터 아래까지 스캔하듯 쭉 훑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내 딸이 넘어간 거긴 해도, 썩 나쁜 관계는 아닌 것 같으니?”
“그건 어떻게 압니까?”
“여길 통해서 알지.”
세이론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너 지금 세나와 이마를 맞대고 있지? 그 아이의 진심 어린 온기가 지금 나한테도 그대로 느껴져. 내 딸은 아무에게나 이런 온기를 주지 않거든. 그만큼 네가 엄청나게 소중한 마족이란 뜻이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애써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세이론은 그마저도 이미 느끼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그만 보러 온 걸 보여줘야겠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했다.
“세나는 당신의 마지막을 본 이후의 기억이 불분명하다고 했습니다.”
“그럴 거야. 내가 죽기 전, 마혈석의 힘을 발휘해서 의도적으로 지웠으니까. 세나만이 아니라, 제임스를 비롯한 카리브디스의 시종들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내가 그냥 정체불명의 마족에게 독살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거야.”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요? 아니, 애초에 정말 독살당한 건 맞습니까? 당신 같은 마족이?”
세이론은 대답 대신 입맛을 다셨다.
기억 속 허상 같은 존재라고 해도, 그 내면에서 뿜어지는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다.
세나만큼, 아니 세나 이상으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실력자였을 그가, 누군가로부터 허무하게 암살당했다는 건 나도 믿을 수 없다.
세이론은 끝내 나를 보며 다시 웃었다.
“암살당한 거 맞아. 나한테…….”
“스스로 마신 거 맞네요. 그럼.”
“어쩔 수 없었어. 나로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게 뭐였습니까?”
“대답하기에 앞서, 하나 물어볼 게 넌 마왕이 될 거니?”
“물론입니다.”
“왜?”
이제는 대답하는 게 지겨운 질문이다.
나는 늘 그래왔듯, 익숙한 대답을 내었다.
“이 세상이 그걸 원하니까요.”
“세상이 원해서라. 그럼 세상이 죽으라면 죽을 거니?”
“마계는 마왕이 죽길 원한답니까?”
“예를 들자는 거야, 예를. 마왕은 마계의 최강자이자 그 세계를 지켜야 하는 절대적 존재야. 그런 마계를 지키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어떨까? 넌 마왕으로서 그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니?”
희생.
이 역시도 내겐 진부한 질문이다.
“못 해본 일도 아닙니다.”
감출 것 하나 없이, 내면에서 우러나온 진심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
이 고된 짓거리를 나는 이미 한 번 해봤다.
내 대답을 들은 세이론의 미소가 잠시 흐트러졌다.
“재밌는 존재구나. 너?”
부정할 마음이 없던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좋아. 보여주마. 마왕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다시 마음을 바꾼 이유를. 거기에,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딸아이에게 짐을 넘길 수밖에 없던 이유까지…….”
세이론은 사뭇 무거워진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고,
그러자 파도 소리로 가득했던 청해의 절경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바뀐 장소는 와본 적 없는 숲 한복판.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는 내 앞으로 곧 또 다른 기억 속 존재들이 나타났다.
한 명은 처음 보는 마족이었지만,
한 명은 떠올리는 것조차 지겨울 만큼 익숙한 마족이었다.
“벨시페르?”
전대 마왕 벨시페르.
녀석은 좀처럼 본 적 없는 진중한 얼굴로 땅바닥을 응시 중이었다.
그냥 평범한 땅바닥이면 뭐 지나가는 개미의 수라도 세는 건가 싶었지만,
그가 보고 있는 땅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오랜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균열이 전체적으로 퍼져 있었고, 중간중간엔 움푹 파여 들어간 크레이터들도 보였다.
균열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빛이 나타났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차마 똑같은 발을 대고 있는 마계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의 이질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대지를 한참 동안 보던 벨시페르는 마침내 무릎을 쪼그려 앉았고,
빛이 새어 나오는 균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게 마지막이로군.”
그러자 균열 속에 있던 미지의 기운이 빛을 타고 벨시페르의 몸속으로 전이되었다.
벨시페르는 거부감 없이 그 기운을 전부 받아들였다.
“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 한숨이 그의 입에서 뱉어졌다.
이를 본 또 한 명의 마족이 물었다.
“버틸 만하신지요?”
“어느 정도는! 근데 오래는 못 갈 것 같구나! 당장 누군가와 싸우지 않고선 내 몸이 터질 것 같은 매우 불쾌한 기분이야!”
불쾌하단 말관 다르게, 벨시페르는 웃고 있었다.
“그나마 마왕님이시니 버티시는 겁니다. 하지만 몸속에 마냥 품는다고 해서 소멸하진 않겠지요. 그 투욕을 어딘가에 푸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왕님은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폭주하시겠지요. 그 폭주한 마왕님을 막을 수 있는 마족은, 이 마계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마왕인 거 아니겠느냐! 킥킥!”
하늘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벨시페르와 다르게, 마족의 얼굴은 우수로 가득했다.
“인계로 가시지요. 거기서 마왕님의 투욕을 푸셔야 합니다.”
“거기에 만약 내 투욕을 풀어줄 존재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멸망하겠지요.”
“내 세상을 지키기 위해, 다른 세상을 멸망시켜야 한다라……. 썩 내키는 방향은 아니구나.”
웃음을 유지하던 벨시페르의 표정에 처음으로 씁쓸함이 나타났다.
“부디, 거기에도 나 같은 존재가 있기를 바라야겠구나. 없으면 또 다른 세상에서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벨시페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고, 대화를 나누던 마족과 유유히 자리를 떴다.
나는 바로 세이론에게 물었다.
“뭡니까 이게?”
“경합 중재위원회장 위즈 메디아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일부다. 아마도 녀석은 이 기억을 본인의 조부를 통해 들은 거겠지.”
“조부?”
“방금 전대 마왕 옆에 있던 마족 말이야. 그 남자가 바로 위즈 메디아의 조부야. 루이스 메디아라고 하는…….”
나로선 절대 걸러 들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 저 남자가?”
“전대 마왕에게 인계 침공을 유도한 장본인이지.”
세이론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다들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을 거야. 전대 마왕이 인계 레지에타를 침공한 이유는 스스로의 전투욕을 견디지 못하고, 더 강한 존재를 찾아서 싸우려 함에 있었다고.”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제삼자에게서 들은 게 아닌, 벨시페르 그놈이 내 앞에서 직접 말한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마왕의 투욕은 내적인 욕구가 아니었어. 어디까지나 외적인 영향을 받은 거였지.”
세이론은 말하는 동시에 지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라진 균열 속에는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검은빛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저게 뭔지 궁금하지?”
“마왕을 폭주하게 만드는 기운이란 건 알겠습니다.”
“이른바 ‘투기(鬪氣)’라고 하는 기운이야. 내면의 잠들어 있는 전투욕을 자극하고, 더 강력한 힘을 한없이 추구하게 만드는 오직 마족에게만 피어나는 욕망이지.”
“이게…… 언제부터 있었던 겁니까?”
“이 마계 대륙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기운도 처음부터 이리 거대하진 않았어. 처음엔 나뭇잎에 맺힌 이슬만큼 작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대륙이 점차 거대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몸집을 불린 거지. 그 결과 이런 대책 없는 상태까지 오게 된 거고.”
“전대 마왕은 생전에 이 기운을 흡수하고 다닌 겁니까?”
“흡수하지 않으면 다른 마족에게 전이되었을 테니까. 전대 마왕처럼 강인한 정신을 지니지 않은 마족들은 이 기운을 받은 순간, 이성을 잃고 폭주했을 거야. 그럼 이 마계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하겠지.”
“그럼 이걸 순전히 혼자…….”
“감당하고, 희생한 거지. 마계를 위해서, 그리고 마족들을 위해.”
처음 대면했을 때도,
치열한 혈전 후에 마지막으로 목을 벨 때도,
그냥 싸움에 미친 놈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미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벨시페르 그는 알게 모르게,
나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하지만 전대 마왕 본인도 언제까지 몸에 억누를 순 없었을 거야.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인계 침공이었던 거지. 뭐 너도 알다시피, 결과는 마왕의 죽음으로 끝났어. 문제는 이 투기란 기운이 아직 마계에 남아있다는 거야.”
“완전히 없앨 방법은요?”
“전대 마왕처럼 강력한 누군가가 또 흡수해야만 하겠지.”
고개가 절로 하늘로 젖혀졌고, 입에선 욕이 튀어나왔다.
이거였나?
이 마계가 마왕을 필요로 했던 이유가?
경합 중재위원회의 목적도 이거였겠지.
투기라고 하는 기운을 받아줘야 할 그릇을 만들어내는 거.
그건 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놈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누군가는 또 희생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난 감당할 수 없었어. 설사 내가 마왕이 된다고 해도, 이 투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짐을 떠넘긴 겁니까? 딸한테?”
세이론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회피했다.
“마혈석은 소유주가 죽으면, 소유자의 몸에 담긴 마력을 전부 흡수해. 다음 소유주에게 더 엄청난 마혈석을 전해줄 수 있도록. 내가 지켜줄 수 없다면,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난 세나에게 그걸 해줬을 뿐이야…….”
“덕분에 따님은 마계를 멸망시키겠단 목표를 세웠죠.”
“아, 그건 예상 밖 미스! 너도 나중에 자식 키워보면 알 거야. 자식은 부모가 의도한 대로 자라지 않거든. 항상 이상하게 엇나가더라고.”
뭐, 그야 그렇긴 하지.
“아무튼, 네가 내 딸을 소유하게 됐고, 이 기억도 본 이상. 너는 좋든, 싫든 마왕이 돼서 이 희생을 감수해야만 해. 할 수 있겠냐?”
“해야겠죠.”
나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면.
1초의 고민도 않은 내 답에 세이론은 헛웃음을 내었다.
“야! 넌 근데 뭐 예스맨도 아니고, 대답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다? 지금까지 내 말 제대로 이해는 한 거지?”
“물론입니다.”
“근데 그렇게 대답을 막힘없이 한다고? 아니 난 솔직히 아직 이해가 안 되거든? 전대 마왕의 후손이긴 해도, 내가 죽기 전의 넌, 그냥 별 볼 일 없는 망나니 아니었냐? 그런 네가 어떻게 이런 강인한 정신을 가질 수 있던 거야?”
흠.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나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고민하다가도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궁금하시면 확인해보세요.”
“음?”
“허상의 존재라고 해도, 당신이 세이론 피그리티아의 일부라면, 제 기억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은 있겠죠. 그러니 확인해보시란 겁니다.”
“얼마나 대단한 걸 지니고 있길래, 자신 있게 확인해보라고 할까? 이거 오랜만에 흥미가 돋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세이론은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고 눈을 감기를 약 1분.
다시 눈을 뜬 세이론은 이전과 다른, 당혹을 금치 못한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너, 너……?”
“말을 하세요. 더듬지 마시고.”
학질에 걸린 듯 입술을 떨던 세이론의 입은 마침내 미소와 함께 벌어졌다.
“졸라 재밌는 놈이었구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