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53
제153화. 증명?
머지않아 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당황보단 의문이 앞섰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은 시기상조 아닌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무사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돼서 다행입니다. 벨져 후보.”
안부 인사차 던지는 말 같은데, 어째 나한테 하나도 긍정적으로 안 들린다.
물론 네로와 혈전을 벌이기 전까지, 다일과 나는 마르샤에게 같은 의뢰를 받은 일종의 협력관계였다.
하지만 그녀가 잃어버린 마도서는 되찾았고, 보상도 받았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협력관계에서 다시 하나의 권좌를 두고 싸워야 하는 경쟁 관계로 돌아섰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내가 다일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내 앞에 나타날 게 아닌, 어딘가에 쥐 죽은 듯이 숨었을 것이다.
왜?
무려 다섯 명의 경쟁자를 제친 후보가 나한테도 칼을 들이밀 확률이 높을 테니까.
그걸 저 남자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그는 내 앞에 왔다.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을,
일련의 꿍꿍이를 지닌 채.
“제 일행들과 함께 있었다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제 할 일을 하러 갔을 뿐입니다. 전 벨져 후보와 경쟁자이지, 협력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역시 나와의 관계를 다시 재정립했다.
그럼 이젠 경쟁 관계란 걸 알면서도 내 앞에 나타난 이유를 들을 차례다.
다일은 그런 내 의중을 알아챈 듯,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네로 아와라티아가 죽었단 사실이 마계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의 잔당들, 그와 연관된 세력들부터 해서 일반 마족들까지 전부, 혼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이 떠돌고 있죠. 이제 마왕의 권좌는 벨져 후보가 차지했다고요.”
하기야, 나라도 그런 말이 나오긴 할 것이다.
“네로 후보의 보고는 비었을지 몰라도, 보고 밖에 잔여물들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이걸 가만히 놔뒀다간, 이를 차지하기 위한 새로운 다툼이 일어나겠죠.”
“그래서, 뭐. 나보고 그걸 차지하라 이 말을 하러 온 겁니까?”
“그럴 자신이 있으시다면요.”
다일의 말에는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그리 날 세우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가 모든 걸 짊어질 필요가 없음을 돌려 말한 것뿐이니까요.”
“내가 짊어지지 않으면요?”
“제게 짐을 나누시지요.”
드디어 그가 목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역시 벨져 후보 이상으로 마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마족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진 않을 겁니다.”
“그럼 그쪽이 다 하면 되겠네.”
뭔가 딱딱한 말을 지속하는 것 같아, 툭 한 번 던져봤다.
그랬더니.
“그게 제가 원하는 일입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 되돌아왔다.
살짝 벙쪄 있는 나를 보며 다일은 자신의 마혈석을 내보였다.
“전 지금부터 칼코스 산맥으로 갈 겁니다. 가서 남은 후보인 그룸 후보를 설득할 겁니다. 저와 뜻을 함께해 달라고요.”
글쎄. 그 먹보 후보가 순순히 응해줄까.
“우리의 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벨져 후보. 설사 가능성이 적다고 한들, 전 최선을 다해 당신과 싸울 것입니다. 그러니…….”
다일은 한 발짝 더 다가와 속삭이듯 소리쳤다.
“당신도 최선을 다해 나와 싸워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다일은 몸을 돌렸고, 그대로 은거지를 나갔다.
서로 간에 잘해보자는 덕담인가, 아님 반드시 나를 끝장내겠다는 선전포고인가?
뭐가 됐든, 적어도 나와 평화적인 단일화를 할 의사가 없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갈 방향이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잠시 제삼자가 된 위즈를 다시 돌아보았다.
“움직이시죠.”
위즈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어딜 말입니까?”
“다른 후보들에게도 이 기가 막힌 경합의 비밀에 대해서 알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주최자로서…….”
“제 입으로 말입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말주변 없는 나로선 잘 설명할 자신도 없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위즈는 당황한 듯 날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후보들은 적어도 벨져 후보처럼 건조한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겁니다.”
그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
다들 적잖이 흥분할 거라는 거 나도 안다.
그래도 얼추 잘 설명하면 이해하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생각은,
집에 도착한 이후 깨지고 말았다.
* * *
인간과 마족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마법이 뭔지 아는가?
바로 시간 마법이다.
현재의 시간을 멈춘다거나, 아님 과거로 돌리는 뭐 그런 거.
사실 말이 고차원이지 두 종족의 역사를 통틀어도 아직 시도조차 해본 이가 없다고 한다.
갑자기 생뚱맞게 왜 시간 마법을 들먹이냐고?
내가 지금 그 시간 마법이 펼쳐진 현장을 보는 것 같아서 그렇다.
은거지에 있던 위즈를 데리고 집에 데려온 나는 그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경합의 비밀을 모두 풀게 했다.
“……이상입니다.”
한 시간에 가까웠던 위즈의 이야기가 끝나고,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각자의 얼굴들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의, 똑같은 떨림, 그리고 똑같은 신음들을 내고 있다.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만…….
이건 좀 심각하네?
기나긴 침묵 속에서 이사벨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뽑고자 했던 마왕이란 게 결국은, 마계의 폭주를 막기 위한 투기를 받아들일 그릇이었던 거다. 그거네요?”
“맞습니다.”
“그 그릇으로 가장 유력한 마족이 현재 벨져인 거고요?”
“그렇지요.”
그릇이라고 하니까 말이 좀 이상한데?
이왕이면 좀 더 좋은 지칭어로…….
-짝!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 분위기를 전환하는 찰진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주인은 이사벨.
그녀가 대답을 잇던 위즈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위즈의 몸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진정해 이사벨!”
한 대 더 치려는 것을 루비아가 말렸다.
루비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녀의 거센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위즈조차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일어섰다.
아무래도 나만 놀란 모양이다.
그때 루비아가 한껏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물었다.
“간도 크네 위원장? 이런 이야기를 우리한테 대놓고 하면서 살길 바란 건 아니지?”
“벨져 후보가 원한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작 당사자는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것 같지만요.”
위즈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전부 나한테 향했다.
순식간에 죄인이 된 기분이다.
어찌할지 몰라 시선을 방황하던 와중 분을 식히던 이사벨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고,
“놔.”
루비아의 팔을 뿌리치고선 혼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주변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혼란에 겨워 머리를 굴리던 차, 옆에서 누군가가 옷을 당겼다.
세나였다.
“벨져. 죽을 생각이야?”
죽긴 왜 죽어 내가?
얘는 또 무슨 생각을 하나 싶다가도,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니 별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단 걸 느꼈다.
“우선 이사벨한테 먼저 가봐. 우리보단 쟤가 더 먼저인 것 같으니까.”
루비아는 이사벨이 나간 방향을 가리켰다.
나로선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기에 바로 그녀를 쫓아갔다.
이사벨은 복도 끝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그녀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괜찮으시….”
“언제부터 알았어요?”
이사벨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역으로 질문했다.
“무얼 말입니까?”
“방금 중재 위원장이 말한 사실들 말이에요! 벨져는 언제부터 알았던 거예요?”
“저도 안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이사벨은 뭔가 말을 더 하려다 말고, 다시 숨을 골랐다.
“그럼 이제 어쩔 거예요? 계속할 거예요? 이 경합?”
“물론입니다.”
“기어이 되겠다고요? 마왕을?”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었습니까? 우리?”
“저들이 말하는 마왕이 뭔지 몰라요?”
안다.
방금 그녀 입으로도 잘 표현하지 않았는가.
투기를 담는 그릇.
자칫 이 마계를 폭주시킬 수 있는 투기를 제어하는 역할.
그게 바로 마왕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매우 잘 안다.
“잘 압니다.”
이사벨은 기어이 내 어깨를 붙들며 소리쳤다.
“안다는 남자가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 있어요! 이 마계를 지키려면 당신이 희생돼야 한다는 거잖아! 그걸! 그걸 알면서도! 어쩜 그렇게…….”
그녀가 이토록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소리친 적이 있던가?
아마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날 놀라게 한 건 그녀의 터진 목소리가 아니다.
지금 이사벨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애처로운 눈물들이,
그렁그렁 가득 맺혀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항상 도도하고 냉정했던,
이사벨 그녀가…….
“내가, 왜 당신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해요?”
그야 물론, 나를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수정된 계약서를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왔던 그날, 그녀는 분명히 말했었다.
나를 인정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마왕으로 만들 거라고.
그리고 그 옆엔,
“당신 옆에 있기 위해서였어요.”
이사벨 그녀가 있겠다고 했다.
“당신을 이 마계에서 제일가는 마족으로 만들고! 그 옆엔 내가 있으려고 했다고요! 왜? 내가 처음으로 인정했고 마음을 주기로 한 마족이 당신이었으니까!! 그런데….”
눈물과 비장함이 묻어났던 그녀의 눈빛은 점차 슬픔으로 변해갔다.
“벨져가 마왕이 되면, 내가 그 옆에 있지 못할 수도 있단 거잖아요……. 왜 벨져만 희생하려 해요? 왜 항상 벨져만 모든 걸 짊어지려 하냐고요! 대체 왜?”
그게 내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마족으로서 이 땅에 환생한 내가 새로 해야 할 역할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희생 같은 건, 이미 전생에서 몇 번이고 해왔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벨져가 마왕이 된다고 해도, 정작 내 옆에 없으면…….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정작 내 주변은 이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할 걸 수도 있는데,
나는 이걸 왜 간과하고 있던 걸까?
속에서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아냈다.
대신 아무런 말 없이 이끌리듯 이사벨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사벨은 저항 없이 내 품에 안긴 채 옅게 흐느꼈다.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도록 등을 부드러이 다독여주었다.
“희생이라고 생각 안 하시면 됩니다.”
“……그럼요?”
“그냥 이사벨 님을 비롯해 모두를 지키고자 하는 제 일? 정도로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다 정작 벨져를 못 지키게 되면요? 투기를 견디다 못해 전대 마왕처럼 인계를 침공하기라도 할 건가요?”
“못할 것도 없죠.”
내가 전생에 뭐였건, 산 곳이 어디였든 간에,
중요한 건 지금이다.
지금의 난 마족이고, 마계에 살며, 이곳에 지켜야 하는 이들이 있다.
“애초에 전,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이거다.
정작 난 죽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
투기고 뭐고, 전부 받아들여서 악착같이 버티고 이겨낼 것이다.
그다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모두를 맞이할 것이다.
“그 말. 증명할 수 있어요?”
“어떤 식으로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고개를 든 이사벨이 나를 올려다봤다.
눈가엔 아직 흐르다가 만 눈물들이 남아있었다.
“가까이 오세요.”
“예?”
“가까이 오라고요.”
이미 가까이 있는데 얼마나 더 가까이 오라는 거야?
귓속말이라도 하려나 싶어 일단 얼굴을 더 내밀어 봤다.
어?
……라?
“하아….”
10초 아니 그거보다 더 길지 모르겠다.
그 시간 동안 이빨이 보일락 말락 살짝 벌어져 있던 내 입술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다름 아닌 그녀의 입술로.
증명의 의식(?)을 마친 이사벨이 벙쪄 있는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역시 당신은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제일 귀여워요.”
너무 갑작스러웠던 나머지 감촉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니, 잠깐만.
이게 어딜 봐서 증명인데?
“명심해요 벨져. 당신과 난 지금 또 하나의 계약을 맺은 거예요.”
“무, 무슨 계약 말입니까?”
“모든 일이 끝나면 방금 나눈 입맞춤의 다음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계약 말이에요.”
내가 등신이 아니고서야 그녀가 말한 입맞춤의 다음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이후 내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간신히 더듬어보자면,
그냥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