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69
제169화. 남아있는 이유
벨져 일행을 두고, 길드 지부에 입성한 시연은 바로 담당 접수원을 찾았다.
접수원은 밝은 미소로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차시연 님!”
“네. 새로 들어온 1인 의뢰 있나요?”
시연은 늘 그래 왔듯 혼자 수행하는 1인 의뢰를 찾았다.
“어쩌죠? 오늘은 들어온 게 없는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1인 의뢰를 찾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어째서죠?”
“최근 부르크 왕국 동부 쪽에서 대규모 도적단이 출현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해요. 이상한 검술을 사용한다고 하던데요?”
검술이란 말에 시연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 들어온 것도 전부 4인 이상만 수행할 수 있는 도적단 토벌 의뢰들이에요. 이참에 시연 님도 동료를 구해보시는 게 어떠세요?”
접수원은 은근슬쩍 의뢰서를 시연에게 건넸다.
건네면서도 살짝 무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연을 모르는 이가 아니고서야, 이 길드에서 시연과 동료가 되려는 모험가들이 얼마나 있을까?
실의에 빠지진 않을까 우려한 것과 달리, 시연은 턱을 잡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네 명…….’
어제 아침에 이 소식을 들었다면 바로 실의에 빠졌을 것이다.
애초에 악마의 후손인 자신을 동료로 받아줄 곳은 없다는 걸, 이미 예전부터 깨우쳤으니.
하지만 오늘 달랐다.
그래도 제안을 시도해볼 만한 세 명이 근처에 있지 않은가?
바로 자신의 집에.
‘하지만 나하고 잘못 엮였다간 오히려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래도 선뜻 제안하긴 어려웠다.
벨져 그 남자라면 왠지 상관없다고 말할 것 같긴 해도, 자칫 자신을 주시하던 감시자들이 벨져 일행에게 옮겨질 수도 있으니.
‘잠깐만! 감시자!?’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시연이 고개를 휙휙 돌렸다.
없었다. 지부 어디에도.
마을 내로 들어오면 항상 자신을 주시하던 감시자들이!
시연은 5년 전,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을 감시하는 일련의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은 시연이 마을에 올 때마다 항상 나타났으며, 집이나 다른 외부에 있을 땐 느껴지지 않았다.
하물며 이 길드 지부에 있을 땐, 열이면 열. 없으면 섭섭하다 싶을 정도로 항상 느껴왔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감시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내면에서 일련의 불안감이 솟구친 시연은 길드 지부를 뛰쳐나가 집으로 달려갔다.
* * *
한편, 그 시각 시연의 집.
대답을 잘하지 않으면 살아서 이 마을 못 나간다는 말이 나온 후, 잠시 적막이 흘렀다.
적막이 흐르는 동안 벨져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레오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허허! 뭘 그리 정색하고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고자, 내 분위기 좀 잡아봤네! 잠시 실례 좀 하지!”
자연스레 집안에 입성한 레오는 수호와 메이가 앉은 식탁에 앉았다.
수호와 메이 역시 정색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오는 개의치 않는 듯 집을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성인도 안 된 어린 소녀가 이런 곳에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게, 지켜보는 입장에선 참으로 안타까워. 나 말고 몇몇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쉽사리 손을 내밀진 못했을 거야. 그녀가 가진 피와 이름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인간은 이 대륙에 없을 테니까…….”
위험하단다.
그냥 검 좀 다룰 줄 알고, 혼자 사느라 성격이 좀 드세다는 것 말곤.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시연이 위험하단다.
벨져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아이는 죄가 없네. 죄를 물려받았을 뿐이지. 한때는 대륙을 구했지만, 이후엔 대륙에 악을 양산한 용사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남들과 어울리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네. 남은 인생 이런 식으로 혼자 살다가, 혼자 가는 것이 차시연 그 아이의 운명일세.”
아득.
오두막 안의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운명?
감히 누구 맘대로 그 아이의 삶을 그따위로 정한단 말인가?
“말을 이렇게 하지만, 시연 양은 내 손녀 같아. 진심으로. 앞으로도 아무 문제 없이 이렇게나마 살길 바라네. 그렇기에 자네 같은 존재들은 우리로선 경계할 수밖에 없지. 그 아이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레오는 가지런히 모은 손 위로 턱을 얹었고, 다시 실눈 사이로 섬뜩한 눈빛을 밝혔다.
“자, 마지막으로 묻겠네. 내 말을 이해했다면 이번에야말로 대답해야 할 거야. 그대들이 시연 양에게 접근한 목적은 무엇인가?”
벨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레오는 생각할 시간마저 배려해주려는 듯 재촉하지 않고,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줬지만,
“허. 정말 고집이 센 친구로구먼.”
끝내 벨져의 답을 들을 순 없었다.
“이래서야, 나도 힘을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 레오의 등 뒤, 창문 너머로 금빛 십자가 새겨진 장옷을 걸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혹여 안에 있는 벨져 일행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오두막을 단단히 에워쌌다.
“세 번이나 기회를 줬음에도 뿌리친다면, 나도 더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네. 그러고 보니, 자네들은 어제부터 후드를 계속 뒤집어쓰고 있군. 답답하지도 않은가? 뭐 이젠 그러지도 못하겠지, 곧 홀딱 벗은 알몸으로 성스러운 교단 앞에서 죄를 고하게 될 테니까.”
“교단?”
벨져의 미간이 화악 좁혀졌다.
“너도 뭐 성교회의 심판관인지 뭔지 그런 거냐?”
“아 심판관이랑은 결이 좀 다르네. 심판관은 성교회로부터 임무를 받지만 나는 좀 다르거든. 나는 성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끄시는 분들에게 임무를 받는다네. 아이고, 이제 곧 회개할 친구에게 별 얘기를 다 하는군. 그럼 난 이만…….”
할 말을 마친 레오는 자리를 뜨고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음?”
어째서인지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은 괴력의 존재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양어깨를 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괴력의 기운은 다름 아닌,
레오의 바로 옆자리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감히, 벨져 님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꽈악 쥔 지팡이를 겨누며, 분노의 쌍심지를 치켜세우고 있는 메이.
그녀를 보고 당황한 레오의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쳤다.
마법을 쓴 것 같긴 한데, 뭔가 기운이 이상했다.
성력 외의 또 다른 힘이 지팡이에서 느껴졌다.
“메이, 그리고 수호.”
나직이 들린 벨져의 부름에 둘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가서 저 잔챙이들 치워버려. 흔적도 안 남게. 그리고 내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
“벨져 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동시에 기상한 메이와 수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메이가 나간 순간, 마법이 풀리면서 레오는 식탁 앞으로 엎어졌다.
“이, 이게 무슨…….”
경황이 없긴 했지만 계속 당황할 시간은 없었다.
황급히 일어선 레오는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벨져와 거리를 벌렸다.
“그래! 내가 자네들을 너무 얕본 모양이군. 하기야 어쭙잖은 재주를 가지고 악마의 후손에게 접근하진 않았겠지!”
아득!
오두막 내로 다시 한번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벨져는 자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니들은 니들 목숨만 중요하지?”
무겁게 읊조린 벨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다분했다.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별할 생각도 없이, 나만 살면 상관없다는 이기적이고 미개한 게 너희라는 거 알아. 이제 와서 크게 놀랄 것도 아니라고!”
슬며시 고개를 든 벨져와 눈을 마주한 레오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대륙의 악을 양산한 용사? 이미 선동당하다 못해 세뇌된 네놈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알 바 아니야. 그걸 풀어줄 생각도 없어! 니들은 그럴 자격도 없을 만큼 무지한 족속들이니까.”
마족이 되면서 잠시 누그러들었던 인간을 향한 분노와 중오.
그 외에 형용할 수 없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벨져의 몸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내가 정말로 이해가 안 가는 게 있거든? 뭔지 알아?”
레오는 대답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쟤는 뭐 하러 이 엿 같은 세상에 남아있냐는 거야!”
격분되는 감정에 아득바득 입술을 깨물던 벨져의 입에서 결국 피가 흘러내렸다.
“자기편이라곤 하나도 없고, 하나같이 바라는 것만 많은 저 이기적인 인간들 속에서 왜 아직 사람 노릇을 하고 있을까? 대체 뭘 위해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화산처럼 달아올랐던 벨져의 얼굴이 돌연 빠르게 가라앉았다.
소름 끼칠 만큼 빠른 온도변화에 레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직접 물어보면 알긴 하겠지만, 왠지 안 들어도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솔직히 생각할 필요도 없긴 해. 저 아이가 정말 용사의 후손이라면, 그 우매한 핏줄 어디 안 간다고, 자기 선조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거겠지.”
모든 것이 낯설었던 이세계에 처음 왔을 때도,
자신을 소환한 현자들이 이 세계에 진정한 악임을 알았을 때도,
하루아침에 다른 세계의 다른 종족으로 환생하여 그곳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뚱맞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벨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결정적인 요소는 단 하나였다.
‘내가 필요한 세상이라면 기꺼이 움직여준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벨져는 바깥이 보이는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언젠가는 자기가. 이 세상에 필요한 날이 올지 모른다고…….”
벨져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히죽 웃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 같은 무언가가 말해주고 있었다.
시연은 틀림없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필요? 허튼소리다!”
레오가 비웃으며 소리쳤다.
“마왕과 용사가 이 땅에서 사라진 그날부터! 우리 레지에타에는 진정한 평화가 도래했다! 더 이상은 용사도! 차시연도!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어! 그냥 이대로 사라져주는 게 레지에타를 위한 일이다!”
레오는 성력을 발현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신의 명을 수행하는 사제로서 네놈을 이 자리에서 즉결 심판하겠다! 너를 비롯한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이! 이 순간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야! 부디 저 세상에서 회개를…!”
주문과 기도를 동시에 읊던 레오의 입이 돌연 멈췄다.
성력이 응집되면서 발생한 기류의 파동이 오두막에 휘몰아쳤고, 그 파동은 단단히 묶여 있던 벨져의 후드를 벗겨 냈다.
그러면서 후드 속에 감춰져 있던 벨져의 신체 일부가 드러났다.
“뿌, 뿔?”
인간으로선 가져선 안 될 이종족의 신체 부위.
이를 본 레오는 잠시 벨져에게 품었던 의문과 불안감이 온통 증오로 뒤바뀌었다.
“감히! 과거의 악행을 잊고 이 신성한 땅에 다시 발을 들여? 내 오늘 육신이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을 심판해서 이 땅에 악을 정화했다는 걸 그분들에게 알릴 것이다!”
“그분들 누구? 현자들?”
레오의 입이 허공에서 멈췄다.
“자선, 인내, 절제, 그리고 순결이었던가? 이름이랑은 안 맞는 죄다 반대 성정을 지녔던 추악한 늙은이들. 걔들 아직 살아있나 보네?”
“네, 네놈! 그분들의 성직(聖職)을 어떻게?”
“알 수밖에 없지! 왜냐면 난 너희 같은 미개한 족속은 모르는 그놈들의 진면을 아는 유일한 존재니까!”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벨져는 레오의 목을 붙들었다.
“놈들은 오늘로써 알게 될 거야! 더 이상은 용사의 후손을 감시할 수 없다는걸! 그러면서 깨닫게 되겠지! 본인들의 그 얄팍한 수작이 통하지 않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존재가!”
마력이 번져 오른 벨져의 두 눈이 붉게 타올랐다.
“이 땅에 다시 나타났다는걸!”
-푹!
순식간에 빼들어진 아크베리아의 검 끝이 레오의 심장을 찌르고,
“마, 마족은 이 땅에 다시 설 수 없…!”
레오는 마지막 유언조차 다 읊지 못한 채, 검에서 번진 불꽃에 휘말리며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