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0
제170화. 고생했어
오두막 주위로 널브러진 인간의 시체들.
불에 타거나, 아님 거대한 이빨에 씹히거나, 혹은 영혼 자체가 소멸되거나,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죽었다.
“다 된 것 같죠?”
[네. 이제 처리만 하면 되겠네요.]시체 쪽으로 지팡이를 겨눈 메이가 주문을 읊으니, 시체들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수호가 감탄을 표했다.
[성력을 벌써 이만큼이나 다루시다니! 메이 님은 정말 응용력이 뛰어나시네요?]메이는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었다.
“사실 제가 봐도 신기할 정도예요. 뭐랄까? 원래부터 다뤘던 힘 같다고나 할까요? 다루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네요.”
대화를 나누던 사이, 시체들의 처리가 완료되었다.
벨져는 아직 굳게 닫혀있는 오두막 문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수호 님은 뭔가 아시는 게 있는 거죠?”
[무얼 말인가요?]“벨져 님과 시연 님의 관계에 대해서요. 시연 님이 용사의 후손이라는 것 외에 뭔가 다른 접점이 있는 거죠?”
뜨끔한 수호의 얼굴에 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그동안 벨져 님과 함께 지내다 보니, 벨져 님의 눈만 봐도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조금 보이게 됐어요. 시연 님을 보는 벨져 님의 마음엔 나쁜 감정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그럼 메이 님께선 어떤 감정을 보셨나요?]메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연민, 일까요?”
차시연이 용사의 후손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메이는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마족에게 있어 용사는 마계에 치욕의 역사를 가져다준 장본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메이는 겪어본 적도 없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에, 시연에게 다른 악감정을 가지진 않았다.
하지만 벨져는 어떨까?
“처음엔 벨져 님 성격상, 엄청 경계하고 주의 깊게 보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마음을 활짝 열고, 너무도 편하게 다가가셔서 무척 놀랐어요. 마치 시연 님의 모든 것을 알아가고 싶다는 듯이요.”
벨져는 자기 울타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무조건 지키려 하며, 반대로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은 자비 없이 대한다.
허나 시연을 대하는 벨져의 모습을 아무리 봐도,
자신들과 같은 울타리 안의 존재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알고 있어요. 벨져 님께선 아직 말씀하지 않으신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의 일부를 수호 님은 안다는 걸. 하지만 캐묻고 싶지 않아요. 벨져 님이 감추시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벨져 님을 믿으시는군요.]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벨져 님의 퍼밀리어니까요. 벨져 님이 뭘 원하시고, 무슨 생각을 하시든 전 무조건 따를 거예요! 그것이 저의 역할이니까요!”
궁금은 하지만, 묻진 않는다.
그것이 믿고 따르기를 약속한 하수인의 도리이니.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을 굳건한 마음에 수호가 안심한 것도 잠시,
익숙한 냄새를 맡은 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시, 시연 님?]길드 지부에 간다던 시연이 돌아왔다.
그녀는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건지, 바로 말도 못 할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어? 금방 오셨네요?”
“아,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현장은 이미 모든 흔적이 지워진 상황.
메이는 시치미를 떼며 담담하게 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당장 보이는 건 해맑게 웃는 메이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호뿐.
벨져는 보이지 않았다.
“벨져 씨는 어디 있습니까?”
“안에 있으시긴 한데, 왜요?”
시연은 대답할 새도 없이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시연의 앞을 메이가 막아 세웠다.
얼굴엔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 미소 속엔 좋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적어도 시연이 보기엔….
“뭐 하는 짓이죠?”
“벨져 님께서 자기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해서요.”
“여긴 제집입니다.”
“그건 아는데요. 벨져 님께서 지시하신 일이거든요. 협조 좀 해주시지 않겠어요 시연 님?”
시연은 문 쪽을 한 번 보다가 다시 물었다.
“안에 벨져 씨 말고, 또 누가 있는 겁니까?”
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계속 유지할 뿐.
들어가는 자와 막아서는 자.
둘은 살벌한 눈빛 교환과 함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무언의 대치를 유지했다.
누가 먼저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매서운 분위기가 오두막 주위를 휘감으려는 그때,
-끼익
오두막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벨져가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해 둘이?”
메이와 시연은 입을 살짝 벌린 ‘어…’ 하는 표정으로 벨져를 바라봤다.
“베, 벨져 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 시연 씨를 막고 있던 중이었… 아야!”
배시시는 웃는 메이의 머리에 벨져는 꽁하고 꿀밤을 때렸다.
“그럼 좋게 말하면 되지, 누가 이런 살벌한 분위기 형성하랬어? 집주인이 오해하잖아.”
“죄, 죄송해요!”
메이는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잠깐의 체벌(?)을 마친 벨져가 다시 시연을 보며 물었다.
“왜 벌써 왔어?”
“그, 그게…! 지금 제 집안에 또 누가 있는 겁니까?”
“아니? 없는데?”
벨져는 직접 확인해보라는 듯 아예 몸을 비켜 길을 터줬다.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간 시연은 빠르게 안을 살폈다.
집 안은 나갈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가족들 보곤, 왜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겁니까?”
“응? 아 맨몸 운동을 좀 하느라.”
“맨몸 운동이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들한테 맨몸까진 보여주긴 그렇잖아?”
세상 뻔뻔한 대답에 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
“근데 너 손에 그건 뭐야?”
벨져는 말함과 동시에 시연의 손에 있던 의뢰서를 가로챘다.
“도적 토벌의뢰, 4인 이상 수행 가능? 혼자서는 안 되나 보네? 설마 우리한테 이거 하자고 말하려고 온 거야?”
“아, 아니. 그, 그러니까! 그게!”
“얘들아 짐 챙겨라!”
벨져의 부름에 메이와 수호가 후다닥 들어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
시연이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자, 잠깐만요!”
“왜? 뭐 챙길 거 있어?”
“아니. 정말로 가시겠단 겁니까? 이 토벌의뢰를?”
“가는 게 아니고, 함께하는 거지. 너 우리 아니면 이거 같이 할 사람도 없지 않아?”
정곡을 찔린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원정 준비를 마친 메이와 수호가 둘 앞에 가지런히 섰다.
“출발은 언제 하나요 벨져 님?”
“여기 집주인님 준비가 끝나면.”
동행 제안을 하러 왔다가 졸지에 역으로 끼여버린 상황.
혼란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시연은 이내 깊은 한숨을 토했다.
“출발 전에 잠깐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갔다 와 그러면.”
“같이 가시죠. 당신들도 가야 하는 곳입니다.”
문 옆에 걸린 작은 가방과 검 하나만을 챙긴 시연은 바로 집을 나섰고, 그러곤 굉장히 익숙한 장소로 벨져 일행을 데려갔다.
* * *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부는 마크리아 평원.
그 아래 깎아져 내린 절벽 밑 그늘진 공간.
공교롭게도 이 장소는 벨져 일행이 시연을 만나기 전에 이미 와본 곳이었다.
“가야 한다는 곳이 여기였어?”
“당신들 눈엔 볼품없는 곳으로 보이겠지만, 제게는 매우 의미 있는 곳입니다.”
그럴 리가.
하물며 이곳은 벨져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장소였다.
지금 눈앞에 떡하니 있는 이 비석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으니.
“처음 보는 글씨죠? 저도 이 비석 말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돌아가신 아버지께 듣기론, 이렇게 부른다고 하더군요. 차시혁, 그리고 벨시페르…….”
나는 모른 척 대답했다.
“용사와 마왕의 이름이 적힌 기념물인가?”
“그런 셈이죠. 80년 전, 레지에타 있던 용사의 기념물이 전부 파괴되면서, 용사의 흔적은 오늘날 거의 지워졌지만,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유일한 기념물입니다. 그 누구도 이 비석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 가족을 빼고선….”
당연하게도 이 비석의 존재는 나와 가족들만 알고 있었다.
용사가 마왕을 기리는 기념물을 만들었다는 미친 사실이 외부에 퍼졌다간 난리가 나니까.
사실 이것도 내가 죽은 이후엔 자연스럽게 잊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와서 보니,
내 가족들이 왜 레지에타를 떠나지 않았는지, 그리고 시연 그녀도 왜 아직 이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네가 관리했던 거야? 이 비석을?”
“관리했다기보단, 그냥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매번 왔었습니다. 저에겐 의지할 존재가 없었으니까요.”
시연은 비석은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차시혁이 이름이 새겨진 글씨를 아련히 매만졌다.
“그나마 부모님이라도 계셨을 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5년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사람들에게 도움은 청했지만, 성과 없이 돌아오던 그 찰나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들어와 부모님의 시신마저 강탈해갔습니다. 그래서 무덤조차 만들어 드리지 못했죠.”
벨져는 그 시신을 강탈한 괴한들이 누구인진 대충 알 것 같았다.
“절망적이고 비참했던 그때만 해도. 그냥 나도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메웠습니다. 그러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비석 앞으로 오게 됐더군요. 비석에 새겨진 이 이름을 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
“나란 인간은 참으로 한심하고 나약하구나 하는 생각을요…….”
시연의 대답과 함께 둘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정적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벨져가 나직이 물었다.
“왜?”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세계에 소환되어 다짜고짜 세계를 구해달라는 요구에도 무리 없이 응해주시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셨던 그분에 비하면, 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겠죠…….”
손에서 떨림인 벨져는 그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비석을 보고 있던 시연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저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마계 최강의 존재를 상대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면서, 그분이 겪었던 고통과 외로움은 어느 정도였을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이뤄내셨습니다. 멸망할 위기에 빠진 이 레지에타를 마왕으로부터 지켜내셨죠.”
그럼 뭐하겠는가?
결국은 자기 불러낼 현자들에게 당해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고, 그 고통을 가족과 후손에게도 전가했는데.
“원망은….”
벨져는 치솟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원망은 하지 않는 거야? 널 이렇게 내버려 두게 한 그 선조를……?”
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대륙의 악을 양산한 범죄자라며 그분을 욕하고 있지만, 전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죽어서까지 대륙의 평화를 위해 살다 가신 분입니다. 비록 마지막 바람은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지만, 그분은 레지에타의 미래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날 저와 당신이 만나 이 비석을 보고 있는 것 역시, 그분이 아니었으면 이뤄지지 못했겠죠.”
비석과 교감을 마친 시연은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힘들고 외로운 건 사실입니다. 이 아픔을 언제까지 안고 살아야 할지, 알 수도 없죠. 하지만 그럼에도 전 살고자 합니다. 그분이 물려주신 검술과 의지를 가지고, 언젠가 이 세상에 도움 될 날을 위…!”
아련하게 말을 잇던 시연의 눈이 화악 뜨였다.
뒤에 있던 벨져가 갑자기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것이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시연은 뿌리치려 했지만, 벨져는 놔주지 않았다.
“고생했어….”
등에 얼굴을 파묻은 입에서 흘러나온 속삭임이 시연의 감정을 자극했다.
“고생했어. 정말로….”
무얼 고생했는지, 그 외 다른 고충은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더 열심히 살면 된다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가 겪은 고난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듯 어루만져준 그 한마디에,
-주르륵
시연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