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1
제171화. 토벌의뢰
부르크 왕국의 수도 에헤른 왕성 지하.
어둠은커녕 그늘조차 드리워지지 않은 빛의 광장의 중심부.
그곳엔 네 명의 노인들이 앉아있다.
각각 자선, 인내, 절제, 순결을 상징하는 소위 현자라고 불리는 존재들.
그들은 용사 차시혁이 죽고 80년이 지난 지금도, 각국의 머리 위에 군림하며 레지에타의 질서를 관장하고 있었다.
자선의 현자 ‘카리타스’가 대화의 시작을 열었다.
“다들 오랜만이지? 한자리에 모인 건 80년 전 이후 처음인가? 다들 정정해 보여서 다행이야.”
“자네 덕분에 주름 하나가 방금 늘었네.”
절제의 현자 ‘모데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카리타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오기 전에 알렸다시피, 용사의 후손 차시연을 주시하던 감시자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네. 생명의 기운이 꺼진 걸 보니, 죽은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야. 보고를 담당하던 사제의 흔적도 당최 찾을 수가 없어.”
“그 후손이란 년이 눈치를 챈 건가?”
“눈치는 이미 예전에 챘지. 그래도 지 주제를 알고, 여태 가만히 있었다곤 하던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보고 중에 희한하게 하나 있더군.”
“희한한 거라니?”
“그게 말이지…….”
“거 말 끌지 말고 빨리 말하게!”
인내의 현자 ‘파티엔’이 버럭 하며 재촉했다.
카리타스는 알았다며 손을 저었다.
“차시연의 친척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더군.”
무표정에 가까운 채로 있던 현자들의 표정이 제각기 변했다.
“친척은 무슨 얼어 죽을 친척? 그년 고아 아니었나?”
“딱 봐도 허언쟁이 같은데, 누군진 몰라도 간땡이가 제대로 부었군.”
카리타스는 바로 그거라며 손가락을 휘적거렸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 레지에타에 남은 용사의 흔적은 차시연이 거의 유일하다네. 친척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문제는 그 터무니없다 못해 무모하다고 느껴질 거짓말을 대놓고 한 장본인이야. 난 그들이 감시자들을 죽인 주범이라고 생각하네.”
“그들? 한 명이 아니란 건가?”
대화 내내 말이 없던 순결의 현자 ‘산테’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바로 그쪽으로 몰렸다.
“보고에 의하면 차시연에게 접근한 인간은 세 명이라더군. 셋 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던데, 한 명이 좀 독보적이라더군. 머리 색이 차시연과 같은 검은색이라던데?”
“검은색?”
산테는 턱을 쓰다듬으며 흥미롭단 반응을 보였다.
모데스가 이어서 물었다.
“그래서. 차시연과 그 검은 머리 일당은 지금 어쩌고 있지?”
“최근 부르크 왕국 남부에 나타난 도적단 토벌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다더군. 모험가 길드에서 의뢰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네.”
“딱 좋구먼. 이참에 그냥 차시연까지 포함해서 싹 다 제거해버리지? 그 쓰다 버린 인형의 핏줄을 언제까지 놔둘 건가?”
홧김에 말한 것처럼 보여도 절제의 현자 모데스는 진심이었다.
그는 이 대륙에 아직 차시혁의 핏줄이 살고 있다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카리타스와 파티엔도 얼추 고개를 끄덕였다.
둘 역시 모데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 현자의 시선은 아직 의견을 내비치지 않은 산테에게 향했다.
산테는 짧은 침묵 끝에 무심하게 답했다.
“용사의 핏줄은 보험이네.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어.”
넷 중 유일한 반대 의견이었지만, 세 현자는 따로 반박하지 않았다.
“뭐,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오히려 그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듯 동조하기까지 했다.
분위기를 휘어잡은 산테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검은 머리의 인간은 잡을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동감하네. 지금 나타났다는 그 도적들도 그렇고, 최근에 모기들이 다시 알을 까고 나오려는 것 같은데, 벌레 청소를 한 번 할 필요가 있겠어.”
산테의 의견을 이어받은 카리타스가 광장 다른 쪽을 돌아봤다.
“자,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이야기 다 들었죠?”
머리에 왕관을 쓴 젊은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현자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용병이나 모험가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이번엔 왕국 쪽에서도 근위대를 파견해 도적단 토벌에 제대로 일조하세요. 물론 토벌이 주목적이 아니란 건 아시죠?”
남자는 고개를 들어 카리타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 검은 머리의 남자를 사로잡아오면 되겠습니까?”
“목숨만 붙여서 데려오세요.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고하신 자선의 현자 카리타스 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남자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 다시 고개를 숙였고, 그 길로 광장을 벗어나 지상 밖으로 올라왔다.
밖에는 십수 명의 무장한 기사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남자는 그들을 둘러보며 바로 지시했다.
“부르크 왕국 근위 기사단에게 왕명을 내립니다. 현 시간부로 기사단 전원, 도적단 토벌을 위한 원정 준비에 나서세요.”
* * *
부르크 왕국 남부 도시. 사할리스 인근.
이곳은 예로부터 수도와 멀고, 상업지구 같은 사람들이 왕래할 장소도 없던 탓에 새로운 사람 보기가 매우 힘든 지역이었다.
그래서 주민들 대부분인 농사에 전념했지만, 이마저도 마수의 출현이 굉장히 잦은 탓에 매년 큰 수확량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주민들은 마수 토벌을 위한 토벌대를 여러 번 요청했으나, 열 번 요청하면 한 번 와주는 선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하급 마수만 몇 마리 잡고 떠나기 일쑤였다.
결국, 포기한 일부 주민들은 이사를 결심하는 등, 점점 도시를 벗어나는 인구가 많아지던 차, 나타난 구원대가 있었으니,
바로 도적단이었다.
이들은 어른 팔만 한 길이의 검을 가지고 인근의 마수들을 모조리 토벌해 처음은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엔 사할리스와 그 주변 관할의 귀족 혹은 부호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 전형적인 도적 활동을 이어갔다.
이에 피해를 입은 귀족들과 상인들이 모여 왕국에 있는 각 길드 지부에 도적단 토벌을 의뢰했다.
그 결과 모인 사람들이 약 200여 명.
대부분이 포상금을 노린 용병과 모험가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다른 목적을 가진 모험가들도 있었다.
벨져 일행은 앞서가는 선발 무리에서 약 30m 정도 거리를 벌린 채 사할리스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 많은 사람이 도적단 토벌을 위해서 가는 건가요?”
메이는 그들이 무장한 검과 창, 방패 등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했다.
“상급 마수 토벌에는 이거보다 더 많은 인력이 동원될 때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죠.”
시연의 설명에 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옆에 있던 벨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벨져 님. 인간은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왜?”
“저희 한 명이면 가볍게 처리할 일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우르르 몰려가잖아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비효율적인 종족이네요!”
벨져는 뭐라 답해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 올 일이 있을진 모르지만, 메이를 인계에 두 번 데려오진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메이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겨우 몇십 명 남짓한 도적들을 잡겠다시고, 2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는 건 벨져가 보기에도 필요 이상이었다.
벨져는 바로 시연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잡으러 가는 도적들은 정확히 어떤 놈들이지?”
“빨리도 물어보시는군요.”
시연은 길드 지부에서 받은 도적단의 정보문서 벨져에게 건넸다.
문서를 읽던 벨져는 고개를 갸웃했다.
“길드에서 토벌의 증거품으로 요구한 게, 검 자루야?”
“네. 자세한 건 붙어봐야 알겠지만, 사할리스에 나타난 도적단 전원이 특이한 검술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검술?”
인계의 인간들이 검술을 다루는 거야, 문제는 아니다.
다만 도적단이라고 하면 보통은 색색의 두건을 두르거나, 본인들의 조직을 상징하는 인장 같은 걸 몸에 달고 다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걸 토벌의 증거품으로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다름 아닌 검 자루를 가져오라니.
이건 벨져로서도 굉장히 낯선 상황이었다.
“검술이 트레이드 마크라는 건가?”
인간과 마족이기 전에 한 명의 검사로서,
시연과 벨져는 도적단 토벌은 둘째치고, 그들이 다루는 특이한 검술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다.
“그래서 넌 돈이 목적인 거야? 아님, 실력 확인이 목적인 거야?”
“경험 축적이 목적이라고 해야겠군요. 이번 토벌 진행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의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벨져는 의외라는 듯 입술을 모았다.
“그럼 사람 죽이는 것도 처음이겠네?”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냥. 혹시나 망설일까 봐,”
시연은 턱도 없는 소리라며 인상을 구겼다.
“사람을 해하고자 검술을 익혀온 건 아니지만, 생명의 위협과 직결되는 순간이 온다면, 전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를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 할지라도…….”
군더더기 없는 검사로서 훌륭한 정신.
벨져가 만족의 미소를 짓자,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낀 시연이 몸을 움츠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죠?”
“그냥 뭐, 기특해서 그런달까?”
“은근슬쩍 자꾸 절 아랫사람 대하시듯 하는데, 저 아직 벨져 씨 나이도 못 들었습니다.”
“응. 서른 마흔 다섯 살이야.”
시연은 제자리에서 당황하다 못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사할리스의 정문이 보였다.
도시 내로 입성한 벨져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시연에게 물었다.
“이대로 계속 갈 거야?”
“뭐 다른 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이대로 저 무리랑 도적 토벌을 함께할 건지를 물은 거야.”
함께 온 용병, 모험가 무리는 전부 사할리스 길드 지부로 향하고 있었다.
벨져의 말뜻을 이해한 시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무리에 있으면 수적 우위에 따른 안전이 보장될 순 있겠지만….”
“그만큼 도적단을 마주칠 확률은 줄어들겠지.”
도적들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건실한 용병과 모험가가 득실거리는 무리에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터.
그들과 빨리 조우하고 싶다면, 무리에서 떨어져 소수의 인원을 노출시키는 게 가장 좋았다.
잠시 고민하던 시연은 역으로 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벨져 씨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우리끼리 나가야지. 도시 밖으로.”
“해가 지는데요?”
“불 피우고 야영하면 그만이야.”
남들이 들으면 위험하다고 말리겠지만, 벨져 일행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시연도 혼자 다닐 때와는 다르게, 이들과 있으면 왠지 괜찮을 거란 안심이 들었다.
벨져 일행은 그렇게 사할리스에 입성하자마자, 바로 민가가 없는 외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광경을 몇몇 모험가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뭐야 저기는?”
“해가 지는 마당에 지금 밖으로 나가겠다는 거야?”
“도적들을 잡긴커녕 역으로 잡힐 생각인가?”
대부분 좋지 못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와중,
-툭
“악! 뭐야?”
누군가가 길드 지부 정문에 서 있던 모험가 한 명을 치고 지나갔다.
머리를 풀어 헤친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 남성이었다.
행색은 딱 봐도 거지였다.
“죄, 죄송합니다….”
“이 거지가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그만해, 그만해. 거기 됐으니까, 빨리 갈 길이나 가슈.”
남성은 뒷걸음치며 거듭 허리를 숙이며 사죄하였고, 빠르게 골목 뒤편으로 사라졌다.
“젠장! 시작부터 재수가 없으려니.”
“근데 저 노인네는 어디서 온 거지? 기척을 전혀 못 느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부터 어떻게 작전을 짜야 할지 정해야 한다고.”
신경 쓰는 것도 잠시일 뿐. 모험가들은 화제를 돌리며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모퉁이 너머로 유심히 보고 있던 남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계는커녕, 진심을 보일 일도 없겠군.”
남자는 그 길로 유유히 골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