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2
제172화. 죄책감
어둑한 초승달이 뜬 밤. 사할리스 인근 어딘가.
벨져 일행은 맑은 개울이 흐르는 들 한복판에 야영지를 차렸다.
벨져와 수호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으며, 홧홧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메이와 시연이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둘은 누가 먼저 말을 붙이지 못해, 있는 내내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이전에 시연의 집 앞에서 벌어진 대치 상황의 여파였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20분째 같은 페이지만 보는 메이와 쓸데없이 모닥불만 휘적거리는 시연의 모습을 누가 봐도 매우 불편해 보였다.
어색함을 참다못한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책은, 마도서입니까?”
놀란 나머지 어깨를 들썩인 메이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네 뭐, 맞아요….”
“대단하시군요. 나이도 어려 보이시는데, 성인도 어려워한다는 마법학을 공부하시다니…….”
“대단한진 모르겠네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
다시 또 흐르는 어색한 침묵.
이번엔 메이가 먼저 물었다.
“시, 시연 님이야말로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봐주는 사람도 없이 몇 년 동안이나 검술을 혼자 익혀오시다니…. 벨져 님이랑 비슷한 길을 걸어오신 분이 또 있을 줄은 몰랐어요.”
잠자코 듣던 시연의 눈이 화악 뜨였다.
“비슷한 길이요? 그럼 벨져 씨도 그동안 혼자 검술을 익혀오셨단 말입니까?”
“적어도 제가 처음 뵀을 땐 그러…….”
메이는 뒤늦게 쓸데없는 사실까지 말했음을 깨닫고선 급히 입을 막았다.
그러곤 아무 일 없다는 다시 능청스럽게 책을 들긴 했으나, 시연의 의심은 이미 피어오른 뒤였다.
‘혼자 익힌 거라면, 도검술을 누군가에게 정통으로 배운 것도 아니란 건가?’
그러기엔 대련 때 접한 벨져의 검술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시 둘의 실력은 엇비슷해 보였을지 모른다.
허나 돌이켜보면 그때 벨져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검을 단련해온 거지?’
새싹처럼 피어오른 의심이 점차 나무처럼 자라나는가 싶던 찰나,
-스슥!
개울 뒤 숲 쪽에서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꼈다.
시연은 바로 검을 잡고 해당 방향을 주시했다.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반면 메이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책만 읽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반문하려는 순간,
-샤샤삭
어느덧 풀숲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낯선 무리가 순식간에 모닥불 주변을 둘러쌌다.
하나같이 무늬가 없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시연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발검 자세를 유지했다.
곧 무리 속에서 여인으로 보이는 자가 대표로 나와 메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교회의 심판관이자, 흑마교회의 수장 아이리네였다.
메이는 자연스레 책을 덮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죠?”
“급히 전할 사실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단 본론만 간단하게 일축해서 말씀하시고, 자세한 건 벨져 님이 오시면 해주세요.”
아이리네는 무릎을 꿇고 일어나 다급히 외쳤다.
“벨져 님을 잡고자, 부르크 왕국의 근위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 *
같은 시간, 땔감을 구하러 간 벨져와 수호.
수호가 가진 드래곤의 힘을 이용하면, 브레스를 이용해 24시간 땔감 없이도 타는 불씨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보는 눈이 있는지라 조금 불편하긴 해도 원시적인 방법을 택했다.
사실 벨져로선 이쪽이 더 편했다.
[몸은 어떠십니까 벨져 님?]“아주 좋아. 근데 너 요즘 주기적으로 내 몸 상태 묻는 것 같다?”
[저라도 확인을 자주 해야죠. 많은 분들이 무사를 기원하는 벨져 님의 몸이니까요.]많은 분이라는 말에 벨져는 피식 실소했다.
그렇게 둘은 다시 땔감 줍기에 열중하게 되고,
적막이 감돌 때쯤 수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벨져 님.]“왜?”
[벨져 님은 지금 마족이십니다.]갑작스레 분위기를 잡는 목소리에 벨져는 살짝 당황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그거야 나도 알지.”
[아시는 걸 떠나 앞으로도 잊지를 마셔야 합니다. 지금의 벨져 님은 누구이고, 지금의 벨져 님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요.]나뭇가지를 줍던 벨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수호의 말대로 잊어선 안 되며, 사실 잊을 리도 없다.
현재 자신은 인간 차시혁이 아닌, 마족 벨져라는 걸.
지금 이 순간에도 마계 대륙에서 자신이 무사 복귀하기를 기다릴 수많은 마족들이 있음을 벨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벨져 님은 인계에 오신 이유는 어디까지나 투기를 억제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이 역시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억제할 방법의 핵심 열쇠를 지지고 있다는 것도.
[시연 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수호는 돌고 돌아 묻고 싶었던 그 말을 꺼냈다.
벨져는 덤덤히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시연 님은 지금의 벨져 님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걸 떠나, 종족 자체가 다른 완전한 남입니다. 혹여 벨져 님의 정체가 드러나기라도 한다면…….]“지금처럼 가까이 지내실 순 없겠지.”
수호의 말에 수긍한 벨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슬그머니 올라간 목은 하늘의 달 쪽으로 향했다.
“수호야. 난 말이지. 인간으로서 삶을 마감한 그 직전에 맹세해서, 아직까지도 거두지 않은 다짐이 하나 있어.”
만수무강(萬壽無疆).
자신을 기만한 현자들에게 오래오래 살라는 유언을 남기며 숨을 거둔 그 순간,
벨져는 속으로 깊이 다짐했었다.
언젠가 될진 모르지만,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현자라는 이름의 늙은이들을 다시 마주해, 그들의 사지를 비틀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라고.
비록 지금은 인간에서 마족으로,
용사에서 마왕을 꿈꿔야 한다는 삶의 목표가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현자들이 살아 있다는 걸 안 이상, 그 다짐을 거둘 이유는 더더욱 없어졌다.
“그건 차시혁으로서도, 벨져로서도 아닌, 그냥 나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야. 물론 그 와중에서 1순위는 너희와 마계에서 날 기다리는 그들이지. 하지만…….”
차라리 없기를 바랐다.
자신이 구했지만, 자신을 버린 이 거지 같은 세계에 미련을 품을 여지가 없는 게 나았다.
“내 잘못된 선택 때문에 아픔을 겪은 저 아이를…. 난 무시할 수 없어.”
허나 절대로 무시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또 다른 존재가 이제는 인계에도 생기고 말았다.
“인간으로서 곁에 있어 줄 수 없다면, 적어도 혼자 살 여건을 만들어줘야 해. 모두에게 외면받으면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건. 나 혼자로 족해…….”
레지에타에 오래 있을 생각도 없다.
하물며 자신의 정체를 시연에게 밝힐 생각도 없다.
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 아니 나은 걸 넘어 완전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줄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선 지금도 마음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 죄책감이란 통증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으니.
벨져는 거기서 말을 멈췄고, 수호도 더 묻지 않았다.
다시 땔감 줍기를 이어가던 그때,
-파삭!
좌측에서 수풀 밟는 소리가 울렸다.
기척을 느낀 벨져와 수호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음?”
난데없이 나타난 다섯 명의 낯선 무리.
벨져와 수호를 본 그들의 표정도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눈을 그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는 그들과 다르게, 벨져와 수호는 그들의 행색을 빠르게 훑었다.
가죽 갑옷 위주의 가벼운 무장과 허리춤에 찬 어른 팔만 한 길이의 검.
대충 봐도 어떤 무리인지 바로 감이 왔다.
애초 의도한 대로 토벌대에서 분리된 자신들을 습격한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얼빠진 얼굴들을 보니 또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즉 순전하게 우연히 마주쳤단 얘기였다.
서로 간의 어색한 눈치싸움이 이어지길 약 30초.
선두에 있던 장발의 남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 야영지가 있는 겁니까?”
둘의 양손에 쥔 땔감들을 보고 한 말이었다.
벨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피차 신경 쓰지 말고 지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같은 목적으로 돌아다니고 있던 차니…….”
남자의 말마따나 무리 중 일부는 양손에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를 한 아름 들고 있었다.
벨져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는 먼저 발을 떼서, 벨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으며, 그 뒤를 나머지 무리가 따랐다.
시선을 거둔 벨져는 다시 땔감 줍기를 재개했다.
그렇게 잘 지나가는가 싶던 차,
“도적단을 토벌하러 오셨습니까?”
간담을 서늘케 하는 낯선 한기가 벨져의 뺨을 자극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벨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뒷목엔 검이 겨눠져 있다는 것을.
“고개 돌리지 말고 대답만 하시오. 그대들도 도적단을 토벌하러 온 무리의 일부입니까?”
검의 주인인 남자는 대답을 재촉했다.
벨져는 고개를 돌리진 않은 채, 몸만 일으키며 답했다.
“그렇다고 하면?”
“그럼 그 뜻을 포기하고, 이대로 조용히 돌아가시죠. 행색을 보아하니, 검사 같은데, 젊은 목숨 이런 곳에 버리지 말고, 의미 있는 곳에 쓰길 바랍니다.”
벨져는 문득 생각했다.
땔감을 구하러 온 보조로 메이가 아닌 수호를 데려와서 다행이라고.
수호는 아예 나서지 않겠다는 듯 양팔을 등에 댄 채 상황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래도 뭐, 멋 부리겠다고 검을 들고 다니진 않는 모양이네.”
벨져는 등을 돌린 채로 검을 뽑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뽑은 터라, 말릴 새도 없었다.
당황한 남자가 물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왜? 고개 돌리지 말라고 했지. 검 뽑지 말라곤 안 했잖아?”
아예 팔까지 훙훙 돌리며 준비운동을 하자, 수호를 제외한 모두의 눈에 황당함이 서렸다.
“젊음의 객기는 그 정도면 족합니다. 얼른 검을 집어넣고, 우리 앞에서 사라지시죠.”
“객기? 내가 지금 객기 부리는 것 같니?”
벨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족으로 환생한 직후만 해도, 벨져는 애먼 싸움은 피하려고 하는 극도의 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 한 방울, 두 방울 검에 피가 묻고, 투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벨져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오는 싸움은 거부하지 않는다.
거부하지 않는 걸 넘어,
즐긴다.
“그 검. 내 목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면, 시작 신호로 받아들인다.”
그대로 더 내지르거나, 혹은 거두거나.
주도권을 가졌다고 생각한 남자는 순식간에 선택을 해야 하는 처지로 뒤바뀌었다.
이 남자는 뭘까?
끽해야 갓 성인이 된 듯한 이 어린 인간이 이 정도의 패기와 살기를 보여주는 게 가능한가?
남자의 내면에선 당황함에서 비롯된 긴장감과 더불어,
이 검사와 검을 붙으면 어떻게 될까 싶은 호기심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벨져 님!!”
그때 반대 방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벨져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은 내팽개치고, 맨몸으로 다급히 달려오는 메이와 시연이 보였다.
둘은 현장을 보자마자 바로 눈빛이 변했다.
“저, 저들은?”
“감히 벨져 님께…!”
검은 뽑았지만 일단 상황을 보고자 하는 시연과 다르게, 메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마도서부터 펼쳤다.
성력 발현에 이어 주문까지 읊으려는 걸, 수호가 후다닥 달려가서 막았다.
벨져도 다급히 소리치며 물었다.
“야! 불은 어쩌고 너희끼리 와?”
이 상황에 불이 더 중요한 벨져였다.
시연 또한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라며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다.
“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사할리스에 습격을 당했…!”
시연이 급보를 전하려는 그때,
-쐐액!
시연의 앞으로 도합 네 개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