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4
제174화. 때로는 모르는 게
적이 나를 찾는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도는 무엇일까?
간단명료하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싸운다.
2. 도망간다.
여기가 마계였다면 1번을 택했을 것이다.
뒤탈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인계. 내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세상으로 자칫 힘을 잘못 썼다간, 어떤 여파를 불러올지 모른다.
즉 부르크 왕국의 근위 기사단이 날 잡으러 왔다고 하는 이 상황에서, 2번 도망간다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흑마교회도 그렇게 말했고,
시연도 그렇게 말했다.
메이랑 수호야 원래부터 나만 따라온 애들이니, 애초에 의견을 내지도 않았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봐도, 2번을 선택하는 것이 맞긴 하다만…….
내 몸은 결국 사할리스에 들어와 있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와야 할 것 같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나 할까?
느낌은 적중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흥미로운 광경을 봐라.
서로 다른 검, 서로 다른 자세, 서로 다른 움직임.
공통점이라곤 어쨌든 손에 검을 붙잡고 있다는 것 외엔 모든 것이 다른 두 검사가 영혼의 혈전을 벌이기 직전의 순간이다.
금발에 백금빛 갑주로 무장한 젊은 남자는 묵직하지만 들어보면 생각보다 가벼운 롱소드를 들고 있고,
가죽 갑옷을 입은 노인은 날붙이가 얇은 도검을 들고 있다.
아직 둘 싸움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각각 어떤 움직임과 검술을 보여줄지 바로 예상이 갔다.
롱소드 검술과 도검술.
내게는 익숙하다 못해, 거의 한 몸이 됐다 싶은 두 검술을 한자리에서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다.
그래도 나름 조심은 하겠답시고, 최대한 기척을 줄여서 가까이 온 거였는데……,
흠.
저 둘은 지금 왜 나를 보고 있는 거지?
등 뒤에선 얼른 물러서라며 닦달하는 시연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 * *
실제로 벨져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안 들릴 만큼 기척과 소리를 줄인 채 접근했다.
하지만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단순히 옆에만 있어도 몸을 움츠리게 하는 독보적인 기백을 그동안 상시로 풍겨 왔단 사실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년간 몸과 정신을 단련한 기사 및 무인(武人)들로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기백이었다.
고로 부르크 왕국의 1왕자 레이든과, 도적단의 수장 루백은 벨져의 기척을 바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미 눈앞의 상대는 잊은 지 오래.
벨져를 보고 있는 둘의 머릿속은 하나의 생각만 자리 잡았다.
‘누구지?’
귀족가의 자식처럼 곱상한 얼굴은 아니었으나,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특히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했던 점은,
‘검은 머리?’
후드 속에 감춰진 검은 색의 머리카락이었다.
먼저 반응한 건 레이든이었다.
“당장 저 남자를 사로잡아라!”
도적단과 대치하던 근위 기사단은 일제히 벨져를 향해 달려들었다.
뭔가 잘못된 상황에 빠졌음을 인지한 벨져는 속으로 생각했다.
‘꼬였네.’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졸지에 상황이 꼬이고 말았다.
어느새 등 뒤로 달려온 시연이 벨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러려고 오자 하신 겁니까?”
그건 아니었다.
“지금 아니면 답이 없습니다. 얼른 도망가시죠!”
“어디로?”
“어디긴요? 당연히 저들이 없는 곳이죠!”
시연은 뒤늦게나마 벨져를 데리고 사힐리스를 벗어나려 했다.
-후우웅!
그러자, 둘의 발밑으로 금빛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당황한 시연과 다르게 벨져는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마법진이 생성한 빛에 몸이 휩싸인 둘은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졸지에 표적을 잃은 레이든과 기사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둘이 사라진 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이든은 머지않아 상황을 인지했다.
“공간 마법진?”
웬만한 상급 마법사들도 다루기 힘들다는 공간 마법을 이용해 둘을 빼낸 것이다.
아직도 어리둥절한 기사들을 보며 레이든은 다시 소리쳤다.
“사할리스를 샅샅이 뒤져라!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것이다!”
그렇게 레이든과 근위 기사단은 사라진 벨져와 시연을 찾고자 현장을 떠났다.
졸지에 남겨진 도적단은 그들이 떠난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 멍하니 있지 말고. 우리도 이 틈에 물러나세.”
루백은 그런 도적들을 수습하며,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때 한 단원이 물었다.
“루백 님 이대로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저 남자의 정체는 뭐길래 근위 기사단이 쫓는 걸까요?”
“난들 알겠는가? 그냥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 외엔 알 길이 없지. 그쪽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나 챙기세.”
루백은 그렇게 단원들을 수습하며 사할리스에 빠르게 물러났다.
떠나기 전, 벨져와 시연이 도망친 방향을 루백은 다시 돌아봤다.
왕자와 근위 기사단이 추격할 정도면, 그 남자로선 분명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왠지 잡힐 것 같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 * *
공간 마법진에 휘말린 벨져와 시연이 도착한 곳은 사할리스 내의 어느 민가.
평범한 집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사할리스에 위치한 흑마교회의 비밀 지부였다.
지부 내에서 퍼밀리어의 감흥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메이가 공간 이동 마법을 발동시켜 둘을 데려온 것이었다.
어찌저찌 추격은 따돌렸다고 하나, 지부 밖으로 벨져를 찾고자 하는 기사들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꼼짝없이 포위된 상황.
숨을 고르며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킨 시연은 바로 벨져에게 따졌다.
“제가 위험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벨져는 반박하지 못해 천장만 쳐다보았다.
자신도 기척을 숨긴다고 숨긴 건데, 그렇게 빨리 발각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도적단을 토벌하러 온 거지, 기사단과 맞서려고 온 게 아닙니다! 이렇게 개인행동을 하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 말 맞아?”
“뭘 말입니까?”
“도적단 토벌하러 왔다는 말. 그거 맞냐고.”
시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전 1왕자라는 놈이랑 대치하던 그 노인하고, 검사들……. 너 정체 알고 있지?”
땔감을 줍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검사들은 시연을 보며 말했었다.
자신들은 잃어버린 용사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온 자들이며, 머지않아 시연을 모시러 오겠다고 말이다.
벨져는 그때 시연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었다.
자길 언제 봤다고 처음부터 친한 척 요상한 말을 해내는 그들을 보며 황당해할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너 그때 눈치 보고 있었잖아.”
저들을 따라가고는 싶지만, 옆에 벨져가 있어서 가지 못했던, 마치 벨져가 알면 안 된다는 듯한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벨져는 이를 정확히 캐치했었다.
시연은 시선을 회피하며 이를 아득 갈았다.
허나 머뭇거리긴커녕 오히려 눈빛을 독하게 세우며 다시 벨져를 마주했다.
“그럼, 당신은요?”
“내가 뭘?”
“당신이야말로 대체 정체가 뭡니까?”
벨져 역시 바로 답하지 못했다.
“벨져 씨와 저의 만남이 그리 길다고 하진 못하겠지만, 그 짧은 순간에 전 당신에게 제 모든 걸 보였습니다. 하지만 벨져 씨는 제게 아무것도 밝혀주지 않으셨죠. 보여주신 거라곤, 오직 검술뿐이었습니다!”
벨져에게 소리치는 모습에 메이가 발끈하고 나섰지만, 이를 수호가 제지했다.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그녀가 나설 때가 아니었다.
“이 레지에타 대륙에서 도검술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얼마 없습니다! 용사 차시혁의 후손인 저와, 과거 무인들의 땅에서 용사와 대련을 하면서 도검술을 함께 완성시킨 무인(武人)들뿐입니다! 전 처음에 벨져 씨가 그들의 후손인 줄 알았습니다!”
벨져는 그렇다고 답하기까지 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저 도적단의 정체가 뭐냐고 물으셨나요? 답해드리죠! 그들은 저와 함께 도검술을 계승 받은 무인들의 후손일 겁니다! 저를 제외하고, 용사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유일한 이들이죠! 이상한 검술을 다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시연은 그러면서도 또 생각했다.
혹 벨져는, 그 무인들을 대표해서 자신을 먼저 찾아와준 이가 아닐까 하고.
그래서 경계하지 않은 것이었다.
허튼짓을 하지 않을 자라는 건 검술 대련을 통해 느꼈고.
용사와 마왕의 기념비 앞에서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처음으로 말해준,
시연의 마음을 공감해 준 첫 인간이었기에, 시연은 벨져에게 마음을 점차 열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이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는 정체 모를 집단은 무엇이며! 벨져 씨의 가족이라고 하는 저 둘까지! 전 뭐 하나 아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벨져는 그 무인들과 관련이 없어 보였다.
용사와 관련이 없고, 하다못해 무인들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용사의 검술을 익혔단 말인가?
시연은 한 발짝 벨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가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두 남녀의 기세는,
그 누구도 접근할 생각조차 못 할 만큼 살벌했다.
“이젠 말씀해주세요. 벨져 씨는 누구인지. 그리고 제게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시연은 설사 자신들이 여기서 근위 기사단에게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큼은 꼭 듣고자 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벨져는 입을 열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때가 있어.”
그건 시연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그냥 알려고 하지 말고 계속 모른 척, 이 주어진 평화를 만끽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사실 대다수 인간들이 그렇게 산다고 봐야지. 괜히 어쭙잖게 명분 따위를 지키겠다고 나댔다간,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어.”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지금?”
“그날의 용사처럼…….”
의아함이 담겨있던 시연의 눈에 순간 분노가 차올랐다.
그 분노에 잠식된 시연은 바로 시혁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실현시키겠다고, 모든 걸 걸고 나섰다가 처참하게 무너졌지. 남은 가족들이 어떤 고통을 경험할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냥 자기는 완벽하다고 자만하다가 전부를 잃은 거야.”
“당신이 뭘 안다고!!”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걸 경험하는 이가 바로 벨져 본인이었으니까.
벨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찾아온 목적? 처음엔 날 위해서였어. 하지만 찾아온 걸 넘어서, 지금 네 곁에 있는 이유는 날 위해서가 아니야.”
“그럼요?”
“널 위해서지.”
덤덤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시연은 아직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왜요? 벨져 씨가 뭐라고 제 옆을 지키냔 말입니다?”
“말했잖아.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거라고.”
“끝까지 말 안 하시겠단 거군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좋습니다. 벨져 씨가 그리 나오신다면 저도 더 묻진 않겠습니다.”
등을 돌린 시연은 검에 이어서 자신의 짐을 챙겼다.
“뭐 하는 거야?”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 이곳을 나가 혼자 도망칠 터이니, 벨져 씨께선 이곳에서 도망치든, 싸우든 알아서 하십시오.”
시연은 끝내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며 지부 밖으로 나갔다.
벨져는 잡을 생각이 없는 듯,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침울해진 분위기에 모두가 말을 걸지 못했고,
그나마 곁으로 다가온 수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따라가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벨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차하면 제가 따라가서 뒤를 보겠습니다.]“……부탁 좀 할게.”
지시를 받은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홀로 지부 밖으로 나갔다.
‘이것도 다 내 업보겠지.’
벨져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현자들과 대적하기로 마음먹은 그날을 후회하는 감정이 내면에서 샘솟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