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1
제181화. 만수무강
마족으로 환생한 이후,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린 전생의 존재들이 누구일 것 같은가?
가족?
부끄럽게도 아니다.
오히려 가족은 생각이 떠오르려 하면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엄한 죄책감만 늘어날 것 같았으니.
대개 사람이 살면서 자기 잘못을 잊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뭔지 아는가?
바로 증오의 대상을 찾는 거다.
그리고 내겐 애써 찾을 필요 없는 증오의 대상의 무려 넷이나 있다.
마왕의 후손이 된 이후, 난 전생의 존재들 중 그들을 제일 많이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세세하게 다 기억하게 됐다.
주름으로 뒤덮인 눈.
뭉뚝한 주먹코.
웃을 때마다 반달처럼 벌어지는 입.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의 개수까지.
그 뚜렷한 기억 속의 부위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익숙한 존재 한 명이 지금,
내 앞에 자리하고 있다.
와, 시.
이거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네?
용사 차시혁이 죽고 무려 80년이 지났다.
80년 전에도 늙디늙은 노인이었던 그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는 건, 결국 저 늙은이도 인간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상관없다.
이제 와서 인간이고, 인간이 아니고가 뭐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지금.
생을 갈아타고 지옥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내가 복수의 대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거지!
-타닥, 타다닥
내 감정에 반응이라도 한 듯, 손에 쥔 아크베리아에서 선명한 떨림이 일었다.
* * *
자란 듯, 자라지 않은 머리 양쪽의 불.
짙은 검은색의 머리와 붉은 눈동자.
기억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똑 닮은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모데스는 아직 정체를 밝히지 않은 저 어둠 속의 존재가 누구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자네로군. 이 반쪽이들이 말하는 전대 마왕의 후손이…….”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낀 모데스는 웃음을 흘렸다.
“재밌군. 이래서 핏줄은 무시 못 한다니까? 그래, 선조를 따라 인계를 재침공하기 전에 사전답사라도 왔나?”
벨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실실 웃기만 했다.
“흠. 근데 자네 재밌는 걸 들고 있군. 아무리 봐도 검 같은데? 마족은 검을 안 쓰지 않나? 자기 선조를 죽인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건 무슨 경….”
모데스는 말하다 말고 아 하는 탄음을 내었다.
“그렇군! 이제야 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야. 자네가 바로, 용사의 후손 옆에 붙어있다던 그자로군! 맞지? 하기야! 자네들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용사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일 테니까! 크하하! 산테 그 친구의 예상이 맞았어!”
모데스는 박장대소를 했고, 줄곧 킥킥대며 웃던 벨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늘의 해는 어느새 완전히 넘어가면서, 칠흑의 어둠으로 물들여졌다.
“얘들아.”
메이와 수호는 동시에 대답했다.
“네. 벨져 님.”
[네. 벨져 님.]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이 도달했음에 나타나는 희열,
그 순간에 오기까지 겪어온 고된 시련들이 떠오르면서 나타나는 비통,
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솟은 벨져의 목소리엔 흐느낌 같은 떨림이 일고 있었다.
“저 해가 다시 뜰 때까지, 이 근방에 아무도 들이지 마.”
[그리하겠습니다.]“그리고 저 둘은 너희가 맡아. 산 채로 잡아서 듣고 싶은 걸 듣든, 바로 죽이든 상관없으니까. 그냥 이 근방을 못 떠나게 해.”
“알겠어요 벨져 님!”
두 개의 지시를 받아들인 수호와 메이의 눈에 벨져와 똑같은 붉은빛이 감돌았다.
“무대는 만들어졌다. 코흐.”
“주인공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겠군요.”
원하는 자리를 성사시킨 이노투스와 코흐 형제 또한 즉시 현장에서 사라졌고, 그 뒤를 메이와 수호가 무섭게 뒤따랐다.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모데스는 다시 탄음을 내며 하늘을 보았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군. 뭐가 뭔지 알 수 없는데, 뭔가는 벌어지고 있는 듯한 묘한 상황. 저 반쪽이들이 날 어떻게 아는지 둘째치더라도, 마족인 자네는 날 어떻게 아는 거지? 날 보는 그 눈은 아무리 봐도 원수를 보는 눈인데?”
벨져의 입에서 다시 킥하는 비웃음이 터졌다.
방금 모데스가 말하는 기분은 벨져도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저 늙은이들의 집단으로부터.
그래서 그럴까?
그 기분을 역으로 전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또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구구절절하게 물을 필욘 없겠지. 원래 우리 현자는 세상일에 직접 관여할 수 없게 돼 있지만……. 뭐 어겨도 이미 예전에 여긴 규율을 애써 지킬 필욘 없지. 마족이 이 땅에서 다시 설치는 건, 우리로서도 참 골치 아파서 말이야.”
모데스가 손을 올림과 동시에 벨져의 발밑으로 금색 마법진이 그려졌다.
벨져가 눈을 돌린 순간, 마법진에서 솟아오른 네 개의 금줄이 벨져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금줄에서 발산한 성력의 기운이 벨져의 몸을 지지면서 연기가 치솟았다.
웃음이 만연하던 벨져의 얼굴이 꾸깃 일그러졌다.
하지만,
-뚜뚝
벨져는 단순 완력으로 모데스의 금줄을 끊어냈다.
모데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허허! 역시 마왕의 후손이라 그런지, 이 정도는 끄떡없다는 건가? 대견하긴 해도, 그 벨시페르의 비하면 확실히 어색함이 느껴지는군. 맞지도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다고나 할까?”
늙은이의 안목은 여전했다.
벨져는 별다른 마력 발현 없이, 당당하게 마법진 위에서 걸어 나왔다.
“애석하게도, 난 용사처럼 눈이 즐거운 혈전을 벌일 재주는 없어서 말이지. 자네의 힘은 다른 곳에서 다른 현자들과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겠네. 그러니 이만 여기서…….”
이번엔 모데스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손바닥 크기로 처음 생성된 원은 1초도 안 돼서, 주변 30미터 반경까지 넓혀졌고, 원에 닿은 지물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흑색으로 물들여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벨져 역시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나마 움직여지는 눈동자라 모데스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모데스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며 멈춰 선 벨져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았다.
“삶이란 말이야. 정도를 넘지 않고 알맞게 사는 게 중요해. 이건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자네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야. 전대 마왕만 봐도 그렇지 않나? 그 친구의 정도는 딱 마계까지였어. 거기서 마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 될 걸, 그 욕망을 못 참고 인계를 침공한 건 암만 봐도 정도가 지나쳤지. 그 결과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욕망을 못 참고, 인계로 넘어와 끝에는 잘못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선택은 인간이 봐도, 마족이 봐도 용인할 수 없는 그른 선택이었다.
물론 단면만 봤을 땐 말이다.
“아 참고로 그 정도를 넘다가 몰락한 친구가 또 있어. 바로 자네의 선조를 죽인 용사 차시혁 말이네! 그 친구도 절제를 못 하고 삐끗해서 모든 걸 잃었지! 그 결과물이 자네가 만났던 그 차시연이고! 어떻던가?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굉장히 안쓰러운 삶을 살고 있지? 자기 선조를 원망하다 못해 저주해도 모자랄 거야!”
그럴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스스로를 최강이라고 자부했던 그 교만한 마음이 본인은 물론, 관련인과 후대의 사람들까지 피해를 보게 했다.
오히려 원망을 안 하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하지만 시연은 차시혁을 원망하지 않았다.오히려 차시혁이 남긴 수호의 의지를 받들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인계의 재앙을 대비하기 위해, 날로 수련을 거듭했다.
참으로,
기특하게…….
“킥!”
벨져의 입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전하네. 여전해. 변한 게 없어.”
굳어가던 팔과 다리가 서서히 움직여지면서, 벨져는 목을 거만하게 치켜세웠다.
잠시 펴졌던 모데스의 주름이 다시 깊게 파였다.
“그 절제를 제일 못하고 있는 게 네놈 아니었나? 그 몸뚱이로 향락을 실컷 누리면서 지겹게 살았으면 됐지, 대체 언제까지 삶을 이르려는 거지? 삶의 정도를 제일 심하게 넘은 게 너희 늙은이들 그 말을 한다는 게, 좀 웃겨서 말이야…….”
“불결한 마족 따위가, 지금 내 삶의 정도를 운운하는 겐가?”
“아, 그렇다고 비판하려는 건 아니야! 너 말고도 다 살아있는 거지? 카리타스, 파티엔, 산테까지…. 니들이 아직까지 살아있어 줘서, 내가 얼마나 고마운데…….”
모데스의 얼굴에 비로소 다급함이 감돌았다.
“네놈 뭐지? 성교회 고위 사제들도 모르는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아무 관련 없는 마족이?”
벨져는 대답 없이 옷깃에 달린 마혈석을 떼서 발 앞에 던졌다.
이어서 속주머니에서 다른 두 개의 마혈석을 양옆에 추가로 던졌다.
분노의 종주 베누스와 탐욕의 종주네로의 것이었다.
“실컷 날뛰어봐. 니들이 하고 싶은 대로…….”
벨져의 말에 반응한 첫 번째 마혈석에서 거센 빛이 일었다.
전생의 차시혁이 현자에게 당할 수밖에 없던 가장 큰 이유. 바로 성력 때문이었다.
레지에타에 처음 소환된 당시만 해도, 시혁은 특별한 것 없는 지구의 평범한 남성에 불과했다.
그런 시혁이 빠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4현자는 시혁의 몸에 성력의 근원체를 넣어주었다.
덕분에 시혁은 남들과 다른 압도적인 습득력과 성장력을 지니게 되었고, 마왕을 물리친 이후에도 그 힘이 무뎌지지 않도록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그리고 시혁이 현자들의 심판을 결심했을 땐, 성력에 관해선 적대자가 없는, 그야말로 인계 최강의 성력 보유자가 되었었다.
하지만 그 성력은 현자들과 대면한 순간, 허무하게 흡수되고 말았다.
애초에 시혁에게 처음 힘을 하사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즉, 죽 쒀서 개 준 꼴.
시혁이 평생을 갈고 닦아 완성한 성력의 근원체를 현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거두면서 보기 좋게 배를 불렸다.
어쩌면, 지금 벨져의 몸을 멈추게 한 이 성력 역시, 시혁에게서 흡수한 성력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벨져로선 스스로가 이룩한 걸 스스로가 깨부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지만,
“딱히 못 할 일도 아니잖아?”
벨져는 아크베리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절제의 속박을 풀어?”
당황한 모데스는 반대쪽 손까지 들어 성력을 두 배로 발현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왼쪽에 자리한 베누스의 마혈석에서 분노의 마력이 빛을 내며 뿜어져 나왔다.
모데스를 향해 나아가는 벨져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졌다.
“이거, 더는 가볍게 임하면 안 되겠군.”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역으로 당할 수도 있는 상황.
모데스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최대의 성력을 발현하기 위해, 금빛이 발하는 두 손을 하늘 위로 치켜올렸다.
-쿠르릉!
어둠이 깔린 하늘에 울리는 무지막지한 천둥소리.
곧 번쩍하는 발광과 함께 금빛 번개가 벨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오른쪽에 자리한 네로의 마혈석에서 탐욕의 마력이 솟구쳤다.
-텅! 터텅!
고막이 터질 듯 쉴 새 없이 내리쳐진 번개는 마력이 생성한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며 단 하나도 벨져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렇게 둘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으며, 그럴수록 모데스의 급박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급한 대로 다른 마법도 남발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마침내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둘.
입술을 달짝이던 모데스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인정해야겠군. 지난 100년간 마족들도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야? 이 정도면 그 전대 마왕의 마력 못지않군. 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들어보겠는가?”
벨져가 다가오는 동안, 모데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본인의 성력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벨져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
일단 살아서 여길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다.
“자네가 원하는 건 분명 둘 중 하나일 테지. 인간을 향한 복수, 혹은 전대 마왕이 원했던 것과 같은 최강자와의 혈전! 어느 쪽이든 난 자네가 원하는 그 욕망을 절대적으로 충족해줄 수 있네.”
“내 욕망?”
“그래 욕망! 자네는 선을 넘어선 욕망을 추구할 자격이 있어 보여! 어떤가? 이대로 날 보내주겠는가?”
벨져는 검을 땅바닥에 박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벨져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고 생각한 모데스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뭔 개소리야?”
이를 들어줄 벨져가 아니었다.
“내 욕망은 지금 바로 앞에 있는데?”
용사 차시혁으로서의 삶을 마감한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벨져는 현자들을 다시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마침내 입 밖에 내던졌다.
“만수무강…….”
모데스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동안 오래오래 사셨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