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3
제183화. 파멸의 시작
벌어진 상처 속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
그 주위로 울긋불긋 피어오른 검은 반점.
이는 더 기억할 것도 적림에서 발생했던 역병의 증상이었다.
그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메이는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역병의 균을… 가져오신 건가요? 인계에?”
“조금 변형을 하긴 했지만, 본질은 그 역병이 맞습니다….”
코흐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찌 말을 멈출 수 있겠는가?
마침내 고대했던 순간이 도래했는데?
“저희와 함께 적림을 가신 것도, 결국은 역병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군요! 이걸 위해서였나요?”
“본래는 인계에 퍼트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여기만큼 역병이 활개 치기 좋은 곳도 없더군요.”
인간의 몸은 나약했다.
마족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마인족과는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런 마족을 불과 세 시간 만에 괴사시키는 역병의 균이 인간의 몸을 잠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관찰일지를 쓸 수 없다는 게 코흐로선 아쉬울 따름이었다.
항상 평정심을 유지했던 수호도 이번만큼은 분노한 나머지 이를 아득 갈았다.
[이게 당신들이 말한 파멸인가요? 마계의 역병을 인계에 퍼트리는 게?]“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어차피 이 병으론 모든 인간을 죽일 순 없습니다. 대신 각인시킬 순 있겠죠. 이 병을 퍼트린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주체를 자신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불행이 닥치면, 그 불행을 선사한 주체를 원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세간엔 이미 사할리스에 출현한 마족 이야기로 들썩거리고 있으며, 이 극악무도한 마계의 역병이 퍼지고 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병을 퍼트린 주체를 원망하게 될 것임을, 코흐는 굳게 믿고 있었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마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원망과 증오에 휩싸인 인간들을 상대할… 쿨럭!”
또 한 번 피를 토한 코흐는 기어이 바닥에 엎어졌다.
치를 떠는 둘을 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으니, 메이와 수호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당혹감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멍하기 서 있기를 몇 분여.
-저벅저벅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벨져가 온 것이다.
“뭐야 이건?”
벨져는 눈앞의 난해한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깨달았다.
“미친 새끼들. 이걸 원한 거였나?”
정신 나간 짓도 정도껏 하라며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코흐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일단 결계가 역병이 퍼지는 걸 막고 있긴 하지만, 결계를 언제까지고 둘 순 없습니다.]“그렇다고 이대로 병이 퍼지게 막을 수도 없지 않나요? 자칫 잘못하면 이 일대가 전부 적림처럼….”
즉, 이대로 가자니 이곳이 제2의 적림이 되는 거고, 남자니 여기 마족들이 있다고 떡하니 알리게 되는 꼴.
둘 다 마음에 드는 방향은 아니었다.
벨져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다시 눈을 뜬 벨져의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메이와 수호는 가만히 벨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리고 벨져의 말이 다 끝났을 땐,
[벨져 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수호는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설치해뒀던 결계를 해제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마계로 돌아가는 게이트를… 열겠습니다.]* * *
일주일 후.
부르크 왕국 왕성 지하.
금빛이 만연한 광장 중앙에 자리한 세 명의 현자들.
본래는 한 명이 더 있어야 했지만, 더 이상 그 자리는 채워질 수 없게 되었다.
한쪽 눈을 비비고 있던 카리타스가 입을 열었다.
“역병의 확산은 어떻게 되고 있죠?”
현자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레이든 왕자가 대답했다.
“현재 성교회 단원들과 각국에서 지원 온 치유사들에 의해 인근 지역을 원천 봉쇄 중입니다.”
“감염된 자들은요?”
“발견 즉시 격리하고 있긴 합니다만, 전부 세 시간을 못 넘기고 죽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좀 더 고생해주세요. 레이든 왕자. 알고 있겠지만, 역병이 퍼지고 있단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왕자는 허리를 숙인 채로 물러났다.
왕자가 나가자마자 인내의 현자 파티엔이 탁상을 쾅 내리쳤다.
“그냥 그 일대를 싹 멸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뭐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진정하게 파티엔.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모데스의 시체는 찾아야 할 거 아닌가?”
“시체? 시체는 찾아서 뭐 하게? 팔다리가 몇 개로 잘렸고, 내장은 얼마나 튀어나왔는지 그런 거라도 확인할 건가? 모데스가 그 마족 놈한테 당했다는 거, 여기 모르는 늙은이 있어?”
카리타스와 산테는 침묵했다.
사할리스에 마족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혹여 자신들의 영역에도 마족이 출현할지 모른단 생각에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그렇게 카리타스를 제외한 세 명이 각각 다른 국가로 넘어가려는 그때,
절제의 현자인 모데스가 죽은 것이다.
어떤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지금 역병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그런 오염 구역 따위 그냥 소멸시켜버리고, 모데스를 죽인 그 마족을 찾아야 한다고! 그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야, 어차피 다 떠넘길 거 아닌가?”
“솔직히 확증은 없지 않은가? 모데스가 마족한테 죽었다는…….”
“그럼 인간한테 죽었다고? 레지에타의 질서를 관장하는 현자가? 카리타스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파티엔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연신 탁상을 내려쳤다.
그러다 내심 진정이 됐는지, 다시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역병인지, 술병인지 난 신경 끌라니까 마음대로 하게. 난 내 할 일 할 테니.”
“뭘 할 생각인가 파티엔?”
“뭐긴, 당연히 그 마족 놈을 찾아 족치는 거지.”
파티엔은 독불장군마냥 그대로 지하 광장을 나갔다.
카리타스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저 망할 늙은이 같으니, 100년이 지나도 성격은 여전하군.”
인내의 현자가 떠난 광장엔 자선의 현자와 순결의 현자 둘만 남게 되었다.
카리타스는 침묵을 이어가는 산테를 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말 그 마족이 모데스를 죽였다고 보나?”
“죽였다고 보는 게 아니라, 죽인 게 맞네.”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나?”
“모데스가 죽은 현장에서 마력의 흔적이 있었네.”
“현장? 자네 거길 갔었나? 역병이 퍼진 곳을?”
산테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러면서 왜 말을 안 한 겐가? 모데스의 시체는?”
“이미 처리했네. 성력도 전부 거뒀고.”
성력을 거뒀다는 말에 카리타스는 잠시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질문을 이었다.
“정말… 당한 게 맞나? 마족에게?”
“검에 당한 흔적이 몸 곳곳에 있더군.”
“검?! 그럼 정말로 차시연 옆에 붙어있다던, 그 검은 머리의 마족이 모데스를 죽인 범인이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모데스가 고작 마족 따위한테…….”
“고작이라고 부를 마족이 아닐세. 그 마족의 마력은 전대 마왕 수준 못지않았어.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산테는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덤덤히 차를 들이켰다.
“차시연은 어쩌고 있지?”
“아크베리아를 받은 이후로 줄곧 왕성에 머물면서, 수련에 열중하고 있다는군.”
“그 아이를 계속 케어해 주게. 우리가 할 일은 100년 전과 다를 것 없네.”
“뭐 그 아이가 차시혁처럼만 해준다면, 문제 될 건 없겠지…….”
산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리타스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모데스의 일은 아깝게 되었지만, 산 늙은이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린 더 오래 살아야 하네. 카리타스.”
“알지. 알고말고…….”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지만, 산테의 행동을 썩 달가워하진 않았다.
* * *
같은 시각,
데온 왕성 외부, 기사들의 연무장.
이곳에선 왕국의 기사들과 시연이 대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앞서 진행한 것을 포함해서 벌써 다섯 번째 대련.
시연의 이번 상대는 근위 기사단 소속의 상급 기사 라일리였으며, 레이든 왕자가 참관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세는 대체로 시현이 점했다.
검술 실력은 근위 기사들과 크게 차이 나진 않았지만, 시연은 맞서는 상대마다 시종일관 기세와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한 번 빼앗긴 분위기를 좀처럼 가져오진 못한 기사들은 시연에게 속속 패하고 말았다.
근위 기사단 내에서도 가장 강심장이라고 알려진 라일리가 호기롭게 나서며 시연을 상대해 봤지만,
-채앵!
“수고하셨습니다.”
그마저도 시연이 라일리의 검을 손 밖으로 쳐내면서 승리를 가져왔다.
패배를 인정한 라일리는 군말 없이 시연에게 최선을 다해준 것에 대한 예를 표했다.
참관하던 레이든 왕자가 다가왔다.
“독학했다고 하기엔 정말 믿을 수 없는 실력이구나. 그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으니, 나로선 더 칭송할 말이 없다.”
“왕자님께서 과분한 배려를 해주신 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검은 좀처럼 쓰지 않는 것 같더구나.”
시연이 대련 때 사용한 검은 평범한 장검으로 카리타스에게서 받은 아크베리아는 구석에 놔둔 채, 손도 대지 않았다.
“검이 너에게 안 맞는 것이냐?”
“아닙니다. 검 자체는 일말의 불편함 없이 제게 딱 맞습니다. 단지…….”
“아직 뽑을 시기가 아닌 모양이구나.”
시연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인도 아닌 내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겠지. 수련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거라. 뭐든 지원해주겠다.”
“그럼.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레이든은 주변 기사들에게 눈신호를 보내, 모두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시연은 바로 물었다.
“제게 베풀어주시는 이 호의는 왕자님의 뜻입니까? 아님 그들의 뜻입니까?”
시연이 말하는 그들이 누굴 의미하는지, 레이든은 모르지 않았다.
레이든은 입꼬리를 올리며 역으로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왕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나 또한 그걸 부정하진 않을 것이니…….”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루백 공으로부터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냐?”
“예…….”
“어쩐지. 네가 예상보다 담담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담담했던 척을 한 거지, 담담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담담할 수 있을까?
80년 전 마지막으로 얼굴을 드러냈던 존재들이 버젓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성검이라고 하는 어마무시한 물건을 주었는데….
레이든은 긴 숨을 토해내며 등을 돌렸다.
“나는 네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끝을 정하지 말고 계속 강함의 길을 나아가길 바란다. 설사 네가 선조 용사의 경지까지 올랐다고 하더라도…….”
“제가 강해지면, 왕자님께 무슨 도움이 되는 거죠?”
“글쎄? 나한테 도움이 되기보단, 세상에 도움이 되겠지. 네가 그릇된 마음만 먹지 않는다면.”
시연의 어깨가 움찔하고 들썩거렸다.
그가 말한 그릇된 마음은 뭘 뜻하는 걸까?
현재로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 연무장 밖으로 한 기사가 들어와 레이든에게 보고를 올렸다.
“왕자님. 순방 준비 완료했습니다.”
“알겠다. 바로 가지. 너도 준비해라 차시연.”
갑작스러운 요청에 시연은 당황했다.
“순방이라고 하시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역병이 발생한 곳으로 간다.”
역병이라니?
에헤른 온 이후, 줄곧 왕성에 있던 시연으로선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부르크 왕국에 역병이 퍼졌단 말입니까?”
“확산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 막는 중이다. 어떤 제보자가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겠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한 역병입니까?”
“아니.”
레이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족이 퍼트린 역병이다.”
시연의 눈으로 순간 살의가 차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