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5
제185화. 나는 말이지
시연이 숲의 괴물들을 처리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역병의 기세는 눈에 띄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괴물들을 정화한답시고 숲을 돌아다니다 보면, 시연 역시 그 역병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성검의 성스러운 보호 덕분인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역병의 확산도 점차 느려지면서, 어느 정도의 저지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또다시 시연이 해낸 상황.
레이든 왕자는 이번에도 시연의 활약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 즉시, 왕국 전체에 시연의 활약상을 알리면서, 그녀의 명성을 더욱 드높여주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죄인의 후손에서 왕국의 영웅이 되기까지.
시연의 이미지는 단기간에 회복함에 따라, 왕국 곳곳에선 그녀를 칭송하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허나 이런 상황이 별로 달갑지 않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루백과 무인들이었다.
“시연 님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왕국만이 아닌, 타국 곳곳에서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지켜만 봐도 되는 겁니까?”
“나쁜 현상은 아니지 않으냐? 애초에 우리가 바랬던 시연 님의 삶도 이런 방향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시연 님의 뒤엔 레이든 왕자가 있습니다. 그 왕자가 단순 호의로 시연 님을 봐줄 리는 없지 않습니까? 필시 그 뒤에….”
루쉔은 말을 하다 말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이 자리에서 모르는 무인은 없었다.
루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본래 하던 검 손질을 이어갔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자꾸나. 시연 님의 삶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좋은 것이고, 설사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진다고 한들, 그때 나서서 도와주면 되는 것이야.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시연 님이 필요할 때 나타나 주면 된다.”
“알겠습니다….”
루백의 뜻을 받아들인 루쉔은 그대로 자리를 떴다.
검 손질을 이어가던 루백은 날카롭게 날이 선 칼날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루백 역시 왕국이 아무 이유 없이 시연의 명성을 드높여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허면 그 행위에는 필시 어떤 목적이 있을 터.
루백은 그 왕국의 목적이,
“그 마족이 자꾸 신경 쓰이는군.”
사할리스에 나타난 마족 때문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루백은 멈추었던 검 손질을 다시 이어갔다.
* * *
“저기 봐! 차시연 님이야!”
역병의 숲을 정화하고 한 달이 지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연은 바뀐 도시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하고 얼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그동안 시연은 알던 사람들도, 모르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그녀를 보며 칭송하기 바빴다.
“소식 들었어요 시연 님! 사할리스에 나타난 도적들과 마족을 물리쳤다면서요?”
“왕국 서남부에서 발생한 역병을 혼자 정화하셨다던 것도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소문은 본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과장되기 마련.
시연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선 부인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겸손함의 미덕까지 갖추었다며 그녀를 더욱 떠받들기에 이르렀다.
겨우내 인파를 빠져나온 시연은 자주 가던 술집으로 향했다.
물론 그곳에서도 시연의 칭송은 멈추지 않았다.
“이게 누구야? 우리 왕국의 영웅 차시연 님 아니야? 뭐 하고 있어 다들 술 채우지 않고!”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그녀의 영웅담을 듣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중앙무대에선 가희들이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밥 한 끼 먹으러 왔다가, 졸지에 파티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물론 밥만 먹으러 온 건 아니었다.
시연은 손님들의 인사에 일일이 화답하며 술집 주인이 있는 바 테이블로 향했다.
“혹시 레오 할아버지는 안 오셨습니까?”
항상 술집에 상주하던 그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레오 영감? 그 노인은 안 보인지 한참 됐어. 요즘 거리에서 장사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예전부터 시연을 챙겨주던 사람 중 하나인지라, 특히나 신경이 가던 그였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혹시 본 사람이라도 없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시연은,
-휙!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선 고개를 돌렸다.
허나 보이는 건 음주가무를 즐기는 사람들 뿐.
시연은 급히 술집에서 나가 거리를 달렸고, 집이 아닌 자신만이 아는 비밀 장소로 향했다.
두 번의 공적을 세운 시연에게 레이든 왕자는 귀족 작위를 약속했다.
부르크 왕국 역사상 왕족이 직접 평민에게 작위를 내리는 건, 80년 전 차시혁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시혁은 당시 작위를 받지 않았다.
왕국에서 작위를 받는다는 건, 곧 본인이 왕국에 귀속됨을 의미했기에, 시혁은 그런 종속적인 삶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시연의 경우는 달랐다.
시연은 어릴 적부터 몰락한 용사의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시연에게 레이든 왕자는 작위 하사를 통해 과거 차시혁의 죄를 사면받는 것만 아니라, 그녀가 살던 고향을 영지로 봉해준다고까지 했다.
시연은 생각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그토록 바라왔던 상황인 건 맞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에.
자신의 영지가 될지도 모를 이곳을 천천히 둘러보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그렇게 다급한 발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익숙한 절벽 아래.
용사와 마왕을 기리는 기념비가 위치한 장소였다.
두 달 가까이 오지 못했던 만큼, 그동안 흙이나 먼지에 많이 더럽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온 시현을 반겨준 기념비는,
너무나도 깨끗한 상태였다.
시연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로 슬며시 앉아 손으로 기념비를 쓸었다.
누군가가 왔다 가지 않고서야, 이리 깨끗할 리 없었다.
시연은 시선을 기념비에 고정한 채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시죠? 역병이 퍼지고 있다는 걸, 왕실에 제보한 자가…….”
시연으로부터 몇 걸음 뒤로 머리 위에 뿔이 솟은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역병에 감염된 괴물들을 정화하던 중,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었습니다. 분명 당신의 짓이었겠지요?”
“두 구? 세 구가 아니라?”
“제가 본 건 두 구였습니다.”
시연은 품에서 안경 하나를 꺼내, 뒤에 나타난 이에게 보였다.
코흐의 안경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왕실에 알리신 거죠?”
“당연히 너희가 역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겠지?”
“당신들이 직접 막았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분명 그 정도 힘은 있으셨을 텐데요?”
“불순한 기운을 정화하는 데엔 마력보다 성력이 더 용이하거든. 뭐 네가 내 예상보다 잘해준 것도 있고.”
“꼭 이런 상황을 바랐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시연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여태 대화를 나누었던 존재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 역시 몸을 누였던 나무에서 나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시연과 벨져.
그들이 다시 만났다.
“사할리스에선 절 왜 살려주셨습니까?”
“애초에 서로 죽이자고 칼을 부딪친 게 아니었잖아?”
“전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그때 네 검엔 살의가 없었어. 너도 알잖아? 내 검에도 살의가 없었다는 거.”
시연은 부정하지 못했다.
벨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좋아. 온 세상 사람들이 네 이야기만 하고, 듣기 좋은 말들만 해주니 여기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세상이구나 싶지. 근데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어.”
전적으로 경험담이었다.
“저들이 갈수록 내게 더 많은 걸 원하는구나. 저들이 하지 못하는 걸 내가 해주길 바라는구나. 난 그 기대에 더 부응해야겠구나 하는…. 그 압박감이 미칠 듯이 심장을 옥죄어. 그러면서 차츰 사리 분별을 못하게 되지.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못 할 일도 그분 못하게 될 정도로.”
“경험담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기분 탓 아닐 거야. 아마도.”
벨져의 대답은 이번에도 모호했다.
“검 멋있네? 누구한테 선물 받았나 보다?”
시연의 성검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시연은 본능적으로 검을 등 뒤로 숨겼다.
“안 뺏어갈 거니까 경계하지 마. 어차피 난 그거 쓰지도 못해.”
“어째서죠?”
“마족이니까. 이 레지에타에서 성력을 가장 최대로 끌어낼 수 있는 물건인데, 그걸 마족이니 쓰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어?”
벨져의 말에 시연은 허리춤에 찬 검집을 풀었고, 벨져의 눈앞에 성검을 대놓고 들이밀었다.
“제가 이 검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다루길 원하십니까?”
“뭐, 그렇지?”
“그럼 지금이라도 설명해주시죠.”
“뭐를?”
“벨져 씨가 누구인지를요.”
마침내 발을 움직인 시연이 벨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 시간 동안 시연도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이 벨져란 이름의 마족은 자신에게 어떠한 악의도 없음을.
악의는커녕 오히려 선의를 가지고 접근했으며, 순수하게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지금 했던 말도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해준 것임을 시연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시연은 이번에야말로 알아야 했다.
자신에게 이런 이유 모를 선의를 베풀어주는 남자의 정체를.
그 정체를 알지 않고선,
지금까지 벨져가 해준 모든 말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
시연의 단호한 요구의 벨져는 흐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올렸다.
“안 믿을 텐데?”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꼭 알아야겠어?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니까?”
“정 제가 모르길 바랐다면, 지금 제 앞에도 나타나지 마셨어야죠.”
더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벨져는 머리를 긁적였다.
비록 지금은 정체성을 찾았다곤 하나, 내심 벨져도 그동안 많은 고민을 해 왔었다.
자신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무얼 하기 위해 나타났는가?
마계에 있을 때는 그 역할이 뚜렷하게 드러났기에 괜찮았지만, 인계에 와서 시연을 만났을 땐, 여러모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벨져는 딱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둘 다 자신이고, 그걸 주위 사람들이 인정을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벨져는 앞으로도 쭈욱 이 비밀을 숨기고자 했다.
하지만,
“나도 사실 아직 긴가민가해. 나란 녀석이 정말로 실재할 수 있는지를…….”
어쩌면 말하는 게 답일지도 모를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생각해보면 정체를 말한다고 한들, 크게 상관은 없을지도 몰랐다.
어떤 관계가 되든, 자신은 이 인계에 있을 수 없고, 시연의 옆에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결심을 굳힌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지. 사실…….”
-스슥!
그때 근거리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지면서 둘은 동시에 검을 잡았다.
“거기까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무장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왕실 소속의 근위 기사단과 학회 소속의 마법사들, 그리고 성교회 소속의 심판관들이었다.
그 무리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으니, 그는 다름 아닌,
“와, 왕자님?”
레이든 왕자였다.
“여긴 어떻게? 설마 제 뒤를 쫓으신 겁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묻느냐? 너희 혈족은 항상 감시가 붙어 다녔다는 걸 알지 않느냐?”
시연은 아득 이를 갈았다.
감시자가 따라다닌 거야 몰랐던 사실도 아니었지만, 용사의 기념비가 있는 이 비밀 장소를 들켜서 그런 건진 몰라도, 기분이 매우 초조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 거라. 덕분에 기회가 생겼으니.”
“기회?”
“결계를 펼쳐라!”
시연의 되물음엔 대답하지 않은 채, 레이든은 마법사와 심판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에 응한 십수 명의 인간들이 각자의 손에서 일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성력의 빛을 하늘로 날렸다.
허공에서 만난 각자의 빛은 거대한 구체로 합쳐지다가, 빗줄기처럼 다시 땅에 쏟아져 내렸다.
벨져는 이 기술이 뭔지 알고 있었다.
100년 전, 인간들이 마족을 가둘 때 쓰던 고위 마법.
원죄의 감옥(Prison of Original Sin).
성력이 창살 역할을 대신하면서, 걸리기만 하면 성력에 취약한 마족들로선 감히 손도 못 댈 정도로 무시무시한 마법이었다.
이 마법을 100년이 지나 역으로 당하게 되니, 벨져는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새롭다는 거지, 썩 좋다는 건 아니었다.
“부르크 왕국의 1왕자 레이든 부르하르크의 이름으로 명한다. 차시연. 지금 당장 저 벨져라는 이름의 마족을 죽여라.”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전 아직 저자에게 들어야 할 사실이…!”
“그 사실. 내가 말해주겠다. 저 마족의 정체가 궁금한 거겠지?”
레이든은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며 덤덤히 말했다.
“저자는 100년 전, 인계를 파멸로 몰고 갔던 마왕 벨시페르의 후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