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6
제186화. 재림
시연이 사할리스에서 벨져와의 혈전을 마치지 못하고 끝내 쓰러질 당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던 코흐는 사라지기 전, 레이든 왕자에게만 진실을 전했다.
“벨져의 정체는 전대 마왕 벨시페르의 유일한 후손이자, 현 마계에서 가장 마왕의 권좌에 가까운 마족입니다.”
범상치 않은 마족이란 건 알았지만, 전대 마왕의 후손이었다니.
레이든으로선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코흐는 진실과 함께 조언을 덧붙였다.
이 사실을 시연에게 말하는 건 왕자의 자유겠지만, 부디 극적인 상황에서 밝히는 게 좋을 거라고.
가령 시연과 벨져가 다시 만났을 때와 같은…….
결국, 코흐가 말했던 상황이 수십 일 만에 벌어졌고, 레이든은 그동안 묵혀뒀던 진실을 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또한 이 진실을 듣는 건 시연만이 아니었다.
왕자가 대동한 기사와 마법사들, 성교회 소속의 단원들. 그리고.
“사, 사할리스에 나타난 마족이 마왕의 후손이라고?”
호기심을 못 참고 그 인파에 따라 들어온 평범한 사람들까지.
당장 여기 있는 사람들만이 아닌, 레이든 왕자는 이미 오기 전 왕실의 이름으로 벨져의 정체와 관련된 공문을 왕국 전체에 내렸다.
그리고 이 공문은 부르크 왕국을 넘어 타국에까지 전해지면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벨져의 정체를 알게 될 예정이었다.
물론 그 어떤 사람들보다, 정체가 알려지면서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 시연이었다.
“마왕의… 후손?”
시연의 모든 힘은 검을 쥔 오른손으로 몰렸다.
천천히 돌아가는 시선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마왕.
그녀의 선조 차시혁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물리쳤던, 인계와 마계를 통틀어 전무후무의 최강자.
그런 자의 후손이 눈앞에 있다.
그것도 모자라 여태 신분을 숨기고 자신에게 접근했다.
분명 충격적인 사실이긴 하지만, 현재 시연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대한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그게 끝이야?’
시연이 본 벨져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그가 말하려던 본인의 정체는 그게 아니었다는 듯이.
마왕이 후손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말도 안 되는 비밀을 그는 말해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시연은 진실 속에 숨은 진짜 진실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차시연 기회가 왔다. 너의 혈족의 죄를 완전히 씻을 기회가.”
레이든 그 진실을 알 기회조차 시연에게 주려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마족을 죽이거라.”
시연의 시선이 다시 레이든에게 돌아갔다.
죽이라고? 벨져를?
저 마족이 가진 힘은 사할리스에서 보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가 진짜 마왕의 후손이라면 아직 끌어내지 않은 힘이 얼마나 있을지 가늠조차 안 될 터인데,
고작 이 정도 병력으로 그를 죽이라고?
시연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너라면 할 수 있다. 지금의 네겐 과거 마왕을 물리쳤던 성검이 있고, 네가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지원군이 있다. 너도 바랐던 일 아니더냐?”
“바랐던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린 아직 이 마족의 힘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 자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들…!”
“할 수 있고, 없고를 네가 왜 따지지?”
레이든의 어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가파른 얼음 절벽에서 부서져 내린 얼음덩이마냥 차갑고 날카로웠다.
“인계를 침공한 이종족에서 맞서, 인간을 지키는 것. 그것이 네 혈족과 네가 할 일이다. 죽은 네 선조도 분명 그걸 원하고 있을 것이다. 설사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해도! 너의 모든 것을 바쳐 싸워라! 차시연!”
시연은 머릿속이 한순간 멍해짐을 느꼈다.
언뜻 레이든의 말이 강압적으로 들릴진 몰라도, 그중 틀린 말은 없었다.
시연이 평소 생각해왔던 그대로였다.
이 땅에서 태어난 자신이,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바로 선대 용사가 했던 수호의 유지를 받들어, 이 레지에타 대륙을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저 벨져란 마족이, 정말 이 인계에 위협이 될 존재인가?
당사자에게 묻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질문.
허나 시연은 마음은 이미 반대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벨져와는 조금 더 대화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인계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더불어 자신에겐 무얼 원하고 있는지 등을.
허나 시연의 이런 마음을,
“왜…… 안 싸우는 거야?”
다른 인간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긴 침묵 속에서 사태를 관전 중이던 한 인간의 물음이 모두의 귀로 퍼졌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레이든 왕자님의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우릴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용사 아니었어?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깝다는 거야?”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으로 이어졌다.
“역시 죄인의 후손은 어쩔 수 없다 이건가? 자기들의 죄를 씻을 생각이 없나 보지?”
“그러고 보니 저 검은 머리의 마족. 이전에 차시연에게 붙어 있었던 그 남자 아닌가? 마족인걸 알면서도 같이 다닌 건 아니겠지?”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저 미련한 년은!”
의문은 질타로, 그 질타는 점차 욕으로.
시연의 활약을 칭송하며 떠받들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그녀를 지적하고 매도하며, 또 강요했다.
그 훼욕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들은 시연은 벨져의 정체를 알았을 때보다, 훨씬 더 충격에 휩싸였다.
더불어 성검을 쥔 손에서 미친 듯한 떨림이 일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그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시연의 정신은 점점 무너져갔다.
그때였다.
“킥!”
신경을 자극하는 외마디 웃음 소리가 모두의 귀에 울렸다.
“키킥! 시발 그럼 그렇지 니들이!”
벨져는 손으로 한쪽 얼굴을 가리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참으로 웃기지 않은가?
8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 답 없는 종족의 습성이.
자기들은 나서려 하지 않으면서, 남이 해주기만 바라는 기생충 같은!
참으로 밟아 죽여도 시원치 않은 역겨운 습성이 아닐 수 없다.
“봤지?”
웃음을 멈춘 벨져가 다시 시연을 보며 말했다.
“이게 네가 지켜야 하는 버러지들의 본성이야. 가만히 앉아 손만 붙잡고 떨기만 하는 주제에, 살고 싶은 마음은 지랄 맞게 강해서 네 바짓가랑이만 잡으려 들지. 이래도 지키고 싶어?”
여기선 시연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물론이다. 당연하다. 그게 내 할 일이다 등등.
벨져의 물음에 어떤 식으로든 긍정하는 대답만 하면 됐다.
하지만 시연은 하지 못했다.
지금 벨져가 한 저 말이,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꿰뚫었다 싶을 만큼 치명적이었기에…….
시연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난 밟아버리고 싶거든. 니들 전부다…!”
벨져의 마혈석에서 붉은빛이 발했다.
공중으로 솟아오른 빛은 벨져의 몸을 가둔 원죄의 감옥을 손쉽게 꿰뚫었고, 성력을 발하고 있는 마법사들과 성교회 단원들에게 분산되어 퍼졌다.
“커헉!”
힘이란 항상 더 강한 힘에 누그러들기 마련.
고작 십수 명의 인간들이 발한 성력 따위론, 절대자 경지에 오른 벨져의 마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원죄의 감옥은 곧바로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벨져는 검도 뽑지 않은 채, 자신에게 부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인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아무나 좋으니까 와 봐. 니들이 손에 들고 있는 그걸로 날 죽여 보라고. 나 지금 완전 무방비 상태다?”
벨져는 아예 검까지 앞으로 던지고 두 손을 든 채, 사방으로 몸을 두리번댔다.
허나 벨져가 둘러본 인간들 중, 움직이긴커녕, 하다못해 발을 떼는 인간조차 없었다.
인간들은 말은 무방비하다고 했지만 분명 어떤 수가 있기에 저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애초에 인간들은 벨져의 당당한 기세 앞에 잔뜩 눌린 상태였다.
평범한 인간, 마족의 범주는 이미 예전에 넘어선, 절대자의 경지에 오른 존재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니들 지금 놓치는 거다? 마왕의 후손을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벨져는 지금처럼 두 손을 든 동안에는 어떤 공격이 들어오든, 받아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말 어떤 용기 있는 인간이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 치명상을 입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죽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벨져 역시 일어날 수 없을 일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거 봐. 니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도 못하면서, 왜 하지도 못할 일을 남에게 넘기려 해? 그러면서 뭐? 지켜달라고? 꼴값도 적당히 떨어야지.”
벨져는 잠시 내려놨던 검을 단숨에 뽑아냈다.
어느샌가 붉어진 눈은 다시 시연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너밖에 없을 것 같다? 나한테 덤빌 수 있는 인간은?”
살기를 느낀 시연은 본능적으로 성검을 뽑았다.
벨져의 손에서 뻗어나온 검붉은 오라가 아크베리아를 휘감았다.
“3초 준다. 나한테 달려와. 안 오면 난 이거 저 버러지들한테 휘두를 거야.”
시연은 저 힘을 몸소 경험해본 적이 있기에, 저 검기를 막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짧은 고민의 시간조차 없었다.
이득 아득 문 시연은 1초만에 성력을 성검에 전승했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퍼엉!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주변에 어마무시한 강풍이 불며 풀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 사이로 시연이 나가떨어지며 바닥에 두어 번 걸렸다.
벨져의 두 번도, 세 번도 아닌, 단 한 번의 검격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시연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놀랐고, 검을 쥔 손을 포함한 전신에서 엄청난 떨림이 일었다.
“일어나.”
벨져는 그런 놀랄 시간조차 시연에게 주려하지 않았다.
또다시 3초를 세려는 듯 손가락을 드니, 시연은 다시 자세를 잡고 기합을 지르며 벨져에게 달려들었다.
-퍼어엉!
이번엔 아까보다 더 큰 소리가 울렸다.
허나 결과는 마찬가지.
시연은 이번에도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쿨럭!”
내상을 입은 시연의 입 밖으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뒤늦게 아픔을 두 배로 느낀 시연은 괴로움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연신 피와 신음을 토했다.
허나 그 고통의 순간마저도 벨져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일어나.”
현재 그녀가 느끼고 있을 고통은 벨져 또한 어느 정도 가늠이 됐다.
움직이긴커녕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움을 느끼고, 앞이 하얘지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광경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은,
그가 벨시페르를 상대하는 동안 수십, 아니 수백 번은 느꼈었으며, 오히려 그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한 강도의 고통을 경험해왔었다.
그러니 지금 벨져의 눈엔 고작 검격 두 번 정도로 나가떨어진 시연이,
너무나도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벨져는 손가락으로 다시 3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본 시연은 머리가 아닌 몸이 움직인다는 기분으로 검을 잡았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됐던 거야…….’
벨져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았다.
허나 이 정도일 줄은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더 무서운 건, 이 힘이 아직 전부는 아니라는 것.
그가 지닌 힘의 그릇은 대체 얼마나 크단 말인가?
시연은 그 그릇에 담긴 힘을 전부 빼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연은 검을 잡아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선조가 이 대륙에 남긴 유지이기에.
시연은 다시 일어서서 자세를 잡았다.
“역시 용사는 용사네? 투지가 아주 대단해?”
그 모습을 본 벨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미소를 짓고자 올라간 입꼬리가 아니었다.
“근데 어쩌지? 난 아직 만족스럽지가 못한데?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 것 같아서 다행히야.”
시연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물었다.
“무, 무슨 가능성 말입니까?”
“이 거지 같은 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그게 너한테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벨져는 몸을 돌려 이 믿지 못할 광경을 전부 지켜본 인간들을 보며 말했다.
“얘가 니들을 지킬 유일한 구원자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떠받들어. 이 버러지 새끼들아.”
전대 마왕 벨시페르 사후 100년.
마계의 최강자가 흩뿌린 그 공포와 두려움의 흔적이 아직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인간들은 새로운 마계의 최강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붉은 눈에 담긴 굳건한 의지와 냉혹함.
권위적이고 진동적인 목소리.
마혈석에 뿜어지는 마력의 흐름이 냉기가 되어 인간들의 몸으로 퍼지면서, 그들은 느끼게 되었다.
자신들이 지금 살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지.
“얘가 죽으면, 니들도 다 죽는 거야.”
모든 인간들의 눈이 이윽고 시연에게 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