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91
제191화. 인간과 마족의 대면
혁명이든, 반란이든, 혹은 도전이든 간에,
거사라는 이름의 큰일을 치르기 전엔 가족 혹은 소수의 지인들에게 그 뜻을 알리는 것이 관례다.
허나 루백은 피를 나눈 가족에게도, 그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뜻을 알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무인 중 일부가 급하게 마크리아 평원으로 달려왔지만,
그럼 뭐하겠는가? 이미 당사자는 세상을 떠났는데.
루백의 시체는 메이를 통해 전했으며, 내 메시지도 같이 전달하게 했다.
날 원망해도 상관없고, 아버지이자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전하는 것도 얼마든지 받아주겠으나,
너희가 그토록 존경하는 이 루백이라는 남자를 최선을 다해 날 상대했고, 나 역시 최선의 예를 다해 그를 상대했다는 걸.
뭐 내가 암만 이런 말을 전해도 죽기 전에 남긴 그의 미소가 모든 걸 전해줄 것이다.
메이는 그들이 시체를 보자마자 대성통곡했고, 별다른 의사 전달 없이 조용히 돌아갔음을 전했다.
조금은 다행이었다.
본의 아니게 초월의 경지를 펼치다 보니 몸에 적잖은 무리가 오고 말았다.
싸움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지만,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에서 일을 억지로 하다 보면, 일을 그르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걸.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 어쭙잖게 도전을 걸면 그냥 힘 조절 못 해서 다 때려 부술 것 같다.
평원에 대자로 누워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저 하늘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또 쓸데없는 생각으로 이어지는가 싶던 차, 하늘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벨져님!]잠시 일을 시켰던 수호가 돌아온 것이다.
공중에서 연기를 일으킨 수호는 마족의 폼으로 변해 땅에 안착했다.
[다들, 예상하신 대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고 계셨습니다.]“그래? 어떤데?”
수호는 몸을 일으킨 내 앞으로 레지에타의 지도를 펼쳐 보였다.
[이사벨님이 넘어가신 타할 왕국은 이미 국왕인 바루타할 3세가 대표로 나와 마계 왕국에 속국을 청원했다고 합니다.]속국?
우리 마계에 왕국이 있었던가?
[이사벨님은 그들이 대충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서, 흔쾌히 받으셨다고 했습니다.]하기야 인간들 시선에서 마왕이라고 하는 군주가 있으니, 자연스레 그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도 있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근데 타할 왕국이 그리 군사력이 그리 나약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 그 여자가 작정하고 나서면 못할 게 없겠지.
수호는 보고를 이어갔다.
[다음으로, 세나님이 넘어가신 대륙 남부 해안지대는 세나님과 카리브디스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답니다. 이미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해신(海神)으로 추앙받고 있다네요.]“……왜?”
세나는 그렇다 쳐도 카리브디스는 솔직히 생긴 것 자체가 그냥 흉측한 놈인데, 오히려 해신보단 해악(海惡)에 더 가깝지 않나?
[흑마교회에게 듣자 하니 나루엔을 비롯한 남부 해안지대는 주기적으로 레지에타 성교회의 공물을 바치는 관례가 있었다는군요.]“응 그럴 거야.”
약 90년 전에 내가 그 지역에 나타난 해룡 마수를 물리친 이후부터 이어져 온 관습이다.
그 관습이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는 게 참 웃긴 일이지.
[하지만 그걸 들은 세나님이 그 공물을 자신에게 바치는 조건으로 지역민들의 생업인 어업과 해상무역을 허가해주겠다는 공표를 내리신 모양입니다. 본래 바치던 것에서 양도 1/10로 줄여주셨다네요.]즉 세금 줄이기를 했다는 뜻.
어느 세상이든 인간이라면 싫어할 수가 없는 최상의 공덕을 베풀어줬으니, 안 따를 리가 없다.
해신으로 모시는 것도 이해가 되네.
정작 그렇게 가져오는 공물들은 세나에게 아무 쓸모가 없겠지만…….
“그래서, 남은 한 명은?”
[아 루비아와 미켄님의 경우엔….]수호는 말을 살짝 얼버무렸다.
[자, 잘하고 계신다네요. 하하.]“똑바로 설명해라.”
수호는 옙 하고 표정을 고치며 다시 설명을 재개했다.
[검은 버섯, 하얀 보따리, 저녁 노을 등 레지에타의 굵직한 상단의 교역품들만 아니라, 불법으로 거래 중이던 인간 노예들까지 싹 다 회수 중이라고 합니다.]“뭐야 시키는 대로 잘하고 있네? 뭐가 문제인데?”
[회수한 노예 중 대부분이 젊은 남녀라는데, 자기들을 전부 마족으로 만들어서 마계로 데려가 달라고 요구한다네요. 아무래도 루비아와 미켄님께서 노예들의 정신을 좀 건든 모양입니다.]그럼 그렇지.
그 방탕한 남매들이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리 없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는 거네.
각자의 역할들을 아주 잘 수행해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당연하겠지만, 그녀들이 레지에타에 와서 이런 일들을 벌인 이유는 순전히 나 때문이다.
한 달 전, 메이를 마계로 먼저 보내서 인계를 재침공하고자 하는 내 의사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면서 내 의사를 따라줄 의향이 있다면 인계로 넘어와 달라고 했지.
그 세 명은 당연히 넘어올 거라 믿었다.
그들을 따라 같이 온 마족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았다는 게 의외였지만.
아무튼, 이거라면 레지에타 성교회와 그 우두머리에 있는 늙은이들에게도 적잖은 타격이 갔을 것이다.
본인들에게 자금줄을 대주던 주요 세력들이 전부 막혀버렸으니까.
나는 수호에게 다시 물었다.
“특별히 뭐 불편한 점은 없대?”
[아, 세 분 다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뭔데?”
[자기들 언제 보러 올 거냐고…….]나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자기들이 찾아가기 전에 빨리 와달라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이 여자들이 진짜. 지금 인계로 놀러 온 줄 아나?
[이건 궁굼해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내 구겨진 표정을 보며 곤란해진 수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다일 그자는, 아직 레지에타 안 온 듯합니다.]“내 뜻은 분명히 전했지?”
[예. 엄청 당황해하면서도, 고민을 꽤 하는 것 같았습니다.]“기다리다 보면 올 거야. 나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을 테니까.”
마왕이 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놈이,
이 좋은 기회를 지나치진 않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평원 위에 대자로 뻗었다.
* * *
레지타 대륙 서부 타할 왕국의 수도 바자루 왕성.
왕이 앉아야 있어야 할 왕좌에 왕은 없고, 대신 인계에 입성한 지 일주일 만에 타할 왕국을 헌납받은 이사벨이 다리를 꼰 채 앉아있다.
본래 주인이었던 국왕 바루타할 3세는 그녀 앞에서 몸을 조아리고 있었다.
매우 꼴사납게.
“꼴에 왕의 칭호를 달고 산다고, 집은 그럴 듯하게 꾸며놨네요? 내 저택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바루타할 3세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이사벨의 기분을 최대한 맞추고자 했다.
이사벨은 비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왕관을 빙빙 돌렸다.
굴욕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이미 속국을 청원한 마당에 달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처음 그녀가 타할 왕국에 등장했을 때, 나름 왕국의 정예 병력을 동원해 그녀를 제압하고자 했다.
허나 왕국이 자랑하는 정예 병력은 겨우 손가락 튕김 한 번에 소환된 정령에 의해 전부 무장해제됐다.
그 광경에 바루타할 3세는 뭔 짓거리를 해도 그녀를 물리칠 수 없을 거란 무력감에 빠졌고, 그래도 왕으로서 왕국의 백성들은 지키자는 마음에 그녀에게 나라를 바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할 왕국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에게도 한 가지 비장의 수는 남아있었다.
엎드린 채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투타할 3세의 머리통을 보며 이사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인계에는 용사라는 인간이 있다던데….”
흠칫 놀란 바루타할 3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마왕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죠? 정말인가요?”
“그, 그것이 용사는 아니옵고, 정확히는 용사의 후손인데, 용사의 힘을 내려받았다고 전해지곤 있습니다만, 일단 저희 왕국에는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죠?”
“대륙 동쪽에 있는 부르크 왕국에 있습니다!”
바루타할 3세는 후다닥 지도를 펼치며 부르크 왕국의 위치를 가리켰다.
“원래부터 부르크 왕국의 신민이었던지라, 저희 타할 왕국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부르크 왕국이라….”
입술을 어루만지며 흥미로운 표정을 짓던 이사벨은 문득, 이곳이 메이가 말한 벨져가 머물고 있는 마크리아 평원이 있는 곳임을 떠올렸다.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안내하세요.”
“예?”
바루타할 3세는 제대로 들었음에도, 본능적으로 되물었다.
“그 부르크 왕국이란 곳으로 날 안내하라고요.”
“서, 설마 만나시려는 겁니까? 용사의 후손을?”
“왜요? 내가 인간들이 믿고 있는 최후의 희망을 데리고 어떻게 할까 봐요?”
정곡을 찔린 바루타할 3세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참 속이 보여도 너무 잘 보이는 게, 꼭 그 남자를 보는 것 같네요. 안심하세요. 딱히 힘을 쓸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당신들 같은 하찮은 종족들이 희망을 거는 존재는 어떻게 생겼을지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니까.”
“이, 이사벨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바루타할 3세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곧장 부르크 왕국으로의 여정 준비를 시작했다.
* * *
‘타할 왕국을 점령한 이사벨이란 마족이 용사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부르크 왕국으로 향했다.’
바루타할 3세로부터 예통을 받은 레이든 왕자는 앉은 자리에서 서신을 찢어버렸다.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인간으로도 못 써먹을 벌레였군.”
적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도 모자랄 판에, 아예 마차에 태워서 모시고 온다?
아예 침공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서신에는 ‘순수하게 만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추가 내용도 적혀 있었지만, 이미 레이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레이든은 찡그린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고민에 잠겼다.
‘레이든 왕자.’
그때 머릿속으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벌떡 일어난 레이든은 급히 왕자로서의 체면도 잊은 채 왕성 지하로 달려갔다.
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현자들이 무표정으로 물었다.
“마족 한 명이 부르크 왕국으로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정령 마법에 능한 이사벨이란 이름의 여마족이라고 합니다.”
“원하는 게 차시연과의 만남이라지?”
아직 보고를 올리기 전이건만, 현자들은 이미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이내 자기들끼리 뭔가를 두런두런 얘기하는가 싶더니, 자선의 현자 카리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든 왕자가 자리를 만들어주시죠.”
“자, 자리를 말입니까?”
“싸움도 아니고, 평화적인 대화를 원한다는 데 안 될 것도 없지 않겠지? 그 자리를 잘만 이용하면 마족들의 목적도 알 수 있을 테고, 나쁠 건 없다고 보는데?”
현자들과 대화할 땐,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이든이 처음으로 목을 들었다.
“차시연은 아직 준비된 상태가 아닙니다! 미성숙한 상태로 마족들과 맞섰다간…!”
“그건 왕자가 걱정할 게 아닙니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목소리에 레이든은 다시 목을 떨궜다.
“레지에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이 용사의 의무예요. 왕자는 만들어놓은 자리에 차시연과 이사벨이란 마족을 같이 앉혀놓으면 되는 겁니다. 알겠어요?”
“지, 지고하신 순결의 현자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새 지시를 받은 레이든은 그대로 지하에서 물러나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영혼이 빠진 듯 넋 나간 그의 얼굴을 보며 수하들이 다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든 왕자님? 안색이 매우….”
레이든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부르크 왕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왕명을 내립니다. 지금 당장 마계의 마족, 이사벨 이뉘디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세요…….”
명을 전달한 레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명이 떨어진 지 약 이틀의 시간이 지나고,
“솔직히 좀 놀랐어요. 인간들한테 손님맞이 하는 예의가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물론 당신이 순순히 나타났다는 사실이 더 놀랐지만.”
“저를 원하신다는 데, 오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사벨과 차시연.
종족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른 두 여인의 대면이 부르크 왕국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