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95
제195화. 미안하다
100년 전, 레지에타.
마왕과의 1차 혈전에서 입은 부상을 회복한 시혁은 돌아오자마자 마왕군을 대파하며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이에 4명의 현자들이 가장 먼저 와서 그를 축하했다.
“역시 시혁 군이야! 우린 자네가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네!”
그때만 해도 현자들에겐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시기가 아니었기에, 시혁도 적극 받아줬다.
“제가 없는 동안 벨시페르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놀랍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자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거겠지.”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 엄청난 광기에 시혁은 혀를 내둘렀다.
그때, 돌아온 시혁의 몸을 쭉 훑어보던 순결의 현자 산테가 말했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크게 성장한 면모가 보이는군. 하지만 현실은 확실히 파악해야겠지. 어떤가? 지금이라면 마왕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시혁은 일말의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장담 못 합니다.”
“흐음. 그렇군….”
산테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세 현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산테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시혁 군. 이방인이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내 묻겠네. 자네는 본인의 목숨을 지키는 것과 이 세상 사람들을 지키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뭘 선택하겠는가?”
“질문이 좀 의미가 없네요?”
시혁은 우려와 다르게 무덤덤하게 답했다.
“제 목숨 하나만 지키려고 했으면,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훌륭한 대답이군.”
산테는 박수를 치며 시혁의 굳은 정신을 칭찬했다.
줄곧 눈치를 보던 자선의 현자 카리타스가 조심스레 나섰다.
“사실 우리도 여태 가만히만 있던 건 아니네. 우리도 나름 자네를 도와 마왕을 멸하는 데 일조하고자 힘을 좀 모으고 있었다네.”
“힘이요? 당신들한테 싸울 힘이란 게 있었습니까?”
비꼬려고 한 말이 아닌, 순전히 궁금해서 물은 말이었다.
이제껏 현자들은 마족과의 싸움에 직접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산테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우리는 창세신 레지에 여신님의 가호를 받아 레지에타 대륙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네. 고로, 여신님의 힘을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권한도 지니고 있지.”
“여신의 힘이요?”
“설사 자네가 마왕을 이기지 못해도 괜찮네. 그저 시간만 벌어주면 돼. 마왕이 자네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여신님의 힘을 인계로 끌어들일 테니.”
좋게 말하면 시간 벌이.
나쁘게 말하면 시혁을 미끼로 쓰겠단 뜻이었다.
허나 시혁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그 여신의 힘이란 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 겁니까?”
“어디까지라……. 혹시 예상 피해 규모를 물어보는 건가?”
“그 미친 마왕은 땅 조금 날려버린다고 해서 죽을 놈이 아닙니다. 못해도 그놈이 있는 마크리아 평원 전역은 날려야 할 텐데, 그 예상 범위 정도는 저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고작 마크리아 평원만 날릴 거였으면, 여신님의 힘을 굳이 쓰려하진 않았을 걸세.”
시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러면요?”
시혁의 되물음에 절제의 현자 모데스가 대륙 지도를 가져와 시혁의 앞에 펼쳤다.
마왕이 있는 마크리아 평원을 가리키더니, 아무런 말 없이 반경 10km 지름으로 원을 그렸다.
그 뜻을 이해한 시혁은 눈동자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당신들, 미쳤어?”
“어쩔 수 없네. 애초에 신의 힘을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네. 희생은 조금 있겠지만…….”
“조금? 그 영역에 주둔한 수만의 연합군이랑, 고립된 수십만의 민간인들이 당신들한텐 조금입니까?”
대충 의도는 이해했다.
대위소희(大爲小犧).
레지에타 대륙 전체를 위해, 조금의 인명 피해를 감수하자.
하지만 시혁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마왕 하나 잡겠다고, 수백만에 달하는 인간을 희생시킨다?
남들에게 그딴 희생을 강요하자고 돌아온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절대 안 됩니다. 여신의 힘인지 뭔지, 절대 쓰지 마십시오! 내가 허락 못 합니다!”
“그게 싫다면, 남은 건 자네 혼자 마왕을 쓰러트려 주는 수밖에 없네.”
“내가 하겠습니다! 내 몸을 열 번이라도 희생시켜서 벨시페르를 반드시 쓰러트릴 테니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대충 그쯤이지 않을까 싶었다.
시혁이 현자들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한 시점이.
그들은 절대 레지에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닐뿐더러,
“내가 죽기 전엔 절대 쓰지 마세요!”
철저하게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사는 이들이란 걸.
* * *
어디선가 이 광경을 보고 웃고 있을 늙은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잡쳐졌다.
허나 지금은 감정에 휘말릴 때가 아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걸 생각해야 한다.
“이사벨 님. 바람의 정령 좀 소환해주시죠.”
“바, 바람의 정령이요?”
“예. 제 몸을 공중으로 띄울 수 있는 거면 아무거나 좋습니다.”
이사벨은 급한 대로 바람의 정령 제피로스를 소환했다.
소환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으면 거친 숨을 토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가 소환할 수 있는 마지막 정령일 것이다.
“그, 그걸로 뭘 하려고요?”
“신경 쓰지 마시고. 다시 싸우시면 됩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저 위에 저거, 정체가 뭐예요?”
“뭐겠습니까? 저희를 싹 다 죽일 수 있는 병기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제피로스가 만든 요람에 올라탔다.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무언의 지시를 보내니, 제피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 위에 소환된 마법진을 향해 날아올랐다.
마법진 아래론 어느새 집채만 한 성력 덩어리가 응집되어 있었다.
저게 터지면 반경 10km는 쑥대밭이 된다 이건가?
답도 없는 위력이긴 하네.
가지고 있는 마력을 다 쏟아부으면 막을 수 있긴 하려나.
솔직히 내 마혈석을 포함해서, 남아있는 마력은 꽤 된다.
문제는 그걸 온전히 활용할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라는 거지.
투기를 집어삼킨 망할 용마족이 제대로 난동 부려준 덕이다.
[무리입니다 벨져 님! 지금 몸 상태론 불가능합니다!]뒤늦게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수호가 정신감응을 보냈지만, 그런다고 그만둘 내가 아니다.
-치이익
나를 태운 제피로스의 몸에서 연기가 일었다.
성력의 근원체에 가까워지면서, 마력으로 소환한 정령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제 됐어.”
나는 제피로스가 만든 요람에서 내려 근원체를 향해 비상했다.
뛰는 동시에 세 마혈석에 남은 모든 마력을 마검 아크베리아에 전승했다.
그동안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붙여서 힘 조절을 해왔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험악한 마계 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랜 시간을 발버둥 쳐온 너희의 힘을 전부 뽑아내서, 저 성력이란 이름의 구역질 나는 힘을 싸그리 소멸시키길 바란다.
마력이란 이름의 힘이여.
* * *
-쿠구구궁
맑은 하늘에 요란하게 울리는 천둥소리.
물론 천둥소리는 아니었다.
이 소리는 두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력과 마력 두 개의 힘이 격돌하면서, 마크리아 평원 전역에 울려 퍼진 소리였다.
그 엄청난 광경에 인간, 마족 할 것 없이 모두가 넋을 놓고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마족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만약 벨져가 아니, 마력이 저 성력을 멸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임을.
반면 유일한 인간인 시연은 다른 생각을 했다.
성력이 이기건, 마력이 이기건 간에 상관없이,
저 충돌이 끝나고 나면 벨져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안 돼…!”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부정의 한마디를 뱉었다.
저 남자를 저대로 보내선 안 된다.
아직,
아직 듣지 못할 말이,
꼭 그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할 말이 있는데,
이대로 사라져버린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하지만 시연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남들처럼 막연히 지켜보면서 저 충돌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할 뿐.
한데 어째서일까?
지금 시연이 본 벨져의 모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짜 검사도,
마왕의 권좌에 가장 가까운 무자비한 마족도 아닌,
모두를 지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가 뚜렷하게 보이는,
한 명의 용사로 보였다.
-콰콰쾅!
마침내 충돌의 끝을 알리는 격한 폭음과 함께 빛이 터지며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 아래로 쏟아지는 무수한 파동들.
[위험합니다!]수호는 재빨리 근처에 있던 메이와 이사벨을 몸으로 감싸서 보호했다.
“이쪽으로 와라 페르!”
다일 역시 마력 보호막을 생성해 자신과 페르를 감쌌다.
차마 보호의 영역에 들지 못한 시연은 급한 대로 성검을 땅에 꽂은 채 파동을 버텼다.
“하아, 하아….”
내면에서 아련히 울려 퍼지는 숨소리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빛과 자욱해진 안개로 인해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시연은 일단 성검을 지지대 삼아 앞으로 나가 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벨……져?”
모든 힘을 소진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벨져였다.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아직 죽진 않았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시연은 주저 없이 다가가 벨져의 앞에 섰다.
꿈틀거리는 벨져의 손 옆엔 아직 희미한 마력의 빛이 번들거리는 마검이 자리했다.
시연은 마검을 보다 말고, 자신의 아크베리아를 보았다.
“…뭐야?”
검을 부딪칠 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이 두 개의 검.
같은 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형태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마치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검을 본뜬 것처럼.
“어째서?”
그동안 억눌러왔던 의문과 감정이 끝내 폭발해버린 시연은 정신을 잃은 벨져의 멱살을 쥐며 일으켰다.
“대체 뭐야! 당신 대체 뭐냐고!”
격한 물음에 정신을 차린 벨져가 기침을 토했다.
서서히 떠지는 두 눈.
이미 피가 터질 대로 터진 얼굴엔 핏물이 가득했다.
“…없다.”
가냘픈 숨소리 안으로 들려온 속삭임.
시연으로선 아직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지금 아니면 없다고.”
“없긴 뭐가 없다는 거예요! 알아듣게 설명해!”
“지금 아니면 나 죽일 기회 없다고…….”
모든 힘을 소진하고 완전 무방비한 상태가 된 지금.
지금이 아니면 자신을 죽일 기회가 없음을 벨져는 손수 인지시켜주었다.
시연은 잠시 넋이 나갔다.
“죽여? 내가 당신을 죽여주길 바라는 거예요?”
“바란다기보단, 네가 해야 하는 일이잖아. 마왕을 죽이고 인계를 지키는 거. 그게 용사의 소임이야…….”
“난 아직 당신이 누군지 듣지 못했어!”
“이미 다 알았잖아. 마왕의 후손…….”
“그거 말고!!!”
시연은 멱살을 한 번 더 쥐고 흔들었다.
“나한테 말하려고 했던 당신의 진짜 정체가 있잖아요! 그걸 말해달란 말이에요! 당신은 나한테 뭔지! 나한테서 당신은……!”
시연의 눈을 타고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뭔가가 흘러내렸다.
“어떤 존재인지…….”
벨져는 한숨을 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다음엔 핏물이 뚝뚝 흐르는 손으로 살며시 시연의 얼굴을 매만졌다.
핏물 너머로 전해진 뜨거운 온기에 시연의 심장이 격하게 요동쳤다.
“미안하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린 한마디.
“너희를, 그리고 너를, 이런 식으로 살게 해서…….”
또다시 넋이 나간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사과하는 것인가?
대체 뭐가 미안하다고?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것에 그가 무슨 일조를 했다고?
벨져의 진심을 들었음에도 시연은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벨져 님!]마족 폼으로 돌아온 수호가 시연에게 붙들린 벨져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시연은 대처하지 못했고, 그대로 벨져를 놓쳐버렸다.
[일단 여길 벗어나겠습니다!]벨져가 대답할 새도 없이 수호는 날개를 펼쳤고,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이내 빛과 안개가 사그라지며 시야가 바로 잡히기 시작했고,
다시금 마크리아 평원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그 평원에 자리한 이는 오로지 시연 혼자였다.
벨져도, 벨져를 지키고자 했던 그 일행들도,
벨져를 죽이고자 했던 다일과 페르도,
그들에게 조종당했던 그룸과 마수들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털썩
급 허탈감이 밀려온 시연은 무릎을 꿇었다.
곧 자신의 오른손에 뭔가가 잡혀있음을 깨닫고선 바로 눈을 돌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펜던트.
그것은 조금 전 수호가 벨져를 낚아챘던 그 순간, 얼떨결에 시연의 손으로 들어와 버린,
유리스의 펜던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