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96
제196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수호와 일행들은 부상당한 벨져를 데리고 루비아 남매가 자리를 잡은 체플리카 산맥으로 이동했다.
용마족과의 1차전을 끝내고, 정비 중이던 몽마족들은 벨져의 상태를 보고선 다들 기겁을 금치 못했다.
물론 가장 놀란 건 루비아였다.
“미쳤어! 미쳤어! 벨져가 이 지경이 될 동안 너흰 뭘 한 거야!”
유구무언(有口無言).
그저 자신들이 부족했단 것 외엔 할 말이 없었다.
벨져는 정상적이지 않은 몸으로 혼자 성력과 맞섰고, 결과적으론 밀어내는 데 성공해 모두를 지켜냈다.
한때는 대륙의 악명 높은 노예 상단의 은신처였으나, 지금은 루비아 남매의 거처가 된 동굴에 벨져는 몸을 눕혔다.
몸이 워낙 고단했는지 오는 동안 잠자고 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보기 드문 무방비 상태의 벨져를 보며 모두가 조마조마하는 사이,
이사벨만은 혼자 침중한 얼굴로 고심 중이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주겠어요?”
벨져를 제외한 모두에게 전한 말이었다.
벨져의 얼굴을 쓰다듬던 루비아가 발끈하며 일어섰다.
“이게 지금, 벨져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딜 뻔뻔하게…!”
“너는 남아줘. 루비아.”
루비아는 순간 멈칫했다.
복잡한 감정이 서린 이사벨의 눈에서 어떤 결의를 본 것이다.
다른 이들은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이에 동굴엔 이사벨과 루비아, 그리고 벨져만이 남게 되었다.
이사벨이 바로 말했다.
“루비아…….”
“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폼을 잡아?”
“너. 예전에 벨져의 꿈을 들여다보고 싶다 했지?”
“그러긴 했지. 근데 그건 왜?”
이사벨의 시선은 벨져의 감긴 눈을 시작으로, 그 옆에 자리한 아크베리아에게 이어졌고, 마지막으론 루비아의 가슴에 달린 마혈석으로 향했다.
“그 꿈……. 어디까지 볼 수 있어?”
* * *
몇 시간 후.
“후…….”
눈이 뜨이기 전에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벨져는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훑었다.
익숙한 동굴.
허나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눈뜨자마자 이런 거, 저런 거 설명할 바에야, 차라리 이렇게 홀로 쉬는 게…….
“벨져.”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통로 쪽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벨져는 고개를 돌렸다.
썩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살아있었네?”
“당신 덕분이죠. 그 무지막지한 힘을 잘도 혼자 막으셨더군요.”
다일은 터벅터벅 걸어와 벽에 기대고 앉은 벨져 앞에 섰다.벨져는 심장 쪽을 움켜쥐며 옆에 있는 아크베리아를 잡았다.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과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요.”
“이제 와서?”
“마왕이 될 자격이 없는 자와 힘을 겨룰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벨져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당신과 차시연이 나눈 대화를 들었습니다.”
벨져의 입꼬리가 다시 슬며시 내려갔다.
“사과하셨더군요. 마왕의 후손이, 용사의 후손에게…….”
그 모깃소리 같은 속삭임을 들었다는 게 대단할 따름.
벨져는 딱히 부정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당신의 일행들은 다시 날뛰기 시작한 용마족들을 진압하고자, 전부 출동한 상태입니다. 즉 이 동굴 안엔, 당신과 저 둘밖에 없다는 거죠.”
“설마 그 답 없는 용마족 우두머리도 데려왔냐?”
“그룸 후보라도 있어야지. 시간 벌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익숙한 포효 소리가 들린 게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당신은 벨져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마왕의 후손이 아닌 거죠.”
“그래? 그럼 난 뭘까?”
“한술 더 떠서, 마족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일의 시선은 벨져의 손에 쥔 마검으로 향했다.
“벨져라는 마족의 몸에 기생한 또 다른 영혼……. 그게 아니고서야 당신이란 존재는 설명이 안 됩니다.”
“계속해봐.”
벨져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일의 말을 받아쳤다.
다일은 잠시 미간을 좁히며 뜸을 들였다.
“용사 차시혁.”
벨져의 입꼬리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채 딱 중간에 머물렀다.
“그게 당신의 진짜 정체겠지요…….”
밝힐 생각도 없었고, 밝혀봤자 좋을 일도 아닌 불편한 진실.
언젠가 이 진실이 남의 입을 통해 듣게 될 날이 온다면, 그때는 마족으로서의 삶이 온전치 못할 것임을 벨져는 항상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상황에 직면하고 나니,
“그런가 보지 뭐 그럼.”
썩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원하고 통쾌한 기분이 앞섰다.
예상보다 덤덤한 모습에 다일은 더욱 미간을 좁혔다.
“스스로 인정하시는 겁니까?”
“인정이고 말고를 떠나서, 나도 하나만 물어볼게.”
검을 짚고 일어난 벨져는 엉덩이를 털었다.
그러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다일을 근거리에서 물어봤다.
“이 몸뚱이 안에 누가 들었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나마 유지된 다일의 어두운 낯빛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당신의 동료들이 진실을 알면, 그걸 납득해 줄 것 같습니까?”
“그럼 가서 말해보던지. 그냥 마계 전역에 소문내. 믿어줄 마족이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객기 따위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이쯤 오니, 벨져는 정말로 상관없었다.
“내가 전생에 뭐였든 난 지금 엄연히 마족이야. 마족으로서 내가 할 일은 마계의 평화를 위해 투기라는 기운을 소멸시키고, 마왕이 되는 거지. 그걸 하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단 걸까?”
“마계에 수치의 역사를 가져다준 장본인이 마왕이 된다니! 그건 이뤄져선 안 될 일입니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우면 여기서 날 죽여.”
벨져는 검을 어깨에 걸친 채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일을 도발했다.
“알다시피, 지금 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야. 날 도와줄 이들도 없지. 그러니 정령 마법이든, 계약 소환이든 할 수 있는 거 다 해봐. 근데 내가 장담하는데, 네가 뭔 술수를 부리든, 난 그것들 전부 짓밟으면서 여기까지 왔어. 아마 어지간한 건 안 통할 거야.”
다일은 그동안 마왕이 되기 위한 수많은 준비를 해왔었다.
여섯 종주를 비롯한 이름난 강자들이, 어떤 능력을 다루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자신을 다룰 수 있는지 등.
그것이 깨끗한 길이든, 더러운 길이든, 자신의 취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다일은 한 가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같은 권좌를 노리는 단순한 경쟁자인 줄만 알았던 벨져가,
그 권좌에 앉은 전대 마왕을 넘어선, 이 두 개의 하늘 아래 더 이상 적수가 없는 최강자의 경지에 이른 존재라는 사실을.
“그러니 선택해.”
벨져는 마지막으로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나랑 완전히 끝장을 볼지, 아님 그냥 꺼지고 내 눈앞에 다신 안 나타날지…….”
* * *
하늘 아래 무서울 것 없고, 거칠 것도 없이 살아온 마족 중에서도 최강의 혈통을 자랑하는 용마족.
허나 용마족도 결국은 드래곤이라고 하는 상위 종족에 의해 탄생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흐으으…….”
투기에 잠식되었을 땐 눈앞에 있는 게 뭐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픈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다른 마족들과의 전투로 투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니, 용마족들은 그제야 자신들 눈앞에 군림한 상위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다.
[레지에타에 있는 전 용마족에게 전합니다.]수호는 체플리카 산맥에 주둔한 용마족들을 비롯해, 인계로 넘어온 전 용마족들에게 정신감응을 전했다.
[당장 싸움을 멈추고, 전부 마계로 돌아가세요.]피조물들로선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상위 존재의 지시.
대부분의 용마족들은 감응을 듣자마자,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용마족 주술사에게 달려가 돌아갈 문을 열 것을 재촉했다.
머지않아 레지에타 곳곳에 나타난 용마족들이 귀환 길에 올랐고,
마지막으로 남은 그룸은 이를 박박 갈며 공중에 뜬 수호를 노려보았다.
잠시나마 몸을 지배했던 어둠의 정령은 이미 소멸시킨 지 오래.
식탁의 종주로서 최후의 자존심은 유지하고자, 아득바득 버티려 했지만,
-후웅!
지시를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수호가 가까이 다가오려 하니,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열려 있는 게이트를 통해 마계로 도망갔다.
수호는 피식 웃으며 다시 마족의 폼으로 돌아왔다.
“대단하세요 수호 님!”
메이가 가장 먼저 달려와 감탄을 표했다.
[용마족들의 투기가 약화되도록 여러분이 시간을 벌어주신 덕입니다. 저는 한 게 없어요.]수호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뺨을 긁었다.
“다들 고생했어~!”
루비아는 고단했던 싸움을 버텨준 일족원들의 등을 손수 다독여주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사벨 또한 암벽에 홀로 기댄 채, 눈을 감으며 숨을 토했다.
“뭐야 벌써 다 끝났어?”
뒤늦게 동굴 밖으로 나온 벨져는 이미 끝나버린 상황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깜짝 놀란 이사벨이 바로 벨져에게 달려갔다.
“벌써 일어난 거예요 벨져? 몸은요? 괜찮아요?”
“네, 뭐. 보시다시피….”
아직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벨져는 양팔을 훙훙 돌리며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곧이어 메이와 수호, 루비아도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일어났어 벨져~?”
와락 안으려는 루비아를 벨져는 몸을 틀어 회피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것에 뾰로통해진 루비아는 볼살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왜!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애정 표현은 해도 되잖아?”
“아까 저 잠자는 동안 실컷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머~! 다 알고 있었어? 깨어있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앙큼한 구석이 있었네 벨져?”
대꾸해봐야 좋을 게 없기에, 벨져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 대신,
-덥썩
벨져는 루비아의 손을 먼저 잡았다.
루비아는 흠칫 놀라며 어안이 벙벙한 반응을 보였다.
“베, 벨져?”
“저 대신 용마족들을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용마족들을 친히 이끌고 레지에타로 와서 용마족들과 싸워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루비아는 얼굴을 붉히며 부채질하는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이다가도 애써 웃으며 말했다.
“뭐,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우리 벨져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거지~!”
우리라는 말이 아까부터 거슬린 이사벨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딱히 제지하지 않기로 했다.
세 남녀는 그렇게 서로를 보며 허울 없는 미소를 지었다.
* * *
머지않아 나루엔 해안지대를 지키던 세나 쪽에서도 용마족들이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
허나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늦은 밤, 체플리카 산맥 꼭대기에서 달을 올려다보는 벨져의 뒤로 이사벨이 다가왔다.
“혼자 사라지는 게 취미예요? 벨져가 안 보이면 다들 걱정하게 된다니까요?”
“용케 저 있는 곳을 찾아오셨군요.”
이사벨은 빙긋 웃으며 벨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몸 상태는 어때요? 전에 흡수했던 투기가 또 날뛰거나 그럴 것 같지 않나요?”
“그건 괜찮습니다. 다 극복했습니다.”
“흐음. 그 용사의 후손이라는 인간이 꽤 도움이 됐나 보네요?”
벨져는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왜 안 보셨습니까?”
“뭐를요?”
“제 꿈 말입니다. 아까 루비아 님이랑 제 꿈을 들여다보려고 하셨던 거 아닙니까?”
“어쩐지. 아까 루비아가 손댄 것도 기억하고 있더니만….”
한숨을 푹 내쉰 이사벨은 다시 밤하늘의 달을 바라봤다.
“내가 알면 안 되는 비밀 같은 거라도 있나요?”
“딱히 죽을죄를 지은 건 없습니다.”
“그럼 됐죠 뭐.”
루비아는 말했다.
자신이 가진 몽마족의 힘을 이용해 벨져의 꿈을 본다면, 그가 거쳐 온 모든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을 거라고.
이사벨은 그렇게라도 알고 싶었다.
자신이 아는 지금의 벨져가 있기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하지만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솔직히 그렇게라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사실이에요. 어차피 직접 물어봐야 돌아올 대답은 뻔할 테니까.”
“절 너무 잘 아시는군요.”
“몇 번이고 말했잖아요. 당신은 속을 알기 너무 쉬운 남자라고.”
벨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여자는 대체 어딜 보고서 자신의 속이 보인다고 한단 말인가?
“과거에 뭘 했든, 누구였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벨져는 내가 인정하고, 마음을 준 유일한 남자란 사실엔 변함이 없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쭉…….”
이사벨은 부드러운 손길이 슬며시 벨져에 닿았다.
“내 옆에만 있어 주세요. 난 그거면 돼요.”
멋쩍은 마음에 벨져는 딴 곳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귀여움을 느낀 이사벨은 히죽 웃으며 이번엔 손가락 벨져의 가슴골을 쓸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우리 계약한 거 있잖아요. 모든 일이 끝나면 입맞춤의 다음을 이어가기로 한 계약 말이에요. 난 여기서 해도 좋을 거 같은데?”
“아직은 이릅니다! 일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닌….”
가슴을 자극하는 이사벨의 손길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어?”
벨져는 곧 자신의 목에 걸려 있어야 할 뭔가가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사벨 님?”
“왜요?”
“혹시 지금 제 목에 펜던트가 걸려 있습니까?”
“펜던트요?”
이사벨은 얼떨결에 벨져의 목과 가슴을 확인해 봤지만,
“없는데요?”
브릴리스가 주었던 유리스의 펜던트는 이미 벨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