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01
제201화. 용사는 마왕이 되려 한다
레지에타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현자들의 집권기가 끝났지만, 정작 그들의 생존 여부조차 몰랐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왔던 각국의 군주들은 달랐다.
처음엔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환호했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선, 군주들의 마음속에 작은 불안의 싹이 텄다.
현자들이 온갖 부당한 횡포와 악행을 저질렀다곤 하나, 그들이 인간들의 힘을 억누른 절대적 통제자였단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허나 그 통제자가 사라진 지금, 이때다 싶어 힘을 드러내려는 세력들이 나타나진 않을지 혹은,
현자에서 이름만 바꾼 또 다른 통제자가 나타나진 않을지.
결국,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각국의 대표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열성적인 토의가 오갔던 이전 회담과는 다르게, 회담장엔 침묵만 감돌았다.
그러면서 시선은 전부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뭐라 말 좀 해보시오 레이든 왕자.”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타할 왕국의 대표, 바루타할 3세가 입을 열었다.
레이든 왕자는 팔짱을 낀 자세로 눈을 감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무엇을 말해달란 겁니까?”
“애써 모른 척하지 마시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무엇을 듣기 위해 왔는지, 이미 레이든 왕자도 다 알지 않소?”
각국 대표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후손. 아니, 차시연은 어디에 있소?”
“모릅니다.”
회담장 내에 탄식이 쏟아졌다.
“찾아서 데려와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디에 있는지만 알자는 것이지 않소? 부르크 왕국에 있는지, 아님 다른 나라에 있는 건지. 마왕을 물리친 그녀의 소재 파악 정도는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소?”
계속되는 추궁에 레이든은 역으로 되물었다.
“차시연이 두려우십니까?”
다시금 이어진 침묵,
불편한 헛기침 끝에 바루타할 3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렵다기보단, 그냥 좀 조심할 필요성은 있다는 것 아니겠소? 자칫 그 후손도 선조처럼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바루타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든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100년 전에도, 지금에도 용사는 그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했습니다. 아니었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젠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지킬 때입니다. 차시연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그만 레지에타의 미래를 위한 이야기 좀 나누시죠.”
회담은 그렇게 레이든을 주축으로 재개되었다.
각국의 대표들 또한 차시연과 관련된 이야기는 접은 채, 국내 정세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국가의 방향성 등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시간에 걸친 회담이 끝나고, 회담장을 나온 레이든을 한 기사가 맞이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왕자님.”
레이든 기사의 말에 응하려다 말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기사는 투구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잠시 왕자님의 수발을 들까 해서 왔습니다.”
기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차시연이었다.
“못 본 사이에 이상한 취미가 생겼구나.”
레이든은 어이없는 마음에 씨익 웃다가도 시연과 함께 길을 나섰다.
“루백 님의 장례는 잘 치렀느냐?”
“예. 좀 늦었긴 해도, 무인들과 함께 미련 없이 보내드렸습니다.”
“루백 님 같은 분이 왕국에 아니, 대륙에 좀 더 많았더라면, 레지에타의 미래가 좀 더 빠르게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구나.”
“지나간 일을 후회하셔 봤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미래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분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레이든과 시연은 동시에 피식 웃고 말았다.
“각국 대표들이 저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혈안이라고 들었습니다.”
“나쁠 게 생각할 것 없다. 신까지 제압한 마왕을 물리친 용사를 환영하지 않을 나라가 어디 있겠느냐? 하나같이 너를 본인들 나라로 데려가, 귀속시킬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시연은 부르크 왕국을 포함해 어디에도 귀속할 생각이 없었다.
레이든 왕자가 제안한 작위와 영토도 모두 거절했으며, 부나 명성에 대한 욕심 없이, 레지에타에 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고자 했다.
“그래서, 너의 마음은 정한 것이냐?”
“애초에 정해야 할 마음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떤 일을 하면서 살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은 좀 더 돌아볼 생각이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깨닫기 위해.
“혹여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돌아오거라. 너의 자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왕자님께서도 앞으로 바빠지시지 않겠습니까? 이젠 정말 왕자로서의 책무를 수행하셔야 할 테니까요.”
“왕자로서의 책무라……. 아 그러고 보니 이거 돌려주는 걸 잊었구나.”
발을 멈춘 레이든은 망토 속, 허리춤에 있던 검 한 자루를 풀어 시연에게 건넸다.
현자들에게 받았다가, 도로 빼앗겼던 성검 아크베리아였다.
현자들의 아지트였던 왕성 지하 광장에 보관되어 있던 걸, 레이든이 회수한 것이었다.
“이걸 왜 제게?”
“용사의 검을 용사에게 주는 건 당연하지 않느냐? 애초에 너 말곤 이 검을 제대로 다룰 사람도 없다.”
시연은 얼떨결에 검을 돌려받았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에 그 검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구나.”
시연의 생각은 반대였다.
오히려 이 성검이 가진 힘을 또 쓸 일이 앞으로 없길 바랐다.
그거야말로 대륙에 또 다른 위험이 찾아왔음을 증명하는 일이니.
“또 뵙겠습니다.”
검을 받은 시연은 더 머무르지 않고, 그 길로 레이든을 떠났다.
레이든은 멀어지는 시연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라…….”
자고로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존재는 없으며, 저마다 마땅히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본인이 수행할 수 있는 그 역할의 정도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
마왕을 물리치고 인계 제일의 강자가 된 그녀가 앞으로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만이 할 수 있고, 그녀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을 찾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임을,
레이든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 * *
레이든 왕자와 헤어진 시연은 이후 마크리아 평원에 도착했다.
평원을 지나, 절벽을 내려가,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 지대에 입성한 시연은 살면서 몇 번이고 찾아왔던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용사와 마왕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는…….
“두 달 만인가?”
시연은 늘 그래 왔듯, 오자마자 주변을 정돈했다.
혹시나 찾아오는 이가 있진 않을까 정리하면서도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작은 기척조차 없었다.
시연은 먼지가 쌓인 기념비를 닦아내며 아련히 속삭였다.
“살아는… 계신 겁니까?”
시연의 일격을 정면에서 맞아준 벨져는 마지막을 몇 마디를 남기고선 눈을 감았다.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아내려는 그때, 벨져의 등 뒤로 낯선 게이트가 생성되었고, 벨져는 그 속으로 빠르게 휘말리면서 순식간에 시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시연도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눈들이 지켜보는 그 상황에서, 용사의 검이 마왕의 몸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만큼 확실한 연출도 없었을 테니.
하지만 정말로 그게 최선이었던 걸까?
좀 더 모두가 좋아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진 않았을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후손에게 온갖 의문과 괴로움을 남겨주는 것이 정말로 옳은 선택이었을까?
만약 벨져를 한 번 더 만나게 된다면,
시연은 이 말을 꼭 묻고 싶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기념비에서 등을 돌렸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의 집.
사할리스에 나타난 도적들을 토벌하겠다고 떠난 이후 한 번도 들르지 않았으니, 거의 석 달만의 방문이었다.
그동안 먼지도 쌓일 만큼 쌓였을 테니, 청소를 위해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싶었다.
석 달이나 자리를 비웠음에도 다행히도 집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 경계심 없이 문고리를 잡은 시연은,
“……어?”
문고리 너머에서 느껴진 낯선 기척에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안에…… 있어?”
평소라면 경계심을 잔뜩 곤두세운 채로 검을 뽑았겠지만,
-벌컥!
시연은 1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왠지 모를 향긋한 냄새가 시연의 코를 감싸 안았다.
긴 시간 자리를 비웠음에도, 집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시연은 움직일 생각도 못 한 채 멍한 눈으로 집안을 둘러봤다.
-저벅
그 순간, 침실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연은 고개를 돌렸다.
“왔냐 후손아?”
무심하면서도 온정이 느껴지는 익숙한 목소리.
이 세상에 이런 어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니, 마족은 단언컨대 한 명뿐이었다.
“좀 많이 늦었구나.”
벨져.
한 달 내내 레지에타를 돌아다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는 다름 아닌 시연의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감정이 모여들면서, 어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연은,
“참으로 짓궂으시네요.”
결국, 소탈하게 웃는 쪽을 택했다.
“물어볼 말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선조님 얼굴을 보자마자 다 까먹어버렸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럼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거 하나만 물어봐.”
시연은 고민의 시간 없이 바로 물었다.
“혹시 사념이십니까?”
“똑바로 살아있는 실체니 안심하려무나. 사념이 청소하는 거 봤니?”
벨져는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유로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문득 지난날의 마음고생이 떠오른 시연은 벨져를 바로 나무랐다.
“작은 언질 정도는 해주셔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잘못되신 줄 알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원래 연극은 마지막에 극적이어야 여운이 남는 법이거든. 너도 이런 순간을 바라지 않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반겨주는 거.”
시연은 부정하지 못했다.
결국, 반박하기를 포기하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검에 당한 상처는 괜찮으신 겁니까?”
“문제없어. 인간과 다르게 마족은 신체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몸이 관통당해도 삼일이면 자연 회복되거든.”
실로 사기적인 종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그 게이트는…?”
“메이랑 수호 걔네 둘이 연 거야. 내가 쓰러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게이트를 만들라고 했었거든.”
“참으로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셨네요.”
씨익 입꼬리를 올린 벨져는 그대로 시연을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가시는 겁니까?”
“가야지. 저쪽 세상에서 내가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난 아직 거기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해야 할 일.
이것만큼은 시연도 벨져에게 묻고자 했다.
“이 세상에서, 전 뭘 해야 할까요?”
벨져는 고개를 쓱 돌리며 대답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고민할 필요가 없는 대답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남이 정해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에.
시연은 잠시 멍을 때리다가도, 벨져의 말을 이해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방향을 정해줄 순 있어도, 그 길로 가겠다고 정하는 건 너야. 나도 그래왔고. 레지에타를 지키는 용사가 되는 것도, 마계의 평화를 이룩하는 마왕이 되는 거도 전부 내가 정하고 결정한 일이야. 그러니 조금이라도 마음이 간다면, 네 마음대로 따라가.”
“레지에타를 지키는 일 말입니까?”
“그게 네 마음이 이끌리는 일이라면…….”
하지만 벨져 입장에선 별로 권하고 싶진 않았다.
한 번 겪어본 입장에선 그 길이 얼마나 힘들지 않기에.
벨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복잡한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힘들 거야. 너의 보호를 이 인간들은 고마워하긴커녕, 오히려 더 많은 걸 요구하겠지. 외롭고, 쓸쓸한데,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어. 오로지 너 혼자만 감당해야 할 일이야. 그래도 할 수 있겠어?”
시연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일을 세상이 원한다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밖에 할 수 없다면 더더욱 해야 할 테고요.”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벨져는 끝내 시연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직 전하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다 해봐야 별로 의미는 없을 것 같기에,
딱 하나의 말만 전했다.
“행복해라 후손아…….”
포옹을 받아들인 시연도 답을 전했다.
“선조님도 행복하세요…….”
마지막 교감을 마친 벨져는 그렇게 시연의 몸에서 떨어졌고,
그대로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집 밖으로 나온 벨져를 반겨준 것은 인계의 푸른 하늘이 아닌, 마계의 붉은 하늘이었다.
그리고 눈앞으로 보이는 수십 명의 익숙한 마족들.
전부 그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소중한 이들이었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벨져 님?”
메이가 대표로 나와 벨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 좀 늦었지?”
벨져는 늘 했던 것처럼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뭘 하실 건가요?”
“레지에타의 일도 다 끝내고 왔으니, 이제 원래 하려던 일을 해야지.”
용사 차시혁으로서가 아닌, 마족 벨져로서 이 세계가 원하는 일.
이제는 그 일을 끝마칠 차례였다.
“마왕이 되는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