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48
제48화. 하필 골라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초라하게 정문을 나서는 페르.
그는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벨져의 저택을 돌아보았다.
“벨져…….”
후보로서의 존칭이 아닌, 개인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부름이었다.
눈빛 역시 예의를 한껏 차린 좀 전과 달리, 지금은 경계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검 자루를 쥔 손은 언제라도 그 검을 뽑고, 다시 저택으로 질주할 듯한 기세였지만,
페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본연의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에 다시 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페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벨져는 그 모습을 저택 창문을 통해 전부 지켜 보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 * *
놈이 집을 나가고, 내 눈에서 안 보이기까지 걸린 시간 약 5분.
정상적인 걸음이라면 절대 맞출 수 없는 속도다.
한시라도 빨리, 제 주인에게 보고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 건진 몰라도,
뭐 떠난 이상 이젠 내 알 바 아니다.
불만 있으면 주인이랑 같이 오라지.
그렇게 생각하고 이만 창문에서 몸을 돌리자,
“아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부동의 자세로 나를 보고 있는 세 여자들.
하나같이 의문에 휩싸인 눈들을 하고 있었다.
“괜찮겠어요? 다일 후보의 퍼밀리어를 저렇게 보내도?”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용건 있으면 직접 와야지. 왜 굳이 퍼밀리어만 혼자 보낸답니까?”
이사벨의 걱정 어린 물음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검을 배우러 왔다고?
그래 뭐 솔직히 못 해줄 건 없다.
끽해야 검 몇 번 부딪혀서 대충 받아준 척하면, 그 페르라는 놈의 경지가 어디까지인지 대강 파악할 수 있으니, 나로서도 나쁠 건 없지.
문제는 나라는 적을 상대로 배움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지만, 적한테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하는 뻔뻔한 경우는 정말 세계를 세 번 거치면서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등신도 아니고, 뭐 하러 적이 좋아할 일을 해주겠는가?
그 교만의 종주란 놈은 지 퍼밀리어가 검을 배우러 왔다고 하면, 내가 정말 좋다고 응해줄 줄 알았던 건가?
뭔 자신감이지 대체?
이미 지나간 일 돌이켜 봐야 뭐하겠는가?
나는 그녀들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자 떠난 마족 얘기는 이쯤하고, 이제 우리 일 좀 합시다. 내가 부탁한 거 준비됐어, 브릴리스?”
“아, 예 그렇습니다!”
접견실로 들어서기 전, 브릴리스에게 부탁을 하나 했었다.
브릴리스는 미리 준비한 커다란 지도 한 장을 꺼내 탁자 위로 펼쳤다.
마계 대륙의 전역이 세세히 그려진 지도였다.
지도 곳곳엔 눈에 띄는 하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각 후보의 거주지를 표시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일단 벨져 님과 이사벨 님의 거처까지도 표시는 해놨습니다만…….”
동그라미는 총 여덟 개.
이중 나와 이사벨의 거처를 빼고, 내가 실질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총 여섯 곳이라 봐야겠지.
“정말로 찾아갈 생각인가 보네요.”
“저라고 가만히 앉아서, 손님만 맞이할 순 없지 않습니까? 제가 직접 손님도 되어 봐야죠.”
“벨져 님은 우선적으로 어딜 가보고 싶으신가요?”
메이의 물음에 나는 턱을 괴고 지도를 쭉 훑어보았다.
일단 나와 개인적인 접촉이 있었던 탐욕, 색욕, 그리고 교만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부터 우선적으로 추려볼까 하는데…….
“살짝 조언하자면 분노, 나태, 식탐. 이 세 종주의 거처를 찾아가려면 꽤 고생 좀 해야 할 거예요. 보다시피, 여간 험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 세 곳을 먼저 가려고 했습니다만…….”
“기가 막히게 힘든 곳만 골랐네요.”
이사벨은 그것도 재주라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참고로 그 세 곳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의 거처는 우리 집에서 하루, 이틀이면 갈 수 있을 만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뭐 그래. 멀다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험준한 산악지대, 매일 같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역병의 근원지 등.
하나같이 험난한 지역이란 것까지도 이해할 수도 있어.
근데 왜!
“세 곳 다 극과 극으로 떨어져 있네요…….”
오죽하면 힘든 소리 안 하는 메이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분노, 식탐, 나태의 거처는 시계로 따지면 각각 1시, 5시, 9시 방향의 끝에 위치해 있었으며, 어느 곳이 더 가깝네, 머네 할 것 없이, 내 집을 기준으로 전부 똑같은 거리였다.
이러면 코스를 짜기도 애매한데.
“어쩔 수 없지 뭐. 멀다고 해서 안 갈 수도 없으니.”
“그럼 어딜 먼저 가시겠어요?”
“무작위로 정해야지. 잠깐 지팡이 좀 빌려줘 메이야.”
메이는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게 지팡이를 건넸다.
나는 지도 중앙에 지팡이를 반듯하게 세운 뒤, 쓰러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너무 반듯하게 세웠는지, 바로 쓰러지지 않고 몇 초를 버티긴 했지만,
-타닥
지팡이는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지팡이의 끝은 정확히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지점을 향해 있었다.
“아….”
이사벨과 브릴리스는 동시에 탄식을 내질렀다.
“하필 골라도 여기를….”
“벨져 님. 다시 세워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반응들 왜 이래?
어차피 다 가기 힘든 곳이라며?
지팡이가 향한 곳은 지도의 서쪽, 푸른 물결이 그려진 장소로 바다처럼 보였다.
“다른 후보의 거처와 다르게, 여긴 자칫하면 헛걸음할 수도 있는 곳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태의 종주, 세나 피그리티아의 거처는 지금껏 정확한 위치가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보시다시피 여기는 청해(靑海)로, 마계에서 유일하게 푸른 빛을 띠는 바다입니다. 비바람과 벼락이 하루도 멈추지 않고 몰아친다고 해서, ‘폭풍의 바다’라고도 불리죠. 피그리티아 가의 본가는 그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 청해?
바다는 원래 푸른색 아니야?
슬쩍하고 지도를 다시 보니, 표시된 부분을 제외하곤 바다로 보이는 지역은 전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 맞다 여기 마계지.
하늘도 붉은데, 바다라고 안 붉을 이유는 없겠지.
“그마저도 바다 위에 있는 섬인지, 바다 밑에 가라앉아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더군다나, 세나 후보는 외부 활동도 아예 안 하다시피 한 후보인지라,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경로도 매우 한정되어 있고요.”
“한정되어 있다는 건, 어쨌든 정보를 구할 경로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이사벨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죠. 문제는 그 정보를 아는 이가 우리에게 절대 가르쳐줄 마족이 아니라서 그렇지.”
“누구길래 그러십니까?”
“네로 후보요.”
이름을 들은 순간 바로 생각을 접었다.
하기야 그 세나 후보를 연회에도 초대했던 주최자인데, 그녀의 거처를 모를 리는 없겠지.
내가 아무리 급해도 그 비만 마족에게 정보를 구하고 싶진 않다.
“다른 경로는 없습니까?”
“하나 더 있긴 해요. 이 마왕 경합의 주최자인 ‘위즈 메디아’에게 물으면 알 수도 있겠지만…….”
위즈 메디아?
아 그 후보 회담장에서 사회를 맡았던 백발 마족을 말하는 건가?
“그도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요. 회담 이후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렸거든요.”
아주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네.
이쯤이면 그냥 직접 찾아가겠단 마음을 접는 게 현명할 듯하다만,
그럴 순 없지.
나는 지팡이를 다시 들어 메이에게 건넸다.
“가자. 메이야.”
“어, 어딜요?”
“어디긴, 청해지.”
가끔은 정보 없이 무계획으로 진행해야 할 때도 있는 법.
이리된 거 그냥 가보기로 했다.
이사벨과 브릴리스도 놀라는 대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았어요. 거리상 마차를 타고 간다 해도 이주일 이상은 걸릴 거예요. 그럴 바엔 내 정령의 힘으로…….”
“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사벨 님께선 여기 남아주시죠.”
당황한 이사벨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브릴리스를 보며 말했다.
“브릴리스 너도 마찬가지야. 마차 같은 거 따로 준비 안 해줘도 돼. 그동안 못다 한 온건파 일에 전념해줘.”
“벨져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브릴리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사벨이 다급히 물었다.
“제정신이에요? 걸어서 가면 못 해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요! 그 먼 거리를 정말 두 다리로만 가겠다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이번 여정은 가급적 제가 마왕 후보라는 신분 자체를 숨기면서 해볼 생각입니다.”
“어째서요?”
“그래야 이 마계가 마왕이란 존재를 어떻게 보는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난 이번 여정에서 단순히 후보들의 뜻을 아는 것에만 목표를 두진 않을 거다.
힘이 있는 존재들이 아닌, 힘이 없는 존재.
이 마계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평범한 마족들의 뜻을 탐구하는 것에 진정한 목적을 둘 것이다.
그래야지 진정, 이 마계에 필요한 마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
* * *
벨져의 저택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하루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교만의 종주 다일 수페르비아의 본가.
다일은 어두운 서재에서 등불 하나에만 의지한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앞엔 벨져의 저택에 다녀온 페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검을 배우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 했다고?”
페르는 자신이 겪은 일을 거짓 없이 전했지만, 다일은 작은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오히려 스스로를 자책하기까지 했다.
이에 페르가 물었다.
“혹 불쾌하진 않으신지요?”
“불쾌할 게 뭐 있겠느냐? 이건 내가 벨져 후보를 경계하는 만큼, 그 또한 날 경계할 수 있다는 걸 인지 못 한 내 잘못이다. 미처 떨치지 못한 내 작은 오만함이 널 헛걸음하게 했구나.”
“아닙니다. 저 또한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었기에, 헛걸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똑똑
그때 서재 밖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시종이 들어와 몸을 숙였다.
“다일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네로 후보와 그의 퍼밀리어입니다.”
탐욕의 종주가 왔다는 말에 다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둘만 오진 않았을 텐데?”
“예. 30명에 달하는 수행인을 동반한 채로 왔습니다.”
“과시욕만큼은 여전한 후보로군요.”
페르는 적잖이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책을 덮은 다일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을 먼저 접견실로 모셔라. 준비를 마치면 가도록 하겠다.”
“다일 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하수인은 바로 방을 나갔다.
“이 시기에 네로 후보가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요?”
“글쎄. 이유는 직접 들어봐야 알겠지만……. 그 역시 뭔가를 경계하는 게 있어서, 나한테 도움을 청하러 왔단 예감이 드는구나.”
다일은 그 길로 페르와 함께 접견실로 향했다.
접견실에는 먼저 온 네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로의 얼굴은 불만에 싸인 아이마냥 잔뜩 구겨져 있었다.
“살짝 불쾌할 뻔했습니다. 아무리 검소하게 산다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접견실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공간이로군요.”
“나름 제 처지에서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대우입니다. 너무 불편하게 보진 말아주시지요.”
대면과 동시에 던진 불손한 언행에도 다일은 개의치 않았다.
“그게 당신의 문제입니다 다일 후보.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자신을 무능하게 만들죠. 힘과 능력이 있다면, 보란 듯이 펼쳐야 합니다.”
“조언이라 생각하고 새겨 두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 본가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다일이 찾아온 이유를 묻자, 네로는 쓰읍 입맛을 다셨다.
“벨져 후보의 기세가 요즘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압니다. 며칠 전 연회 덕분에 그 기세가 한층 더 올라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죠.”
네로는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다시금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요? 그 비천한 마인족 출신의 후보가 우리와 맞먹는 기세를 보여주다니 말입니다. 허나 자고로 선을 넘은 나무는 가지치기를 해줘야 하는 법이죠. 그를 이대로 놔두면, 우리의 옆구리를 찌를 만큼 길어질 겁니다.”
“서론이 너무 길군요. 그만 본론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같이 죽이죠. 벨져 후보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다일의 미간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협력하면 벨져 후보의 힘이 담긴 마혈석은 그 쪽에게 넘겨 드리겠습니다. 이만하면 다일 후보 입장에서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니겠죠?”
“그렇긴 합니다만……. 벨져 후보의 힘을 내게 넘기면, 네로 후보는 뭘 가지겠단 겁니까?”
“그 외에 모든 걸 가질 겁니다!”
기어이 감정이 격양된 네로는 허공을 움켜쥐는 손짓을 하며, 흉측한 웃음을 남발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걸 가질 겁니다. 지원자, 하수인, 그리고 퍼밀리어까지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