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49
제49화. 여정
“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여기가 정말……. 우리가 사는 레지에타 맞아요?”
살다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지.
저 말을 들었던 순간이 내겐 그랬다.
말뿐만이 아닌, 목소리의 떨림, 표정, 방황하는 손짓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전형적인 ‘새장 속의 공주’의 모습이…….
과거 마왕과의 혈전 후 레지에타의 평화를 이룬 내겐, 그다음 날부터 수많은 혼인 제의가 들어왔었다.
대륙 제일 부호의 딸, 레지에타 모험가 길드의 젊은 길드장, 심지어 어느 왕국의 여왕까지.
전부 남부러울 것 없는 짱짱한 스펙을 가진 여인들이었다.
허나 사람은 자고로 직접 만나면서 겪어봐야 안다고,
한동안 혼인 제의를 보낸 여인들과 만남(이라는 이름의 데이트)이 일상처럼 이루어졌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중 가장 기억나는 여인을 꼽으라면,
난 고민 없이 부르크 왕국의 제1 왕녀 ‘메리델 데이부르크’ 공주를 꼽겠다.
일단 외모는 내가 만났던 여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매우 뛰어났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여인이었지.
얼굴과 성격은 반비례한다는 말과 다르게, 순수하고 해맑은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여인이었지만,
너무 순수한 게 문제였다.
“마왕은 얼마나 위험한 존재였나요?”
첫 만남에서 내게 했던 말이다.
저 질문을 듣고 어이가 터져서 몇 분간 입을 못 열었다.
마왕이 얼마나 위험했냐고?
그래 뭐 그녀로선 마왕의 얼굴조차 못 봤으니, 그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알진 못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물은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내게 물은 것이었다.
마왕이란 존재가 왜 위험한지?
그가 레지에타에 가져올 비극이란 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왜 마왕을 무서워하는지? 등등.
그 순수하다 못해 등신 같은 질문을 연이어 듣고선, 난 바로 생각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새장 속의 공주’라는 건가?
왕국의 공주로서 태어날 때부터 호화스러운 궁중 생활을 하다 보니, 정작 그 밖은 지옥이란 걸 전혀 몰랐던 걸까?
삼시세끼 풍족한 식사와 간식을 먹다 보니, 굶어본 적이 없고,
따뜻한 옷과 안락한 성이 있으니, 추위에 떨어본 적이 없고,
든든한 기사들과 편리한 시종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니,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새장 속 무지(無知)의 존재.
안쓰럽다는 마음보단 이런 인간이 실제로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앞섰다.
난 그런 그녀에게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며 그녀를 꾀어서 밤에 몰래 성을 탈출시켰다.
그러곤 성밖에 빈민가로 데려가서 세상의 현실을 보여줬다.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이 딱 저거였다.
진짜 딴 세상에서 온 사람 앞에서 딴 세상에 온 것 같단 말을 했었지.
그 후론 어떻게 됐냐고?
뭘 어떻게 돼? 혼담은 내 쪽에서 바로 파기하고, 메리델 공주는 성에서 더 안 나오게 됐지.
보통 그런 일을 겪으면 스스로 각성해서 가치관을 바꾸고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그 공주는 그냥 그거밖에 안 되는 여자였던 거다.
혹여나 미모에 홀려 하룻밤을 보냈었더라면…….
아마 화병으로 일찍 죽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이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 안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넓게 펼쳐진 현실을 직접 마주해야 한다.
내가 절대자로 군림할 이 마계라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거기서 나는 뭘 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나태의 종주 세나 피그리티아를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
선선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숲속에서 나와 메이는 모닥불을 지피고 있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주는 아련한 온기를 느끼다 보면, 불현듯 이런 옛날 생각이 나곤 한다.
마침 하늘에 별도 잔뜩 떴으니, 이 얼마나 감성에 젖기 좋은 밤이란 말인가?
장작을 뒤적이던 나는 대뜸 메이를 보며 물었다.
“메이야. 넌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였어?”
“가장 힘든 순간이요?”
배고픔, 추움, 생존의 위협 등 어렸을 때부터 갖은 고생은 다 했을 그녀인 만큼, 정말로 힘겨웠던 때가 언제였을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마도서를 읽던 메이는 잠시 책을 덮고선 상념에 잠겼다.
“외로움을 느꼈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외로움?”
배고픔이나 추위를 생각했던 나로선 조금 의외의 대답이었다.
“네. 지금이야 벨져 님이랑 함께 있으니 하나도 안 외롭지만, 혼자 다녔을 땐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는다, 오직 나 혼자만이 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무척 울적했거든요.”
외로움.
비슷한 시절을 겪어봐서 그런지,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
“아마, 저 외에 다른 마족들도 다 한 번씩은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누구든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존재가 옆에 있어 주길 원하지 않을까요?”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존재라.
한 번 해봐서 알지만, 그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놈의 세상들은 자꾸만 이방인인 내게 어려운 역할을 맡기려는 건지…….
새삼 신이 있다면 욕을 한 사발 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 * *
청해로의 여정 8일 차 아침.
지난날 기나긴 숲길을 걸어온 끝에 나와 메이는 한 마을에 도착했다.
입구에 박힌 팻말에 절로 눈길이 갔다.
왠지 모르게 정겨운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확실히, 이전에도 몇몇 마을이라 부를만한 곳을 지나오긴 했지만,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활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사람 아니, 마족 냄새가 나는 마을이었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여긴 브릴리스가 온건파와 연이 있는 마을이라며 내게 귀띔을 해준 곳이다.
알려준 장소로 가면 반겨줄 마족이 있을 거라고 했으니,
일단 거기 가서 요기부터 좀 해볼까?
다행히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삐그덕
빡빡함이 느껴지는 나무 문을 열자, 청소 중인 중년 마족의 모습이 보였다.
“어린 손님들이 올 만한 곳은 아닌데?”
마족은 우릴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다름 아닌 주점.
시간이 시간인지라 아직 손님은 없었다.
“요기나 좀 하러 왔습니다만, 아직 장사 안 합니까?”
“술안주라도 괜찮다면야! 대충 편한 데 앉게.”
나와 메이는 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주인은 바로 마실 것부터 갖다주었다.
메이에게는 오렌지 주스로 보이는 주홍빛의 음료를, 나한테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우리 가게엔 물보다 많은 게 술이라서 말이야!”
맥주를 주었다.
잠깐, 이거 진짜로 맥주 맞아?
일단 보기로나, 냄새로나 레지에타에서 먹던 거랑 완전 똑같은데?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일단 한 모금 마셔보았다.
“크으…….”
나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 나왔다.
숙성이 아주 제대로 됐다.
“맛있어요!”
메이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주스를 홀짝였다.
“딱 보니 우리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가녀린 남매 둘이서 여긴 뭐 하러 왔는가?”
나는 대답 대신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은 주인은 바로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발신인은 브릴리스.
편지 맨 밑단에 온건파를 상징하는 푸른색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표정은 그의 입은 점차 벌어져갔다.
“잠깐만! 이제 보니 당신……?!”
그러다 대뜸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세상에! 이리 귀한 손님이 왔을 줄이야! 어서 오게나, 벨져 후보!”
활짝 웃는 얼굴로 내 손을 잡고선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깜짝 놀란 나는 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 주점엔 우리 말곤 아무도 없었다.
“제정신입니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아, 미안하네! 너무 반가워서 말이지! 우리 온건파를 대변해줄 마왕 후보님께서 오셨는데, 온건파 단원으로서 어찌 안 기쁠 수가 있겠는가?”
그는 호탕하게 웃다가도 악수를 청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난 ‘마일로’라고 하네! 보다시피 이 마을에서 변변찮은 주점을 운영하고 있지! 이전에 온건파 전체 회의에서 보여준 후보님의 모습은 아주 인상 깊었네! 마계의 평화를 원한다고 했던 그 발언이 아직도 귀에 아른거린다니까!”
왜 이렇게 반가워하나 했더니, 전체 회의에도 있었던 마족이었군.
“아 참 이럴 게 아니지! 간만에 솜씨 발휘 좀 해야겠구먼!”
“됐으니까, 이거나 한 잔 더 주시죠.”
나는 어느새 비운 빈 맥주잔을 내밀며 리필을 요구했다.
마일로는 빈 잔을 거두고 새 맥주를 갖다주었다.
“주점을 운영하신 지는 얼마나 된 겁니까?”
“내가 직접 한 지는 20년 됐지.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술맛이니, 더 안 마시고는 못 배길 거야!”
부정은 못 하겠다.
이래서 어딜 가든 인맥이 중요하다고, 이 술맛이면 아마 돌아올 때도 들르지 않을까 싶다.
마일로는 술과 주스에 이어 구운 빵과 고기 몇 점을 넣어 만든 수프를 제공했다.
엄청나게 맛있다 까진 아니더라도, 나름의 정겨운 맛이 느껴지는 음식들이었다.
-벌컥!
식사가 끝날 때쯤, 한 마족이 문을 박차고 급하게 들어왔다.
마일로와 같은 연배로 보이는 중년 마족으로, 무슨 마수에라도 쫓긴 듯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데릭? 자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인가?”
“말도 말게! 방금 죽다 살아난 참이니까! 나 물 아니, 맥주 한 잔만 주게!”
그는 받은 맥주를 생명수 마시듯 단숨에 비워버렸다.
한 손엔 굵은 도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목수인 듯싶었다.
“후워! 이제 좀 살겠구먼. 진짜 이 목수 짓도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어!”
“진정하고 설명을 해보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나?”
“자네! 당분간 흑나무 숲 쪽은 가지 말게! 거기 웬 이상한 마수가 있어!”
마수?
“마수라니? 그래봐야 데빌 울프 같은 하급 마수 아닌가?”
“데빌 울프 따위가 아니야! 더 크고, 눈도 시뻘건 데다, 꼬리도 긴 놈이었어! 내 살다 살다 그런 생물은 처음 봤네!”
크고, 빨간 눈에다가, 꼬리가 긴 마수라.
당장 생각나는 마수는 없는데?
“이거 큰일이구먼. 그러고 보니 저쪽 직물 가게의 여주인도 며칠 전 강가에 갔다가 비슷한 놈을 봤다던 것 같은데?”
“오면서 듣기론 나 말고도 이미 본 마족이 다섯이나 된다네! 아직 직접적으로 해를 당한 이는 없다지만, 언제 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이거 큰일이군. 지금 마을엔 마수를 해치울 수 있을 만한 실력자가…….”
“거기가 어딥니까?”
두 마족의 시선이 동시에 내 쪽으로 향했고, 나는 다시 물었다.
“마수를 봤다는 곳 말입니다.”
* * *
가령 어느 마을에서 거대 짐승이나 정체 모를 생물이 나타나 어지럽히는 일이 발생하면, 마을 내 자경단 혹은 모험가 길드에 의뢰한다거나, 때에 따라선 국가가 직접 토벌군을 파견해 일을 해결하기 마련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계 한정,
여기 마계엔 그런 거 없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 자체가 없으며, 힘이 없으면 그냥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린 나무로 이루어진 숲.
그 마수를 봤다는 마족이 알려준 장소로 메이와 함께 와봤다.
일단 겉으로 봐선 위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숲이었다.
“벨져 님. 여기 발자국이에요!”
탐지 마법으로 주변을 살피던 메이가 마침내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진흙 위로 남겨진 발자국은 숲 안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발자국을 살피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발자국은 본 적이 없는데…….”
“데빌 울프의 기행 종 같은 거 아닐까요?”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우선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그렇게 발자국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잠깐만요! 지금 어딜 가려는 거예요?”
뒤에서 들려온 어느 여인의 다급한 만류에 몸을 멈칫했다.
“거긴 정체 모를 흉악한 마수가 지나간 장소에요! 가면 틀림 없이 마주칠 거라고요!”
“마주치려고 가는 겁니다만?”
나는 몸을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제정신이에요? 그 마수는 매우 위험한…….”
여인은 아예 직접 다가와서 나를 만류하려는가 싶더니, 대뜸 말을 하다 말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야? 왜 그런 아련한 눈으로 날…….
“너 혹시, 벨져니?”
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