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59
제59화. 청해
출가득고(出家得苦)라는 말이 있다.
뭔 뜻이냐고?
뭐긴 뭐야, 집 나가면 개고생한다는 거지.
이건 어느 세상을 가든 통하는 불변의 진리다.
청해로의 여정 29일 차.
다른 마왕 후보들을 만나겠다며, 패기롭게 집을 나선 처음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 집이 그리워졌다.
가는 동안 여간 좋은 일이 있었어야 말이지.
괜히 나왔나 하는 생각을 아마 20번을 했을 거다.
뭐, 결국 오긴 왔다.
그 이름도 아름다운 마계의 푸른 바다 청해(靑海).
-우르릉 쾅!
그 아름다운 이름에 참으로 어울리는 이 지랄 맞은 날씨를 봐라.
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어둡기 그지없고, 맞는 것 자체가 따가운 장대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며, 천둥 번개가 무슨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댄다.
-콰아아!
하늘이 이런 데, 바다는 또 어떻겠는가?
조금이라도 잘못 다가갔다간 바로 파도가 집어삼킬 기세다.
뭐 매일 같이 폭풍우 치는 바다라는 걸 모르고 온 것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괴랄한 곳이었네.
그 와중에 바다는 정말 눈이 부실 만큼 깨끗하다.
“정말 이런 곳에 세나 후보님이 계신 걸까요?”
바람이 워낙 거센지라, 소리 지르는 메이의 목소리도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일단 대책 없이 오긴 왔다만……, 이제 어쩌지?
저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나태의 종주 나와!’ 할 수도 없고.
애초에 들릴 것 같지도 않다.
“벨져 님 이것 좀 보세요!”
그런 와중 메이가 대뜸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바람에 밑동이 부러진 낯선 안내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 딴엔 ‘파도가 거세니 조심하세요’라는 문구라도 쓰여 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마수 조심?”
조심해야 할 건 파도가 아닌 마수였다.
안 그래도 괴팍한 날씨 때문에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 거기에 마수까지 있어?
안내판까지 있는 걸 보면 시시한 마수는 당연히 아닐 테고, 근데 왜 이름이 안 적혀 있지?
이름만 안 적힌 게 아니었다.
보통 마수 안내판이라 하면, 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인 설명이나 간단한 그림이 있기 마련인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림은 하나 있었다.
파도처럼 보이는 물결무늬 위로 소용돌이를 그려놓은, 뭘 의미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그림이라서 문제지.
“바다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마수라는 걸까요?”
그나마 우리 기특한 퍼밀리어가 그럴싸한 의견을 냈다.
갈수록 태산이네.
이래서야 배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도 껄끄러울 거 아니야?
지금 같은 때엔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뭐라도 물어보는 게 제일이겠지만,
보이는 마족이 있어야 물어보든, 말든 하지.
목숨 안 아까운 게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데를…….
“응?”
벌레 씹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와중, 저 앞에 깎아진 절벽 위로 어느 마족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자세를 보니, 아무래도 낚시를 하는 중인 것 같은데…….
아니 이런 곳에서도 낚시가 돼?
일단 절벽을 향해 후다닥 가보았다.
멀리서 봤을 땐 좀 긴가민가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덥수룩한 수염에 허리가 살짝 구부러진 노인이 정말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우리 인기척을 느끼고선 고개를 돌렸다.
“호? 젊은 남녀 둘이서 이런 험한 바다엔 어쩐 일이신가?”
“노인께선 뭘 하고 계신 겁니까?”
“보다시피 낚시 중이라네.”
노인은 보란 듯이 자신의 낚싯대를 가리켰다.
“파도가 저리 거센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걱정하지 말게. 저 파도가 아무리 거세도, 여기까지 오진 않으니까. 20년 동안 이 자리에서 낚시를 해온 내가 장담하지.”
그런 것치곤, 정작 물고기가 있어야 할 바구니는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20년 동안 여길 왔다는 건, 이 바다와 거의 동고동락한 터줏대감이란 거잖아?
마침 딱 적합한 마족을 만났다.
“그래서, 그대들은 여기에 무슨 일로 왔지?”
“마족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만, 혹시 세나 피그리티아란 마족이 사는 곳을 아십니까?”
“세나 피그리티아? 혹시 나태의 종주님을 말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잠시 눈을 번뜩거리더니, 대뜸 껄껄 웃었다.
“알다마다! 나태의 종주님이 계신 곳은 바로 저기라네!”
나와 메이의 눈은 바로 노인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요란한 천둥 번개가 번쩍이는 바다 한가운데였다.
“저기에 섬이라도 있는 겁니까?”
“섬이 아니고, 바다 밑이라네.”
뭐라고요 영감님?
“바, 바다 밑이요?”
노인은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그분을 찾는진 모르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걸세. 애초에 그분은 밖에 나오기는커녕, 누굴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시는 분이거든. 이 바다가 요란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그럼 바다 안에 산다는 겁니까?”
“정확히는 저 안에 살고 계시다네.”
노인의 손가락은 바다가 아닌 어느샌가 메이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메이가 들고 있는 마수 안내판을 향해…….
그건 또 언제 들고 왔니?
“청해는 1년 내내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끊이질 않는 곳이라네. 자연적으로 날씨가 험한 것도 있지만, 이런 날씨가 유지되게 하는 주체가 있지. 혹여 날씨가 좋아지려나 싶으면, 저 마수가 나타나서, 다시 폭풍의 바다로 만들어버린다네.”
“그 마수가 나태의 종주와 무슨 관계가 있단 겁니까?”
“세나 님이 사시는 곳이 바로 그 마수의 몸 속이거든.”
환장하겠네.
차라리 바다 밑의 도시가 있는 거면 또 몰라. 그것도 아니고 마수의 몸속에 산다고?
무슨 고래 배 속의 피노키오야?
“그럼 그 마수는 어딜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평소엔 바닷속에 있으니, 물 밖에서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네. 날씨가 잠잠해진다면 또 모를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봐도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도저히 맑아질 기미 자체가 안 보인다.
그렇다고 언제 올지 모를 맑은 날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인위적인 힘으로라도 바꿔야 한단 소리인데.
이 괴랄한 날씨를 잠잠하게 바꿔줄 엄청난 존재가 지금…….
“제가 맑은 날씨로 바꿔볼까요, 벨져 님?”
내 옆에 있네?
“할 수 있겠어, 메이야?”
“네! 충분히 가능해요!”
장하다, 우리 퍼밀리어!
평소라면 터무니없는 짓 하지 말라며 말렸겠지만, 이번엔 다르다.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너의 힘을 보여줄 때야!
메이는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는 듯, 마도서를 꺼내 나한테 건넸다.
“잠깐만 들고 있어 주시겠어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문제 없다며 마도서를 받아주었다.
이에 메이는 메고 있던 손가방을 열었고, 갈색 병 하나를 꺼내 그대로 원샷했다.
상위 마법 시전에 필요한 체내의 마력 양을 늘려주는 약물인 ‘마력 증강제’였다.
하기야 날씨는 바꾼다는 게 마력 좀 있다 해서 되는 건 아니겠지.
저 정도 도핑 정도는…… 어라?
“메, 메이야? 좀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내 목소리가 묻힌 건지, 아님 도핑(?)에 집중하느라 못 들은 건진 몰라도,
메이는 다섯 병에 달하는 마력 증강제를 그 자리에서 전부 비워버렸다.
생각해보면 또 이상한 것도 아니지?
무려 자연을 바꾸는 마법인데, 겨우 증강제 한 병 마셨다고 필요한 마력이 다 채워지는 것도 아니잖아?
저 양도 사실은 적은 게…….
“준비 다 됐어요!”
잠시 멍하니 있던 사이, 메이는 도로 마도서를 가져갔다.
“자, 잠깐만 메이야! 무슨 마법을 쓸진 모르겠지만, 써도 네 몸에 아무 이상 없는 거지?”
“없진 않아요. 아마 마법 쓰고 나면 두 시간 정도는 기절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미친!
“그럼 두 시간 뒤에 뵐게요, 벨져 님!”
나는 급히 막아내고자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그녀의 지팡이에서 발현된 어마무시한 양의 마력 빛줄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멈추라고 소리도 여러 번 질렀다.
허나 장문에 달하는 주문을 읊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메이는 그런 내 말조차 듣지 않았다.
– 쿠우웅!
천둥 번개보다 더 요란한 마력의 진동이 청해에 널리 울려 퍼졌다.
하늘을 가득 뒤덮었던 먹구름은 빛줄기에 의해 빠르게 걷혔으며, 고막을 찢을 듯이 불던 바람도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여기서 20년간 낚시를 했다던 노인도 단언컨대 이런 광경은 처음 봤을 것이다.
지랄 맞던 날씨는 불과 1분 사이에 화창한 붉은 하늘로 변해버렸다.
“해냈어요, 벨져…….”
-툭!
메이는 기뻐할 틈도 없이,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기절해버렸다.
그녀를 재빨리 받고선 가방에 머리를 받치고 눕혔다.
우리 메이가 착한 심성을 가진 선한 마족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너 당분간은 마법 금지야.
자, 이렇게 날씨는 어찌어찌 변화시켰고,
남은 건 이 화창한 날씨를 좋아하지 않는 마수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어째 소식이 없네?
노인에게 다시 묻고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오오!
절벽 바로 앞 방향에서 세찬 기류가 모이는 소리가 들렸다.
멀쩡한 바다에 난데없이 등장한 반시계 방향으로 맴도는 소용돌이.
마치 바다 위로 싱크 홀이라도 생긴 듯, 주변의 물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언뜻 암초처럼 보이는 뾰족한 뭔가가 소용돌이를 따라 빙빙 돌고 있었다.
저거 설마 이빨 아니지?
“스케일 진짜 답도 없네.”
나지막이 불평을 뱉으면서도 나는 빗물에 젖은 아크베리아를 뽑았다.
이에 노인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 뭘 하려는 겐가?”
“집을 찾았으니, 이제 집주인을 불러야죠.”
자기 집 앞에서 소란이 벌어지는데, 이를 무시할 집주인은 없다.
벌써 하늘에는 어둑어둑한 구름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로선 별로 선호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우리 퍼밀리어가 도핑까지 해서 만들어준 기회를 멍하니 보다 날릴 순 없지.
-우우웅
마력이 발현된 아크베리아에서 검은 오라가 일었다.
자 10초 준다.
10초 안에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으면, 내 검에 담긴 마력은 고스란히 저 소용돌이의 중심부로 향할 거다.
나중에 그 일로 따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사과하지 뭐.
그렇게 매우 빠르게 지나간 9초의 시간.
어쩔 수 없이 후려쳐야겠단 마음에 몸을 비상시키려는 순간,
“그만 멈춰주시지요. 벨져 후보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른, 마냥 낯설지 않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마력이 발현된 아크베리아의 검날엔 낡은 나무 낚싯대가 얹어져 있었다.
나는 그 낚싯대를 따라 천천히 그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세나 피그리티아 님의 퍼밀리어. ‘제임스 룸’이라고 합니다.”
낡은 옷차림으로 조금 전까지 낚시를 하던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 아닌,
정갈한 수염과 멋들어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노신사 마족이 자신을 소개했다.
* * *
“세나 님! 세나 님!”
뭔가 일이 생긴 듯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시녀.
허나 안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세나 님! 아직 주무시나요? 지금 밖에 계신 제임스 님으로부터 전언이 왔는데, 손님이 오셨대요!”
돌아온 것은 여전한 무반응.
시녀는 어찌해야 하나, 문 앞에서 1분간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다 못내 큰 결심을 한 듯, 심호흡과 함께 문고리를 잡았다.
“문 열겠습니다. 세나 님!”
통보를 마친 시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높이 솟은 책장들 사이로 우두커니 서 있는 방의 주인이 보였다.
“일어나계셨군요, 세나 님! 갑작스럽지만 준비를 좀…….”
잠시나마 긴장이 풀렸던 시녀는 방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전신의 힘이 쭉 빠지면서 굉장히 나른해진 기분.
힘겹게 고개를 든 시녀는 방의 주인을 향해 애절히 손을 뻗었다.
“세, 세나 님. 손님이 오셨어요…….”
“어. 알 것 같아.”
세나는 이미 인지하고 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경계하시는 건 좋은데 일단 저는 좀 구제를…….”
“아…. 미안.”
시녀의 호소에 세나는 눈을 2초간 감았다가 떴다.
이에 시녀는 몸을 누르고 있는 무거운 바위에서 해방된 것마냥 긴 숨을 내쉬었다.
“그, 그냥 바로 말씀드릴게요! 마왕 후보가 찾아왔어요!”
“마왕 후보?”
세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쯤 감긴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였다.
“네. 그때 연회장에서 보셨던 전대 마왕의 후손 기억하시죠?”
잠시 생각하던 세나는 이윽고 생각이 났는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아, 벨져!”
줄곧 게슴츠레하던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