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66
제66화. 영지
영지(領地)
사전적 의미론 왕 또는 군주가 신하 혹은 제후에게 내린 땅을 의미한다.
땅을 받은 이는 그곳의 영주(領主)가 되어 땅을 관리할 권한을 가진다.
즉 영지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그 땅을 하사할 왕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여기 아직 마왕 없잖아?
그럼 성립할 수 없는 말 아닌가?
물론 브릴리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일을 계획할 마족이 아니란 거 안다.
일단 호기심 반, 의심 반인 마음으로 계획서를 쭉 훑어보았다.
“온건파 소유의 땅이…… 꽤 많았네?”
난 그동안 온건파가 마계에 미치고 있던 영향력을 살짝 간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계획서를 넘기면 넘길수록 마계 곳곳에 있는 온건파 소유의 땅들이 속속 나타났다.
다 합치면 웬만한 소국 정도 되겠는데?
“사실 저희 땅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다른 마족들이 손대지 않은 땅을 점 찍어둔 것뿐이라서…….”
부끄러움에 젖은 브릴리스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하다.
농작물이 전혀 자랄 수 없는 메마른 황무지.
기괴하고 흉측한 마수들이 다수 서식하는 고원.
오염된 강물로 사방에 악취가 가득한 습지대까지.
차마 소유지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버려진 땅이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쓸만한 땅도 몇 개 있네? 여기 중 일부를 영지로 만들고 싶었던 거야?”
“예 맞습니다…….”
브릴리스는 송구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난 아직 그녀가 왜 이리 죄인 된 것마냥 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계획서를 좀 더 읽어보기로 했다.
영지 계획서란 주제 밑에 선명하게 쓰인 부제다.
제목에 맞게, 계획서엔 집 없이 처량하게 떠도는 마족들을 위한 주거 공간 형성과 관련된 여러 사안이 담겨있었다.
집부터 해서, 농경지, 그 외 마족다운 생활을 위한 여러 편의 시설까지.
영지라기보단 도시에 가까워 보였다.
뭐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이거 하나다.
좋은데?
지극히 마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온건파다운 계획이라고 본다.
“나로선 딱히 나쁘단 생각은 안 드는데?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거야?”
“일단 첫째로 자금이 문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측은해졌다.
역시, 어느 세계든 돈이 문제라는 건가?
“온건파 운영자금 대부분은 단원들의 후원금입니다. 각자의 터전에서 피땀 흘려 번 대가의 일부를 저희에게 주는 것이지요.”
“엥 뭐야? 그럼 이 집도 그 단원들이 보낸 후원금을 바탕으로 산 집이라는 거야?”
브릴리스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는 마계 소시민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집에 사는 마왕 후보라…….
허. 이거 갑자기 악덕 지주가 된 기분인데?
“그래도 최근 벨져 님의 온건파 지지 선언 덕분에 후원금이 비약적으로 증대되긴 했습니다만…….”
“영지를 만들기엔 턱없이 모자란다는 거네.”
하기야, 마족이 살 수 없는 땅을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는 것부터 어마어마한 돈이 들겠지.
거기에 주거 공간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설들을 건설하려면, 건설 자재비에 노동력까지,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단원들의 후원금 정도로 충당할 수준이 아니네.
“그래, 자금 문제는 그렇다 치고. 다른 문제는 뭔데?”
“그것이…….”
손을 가지런히 모은 브릴리스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작게 읊조렸다.
“벨져 님의 도움을 좀 구할까 했습니다…….”
나? 내 도움 구하는 게 왜 문제란 거지?
“만약 이 계획서에 적힌 계획들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전 이 모두를 위한 주거지를 마계 전역으로 늘리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온건파의 위세만으론 한계가 있습니다. 해서, 거기에 벨져 님의 위세가 얹어진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내 위세?”
“예. 아무래도 최근 벨져 님의 위세가 매우 높아지셨다 보니, 벨져 님께서 이름을 걸고, 지키는 영지라 한다면, 마족들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을까 해서…….”
아, 얼굴마담 말하는 거구나.
지구로 따지면 아파트 모델 같은 거.
아니 근데 원래 영지란 게 그런 거잖아?
어느 세계든 살기 좋은 땅은 먹잇감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땅을 지킬 보호 수단이 필요하지.
내가 그 보호 수단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나 분명 온건파에 따르는 마왕 후보가 되겠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사실 벨져 님께서 돌아오시면 제안 드리고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다른 후보에게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 현 벨져 님의 상황이거늘, 후견인인 전 안일하게 이런 것이나 계획하고 있어서…….”
그래서 아까 눈치 봤던 거구나.
하기야. 반격이니, 무력 행위니 그런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영지 계획서 같은 얘기를 꺼낼 순 없었겠지.
나라도 그런 분위기에선 말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드네.”
“예?”
설사 그 상황에서 브릴리스가 이 얘기를 꺼냈다고 한들, 나는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마음에 든다고. 이 영지 계획서.”
브릴리스는 믿기지 않는 듯 내 눈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브릴리스, 우리 밸런스 게임 한 번 해볼까?”
“배, 밸런스 게임이요? 그게 무엇인지?”
“간단해. 내가 주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고르는 거야.”
브릴리스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왕 되기 vs 네가 원하는 평화로운 마계 만들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넌 뭘 고를래?”
“어,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그냥 재미로 하는 거야. 뭘 골라도 뭐라 안 할 테니까, 그냥 마음 가는 걸로 골라봐.”
손사래를 치며 질색하던 브릴리스는 이내 굳은 눈빛으로 당당히 말했다.
“전 당연히 벨져 님께서 마왕이 되는 걸 선택할 겁니다!”
의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나는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나라면 후자를 선택할 거 같은데?”
“펴, 평화로운 마계 말입니까? 왜 그런 선택을 하시겠다는 건지?”
“애초에 마왕이란 존재 자체가 마계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거 아니었어?”
브릴리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평화로운 마계가 마왕 없이도 만들어질 수 있다면, 마왕이란 존재는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물론 이 말을 했다고 해서, 내가 마왕이 되고픈 마음을 접었다는 건 아니다.
단지 우선순위를 따질 필요는 있다는 거지.
결국 마왕이란 존재보다 중요한 건,
이 마계라는 땅의 평화라는 것을.
“해보자, 이거.”
그걸 위해 내가 여기 있는 거고.
* * *
다음 날 아침.
모두를 모아 놓은 자리에서 브릴리스가 구상한 계획서를 자랑스럽게 들이밀었다.
“영지 계획서?”
이사벨이 대표로 받아서 그 내용을 분석했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던 그녀의 얼굴엔 점점 어둠이 드리워졌다.
“이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죠?”
“당연히 거기 적힌 계획을 추진하려는 의도에서 보여 드린 겁니다.”
“지금 같은 판국에 영지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사벨은 나를 나무라다 말고, 브릴리스를 쳐다봤다.
내가 아닌 그녀가 만든 계획서임을 눈치챈 것이다.
“입이 있으면 뭐라 설명 좀 해봐요 브릴리스!”
“며, 면목 없습니다…….”
브릴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만 할 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흠. 벨져 님께선 단순 영역을 보유하시는 게 아닌, 마족들을 모아서 주거지를 만드시려는 겁니까?”
얼떨결에 넘겨받은 계획서를 읽던 제임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바로 보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영지는 단순히 주거지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거지를 비롯한 농경지, 편의 시설 등이 모두 갖춰진, 즉 도시의 건설을 원합니다.”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하다고 봅니다만, 그만큼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지 않을까요?”
제임스 또한 돈이 문제임을 지적했다.
나도 잘 알지.
그래서 내가 당신들을 불러 모은 거라고.
“예. 그래서 이뉘디아 가와 피그리티아 가에 정식으로 요청하려는 겁니다.”
“뭐, 뭘 요청하겠다는 건데요?”
“영지 개척을 위한 지원금 말입니다.”
세상 뻔뻔한 내 요청에 이사벨과 제임스는 말문을 잃었다.
“영지를 만들면 뭐가 좋아?”
뒤늦게 계획서를 읽던 세나가 손을 들며 물었다.
“우리만의 땅이 생기는 거지.”
“나도 내 땅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리 좋은 점은 못 느끼고 있는걸?”
“청해에 사는 건 너희뿐이잖아. 내가 원하는 건, 우리만이 아닌 수많은 마족이 함께 모여 사는 땅이야. 너도 생각을 해봐. 혼자 노는 게 재밌을 것 같아, 아님 여럿이 모여 노는 게 좋을 것 같아?”
세나는 쉽사리 답을 내지 못했다.
하기야 이 히키코모리라면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할지도.
“자고로 게임은 여럿이 해야 더 재밌는 법이야. 영지가 생기면 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오락 시설도 만들 거야.”
오락 시설이란 말에 세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나 영지 만들래! 영지 만들고 싶어! 벨져 지원할 거야!”
“세나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희는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주인의 적극적인 찬성에 제임스 또한 큰 반대 없이 받아들이겠단 뜻을 드러냈다.
속으로 만족의 미소를 지은 순간, 이사벨과 눈을 마주쳤다.
자신만큼은 어림도 없다는 속뜻이 훤히 엿보였다.
“영지를 만들겠다는 걸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에요. 언제, 어디서 다른 후보들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오락 시설이나 구상할 때가 아니라고요!”
“그런 것치곤 카드 게임하시느라 밤새신 걸로 압니다만?”
“머, 머리를 식히기 위한 휴식일 뿐이에요!”
눈이 뻘겋게 질릴 때까지 노는 휴식도 있나 보지?
뭐, 사실 이사벨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나를 지킬 수단을 하나라도 더 구축해도 모자랄 시기에, 내 이름을 건 영지를 만들겠다니.
그건 내가 보호해야 할 존재를 하나 더 늘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단면적으로 봤을 땐 그러겠지.
하지만 내가 영지를 만들고자 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메이야. 잠깐 앞으로 나와봐.”
여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이가 내 부름에 쪼르르 다가왔다.
“우리 메이는 무려 주인과 똑같은 모방체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날씨까지 바꾸는 초 상위마법도 부릴 줄 아는 엄청난 마족입니다.”
뜬금없는 퍼밀리어 자랑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메이야. 네 지팡이 좀 모두에게 보여줘.”
“제 지팡이 말인가요?”
살짝 머뭇거리던 메이는 곧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손을 앞으로 뻗어 지팡이를 세웠다.
이에 지팡이에 새겨진 작은 글씨를 모두가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나와 브릴리스만 알고 있던 메이의 출신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크, 크라우넬?”
무려 전대 마왕의 퍼밀리어이자, 마법의 대가라 불렸던 아만 크라우넬의 후손.
그 엄청난 마족의 후손이 지금 내 퍼밀리어로 있다.
“어쩐지 마족의 그릇이 남다르다 싶었더니만, 설마 크라우넬의 핏줄이었던 거예요?”
이사벨의 물음에 메이는 부끄러운 듯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런 메이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와 메이는 제가 마왕 후보가 된 최근까지, 아무런 접점이 없었습니다. 그냥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이고. 그녀의 정체를 뒤늦게 파악한 제가 퍼밀리어로 들인 것이죠. 저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메이는 물론, 지금의 저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당신들의 만남이 지금 얘기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전 이 마계에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메이 같은 마족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과 가능성을 가진 마족들을 찾고, 발굴하는 것. 이것이 제가 영지를 만들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생존을 위한 의식주가 해결되면 인간에겐 비로소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생기게 된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을 이 인생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지.
그게 마족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 마족들을 찾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그야 당연히, 제 마족으로 만들어야죠.”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나를 지키고, 더 나아가 이 마계를 지킬 당당한 구성원으로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