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68
제68화. 대면
지구 속담 중 ‘삼회노붕우(三回老朋友)’라는 말이 있다.
처음 만나면 생소하지만, 두 번 만나면 친숙해지고, 세 번 만나면 오랜 친구가 된다는 뜻이다.
약속되지 않은 우연한 만남만 벌써 세 번째.
물론, 나이 차이 한참 나는 이 어르신과 친구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느샌가 친숙함이 생겼는지 나도 모르게 그녀를 할머니라 불렀다.
“여기 사는 건 아니라네.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본의 아니게 며칠을 묵고 말았지. 이제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네.”
토끼 같은 손녀딸이나 보러 오신 것 같진 않고.
상인답게 새로운 상권이라도 개척하러 오셨나?
왠지 가벼운 목적으로 오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말을 나누던 마르샤는 문득 내 옆에 있는 이사벨을 쳐다봤다.
“오늘은 다른 아가씨와 함께 있구먼? 하여튼, 대단하신 후보님이야. 다방면으로 능력이 뛰어나시군! 끌끌!”
한창 좋을 때라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끌끌 대는 모습이 영 개운치 않았다.
일면식조차 없던 나를 고작 검 하나만 보고 정체를 파악한 그녀가 이사벨을 몰라볼 리는 없을 터.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알기에 저런 농담도 하는 거다.
문제는 이걸 나뿐만이 아닌, 이사벨도 함께 들었다는 점인데,
평소의 그녀라면 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화를…….
“그럼 데이트를 방해할 순 없으니. 난 이만 가보도록 하겠네.”
“예, 뭐. 조심히 가십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벨져 후보.”
또 보자고?
우리가 다음에도 다시 만날 거란 걸 지금 예고한 건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길 가다 우연히 지인을 만나 인사하고, 헤어진, 평범한 상황이 지나갔다.
웬일로 조용하다 싶은 이사벨을 돌아보려는 순간,
“뭐, 뭐에요!?”
이사벨의 뒤늦은 반응에 몸이 화들짝 들썩였다.
“저 노파……. 아는 마족이에요?”
“아, 예. 이전에 암시장에서 사이클롭스의 피를 구매했던 가게의 주인입니다.”
추가로 여정 중에 만난 인연이 있긴 하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이사벨은 떠나는 마르샤의 뒷모습과 내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보았다.
보기 드문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로.
“무슨 문제 있습니까?”
“당신, 저 마족이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죠?”
“상인 아닙니까?”
“상인이겠어요!!!”
이사벨은 크게 소리치며 ‘당신 대체 아는 게 뭐야?’라는 속뜻이 담긴 특유의 대찬 반응을 보였다.
흠. 이 표정도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이제는 나도 거의 즐기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저 마족, 마르샤 해멀린 이잖아요!”
“마르샤 해멀린이요?”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풀네임이었다.
“그래요! 100년 전 레지에타 침공에 참여한 마왕군 중 아직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생존자이자, 현존하는 순혈 마족 중 유일하게 전대 마왕과 대면한 마족이라고요!!”
이사벨의 말이 끝나고 정확히 3초가 지난 순간,
반쯤 무신경하게 감겨있던 내 눈꺼풀이 찢어질 듯 크게 번뜩였다.
“……예?”
그렇게 눈과 입을 벌린 부동의 자세로 말없이 1분여간 서 있었다.
* * *
레지에타에 사는 인간의 평균 수명은 약 70세 정도.
물론 삼시세끼 잘 먹고, 아프면 제때 치료받으면서 산 인간 기준이다.
마족의 수명도 이와 비슷하다.
종족에 따라 다르지만, 마족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마인족의 경우 길게 살아야 80 정도라고 하며, 이사벨 같은 순혈 마족도 그거와 비슷하다고 했다.
자, 지금은 전대 마왕이 사후한지 무려 100년이 지난 시대다.
태어나자마자 마왕군에 차출된 게 아니고서야, 마왕군에 소속되었던 마족이 지금까지 살아있다?
그럼 못해도 최소 110살은 넘었다는 뜻이다.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봐야겠지?
지구에는 그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도 있으니까.
근데 그 정도면 인간이 아닌, 그냥 신선이라고 보는 게…….
차라리 용사였다가 마족으로 환생한 내가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건 아닌가?
어쨌든 그 할머니.
이제 보니 엄청난 동안이셨네.
누가 그 얼굴을 보고 100살이 넘은 장수자라고 생각하겠어?
“암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한단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그 엄청난 분이…….”
이사벨은 아직 만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잔잔히 숨을 내쉬었다.
“제가 몰라서 묻는 겁니다만, 그 할머니 아니, 마르샤란 마족이 왜 대단하단 겁니까?”
“당연히 대단하죠! 무려 전대 마왕과 접한 적이 있는, 이 마계에 둘도 없는 마족이에요. 식견이 얼마나 뛰어나겠어요? 우리 쪽에서도 몇 번이고 고문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니까요? 자기는 더 이상, 마왕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면서…….”
흠. 당연하지 않나?
그 긴 세월 동안 용사에게 패배한 마왕 군이라면서, 갖은 모욕과 멸시를 다 받았을 텐데,
이제 와 다시 마왕이 필요해질 때가 되니까 너도나도 모시려 한다면…….
나 같아도 손가락 올리면서 꺼지라고 하겠네.
아무튼, 엄청난 정체를 가진 할머니라는 건 알겠다.
나중에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걸로 하고,
일단은 이쪽 일에 집중해야겠지.
나와 이사벨은 현재 목적지였던 다일 후보의 본가에 와 있다.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접견실에서 집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제 주인이 날 죽이려고 했단 사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들은 하나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절제된 태도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전의 회담장에서처럼 행여나 나를 가볍게 보려는 마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위상이 상승한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동행한 이사벨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그나저나 이 집은 되게 소박하군요? 모르고 오면, 마왕 후보의 집이란 생각을 못 할 것 같습니다.”
“다일 후보의 검소한 성격이 반영됐다고 봐야겠죠. 누구랑은 다르게…….”
호화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빈약한 것도 아닌,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집.
정말 딱 갖출 것만 갖춘 집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영지부터 해서 집까지, 정말 보면 볼수록 참된 영주의 표본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끼익
이내 접견실의 문이 열리며, 집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누추한 제 본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벨져 후보.”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며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의미였다.
나는 바로 잡지 않고, 그의 손을 약 3초간 쳐다봤다.
그러다 악수에 응하며 말했다.
“네, 뭐. 문전박대는 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다.
내가 봐도 예의를 밥 말아 먹은 무례한 대답이라는 거.
근데 애초에 내 암살에 협력한 놈에게 예의를 차린다는 것도 웃기잖아?
다일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맞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들더니 무덤덤하게 앉았다.
“일전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뭘 사과한다는 겁니까?”
“네로 후보를 도와 벨져 후보를 암살하려 했던 일 말입니다.”
뻔뻔히 인사하길래, 혹시 까먹었나 싶었는데 기억은 하는 모양이다.
사과를 받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짚고는 가야겠지.
“수페르비아 가문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죄하죠.”
다일은 아예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허, 이런 식으로 쿨하게 사과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쉽게 사과를 받아서 그런지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일 후보는 애초부터 날 죽일 마음이 없었던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정확히는 네로 후보에게 협력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협력 안 한다 했으면 된 거 아닙니까? 굳이 협력하는 척까지 하면서 일을 번거롭게 만든 이유가 뭡니까?”
난 이걸 알고 싶었다.
차라리 도중에 마음이 바뀐 거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다.
내가 성인군자(?)라서 다행이지, 속 좁은 마족이었어봐.
이렇게 네놈 앞에서 가만히 있지도 않았을걸?
벌써 깽판이 일어났을 것이다.
“벨져 후보를 시험할 생각이었나요?”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이사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벨져 후보에게 함정이 있다는 걸 알리라고 퍼밀리어한테 지시하셨다면서요? 그 상황에서 벨져 후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싶었던 건가요?”
“맞습니다.”
다일은 이번에도 순순히 인정했다.
“이리 말하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이번 마왕 후보 경합이 끝날 때까지, 서로 간에 피 흘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뭐야? 이 평화주의자나 할 법한 발언은?
“비록 지금은 단일화를 했다곤 하나, 이사벨 님을 비롯한 우리 여덟 명은 누가 마왕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힘과 권위를 지닌, 마계에서 제일가는 마족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 끝까지 가보자며 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혼란이 일겠죠.”
“맞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동반되는 혼란은 고스란히 마계의 힘없는 소시민들에게 전가될 겁니다. 그런 파괴된 마계에서 마왕이 되봤자, 이미 희생된 마족들의 삶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저 말이 진심이든, 가식이든 간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묘한 흥미가 돋았다.
반면 이사벨은 동의하지 않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다일 후보는 그게 정말로 가능할 거라 보시나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저보다 벨져 후보께서 더 잘 해주실 거라 봅니다. 벌써 두 명의 후보님과 단일화를 이루셨잖습니까요?”
글쎄올시다.
나로선 둘 다 계획한 일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서 말이죠.
굳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답해줄 필요는 없을 터.
“그럼, 다일 후보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봤습니까?”
나는 화제를 돌리고자, 다른 걸 물었다.
“피할 거라고 봤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정보를 누설했단 흔적을 네로 후보 쪽에도 남기려 했습니다. 그럼 벨져 후보 쪽에선 자연히 네로 후보를 더 경계하게 될 테고, 네로 후보도 더는 우리와 협력하지 않을 테니, 다시 균형 구도가 이루어질 거라 봤습니다.”
“그건 너무 리스크가 큰 도박 아닙니까?”
“위험성이 컸다곤 해도, 어차피 감당하는 건 저이기에 상관없었습니다.”
예전에 이사벨이 내게 말했지.
교만의 종주 다일 수페르비아는 철저한 이득주의이며, 마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도 누구보다 강한 후보라고.
하지만 지금 그에겐 그런 성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 말했던 이사벨조차 그의 속내가 파악되지 않는 듯 긴가민가한 반응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손수 사과도 하셨으니, 지난 일을 굳이 붙잡고 늘어지진 않겠습니다. 사실 오늘 제가 다일 후보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다른 이유 말입니까?”
이건 예상 못 했는지, 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나는 숨길 것 없이 본래의 방문 목적을 당당히 밝혔다.
이야기를 들은 다일은 턱을 어루만졌다.
“갈 곳 없는 마족들을 위한 영지를 만들려 하신다라……. 그럼 영지 운영과 관련해서, 제게 조언이라도 구하러 오신 겁니까?”
“해준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야죠.”
사실 자문보다는 탐색이 본 목적이었지만,
대놓고 뜻을 드러내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에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에 다일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접견실을 나갔다.
3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돌아온 그는 대뜸 내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제 대답은 이걸로 대신하겠습니다.”
“이건…?”
“제가 영지를 다스리면서 있었던 일들과 터득한 운영 노하우 등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읽어보시면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대충 겉면의 글씨만 봐도 손때가 엄청 묻은 것이 느껴지는 일기였다.
나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수확품이다.
“이런 걸, 제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다른 후보가 영지를 만든다고 하면,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벨져 후보님이기에 믿고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더 부담되는데요? 대체 저의 뭘 믿고 이걸 주신다는 겁니까?”
“제 영지보다 훨씬 더 마족들을 위한 영지를 만드실 거란 믿음……. 이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거참 보면 볼수록 더 알 수 없는 놈이 아닐 수 없다.
분명 내 쪽에서 계속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고 있긴 한데,
어째 찝찝한 마음이 좀처럼 안 사라진단 말이지.
잔잔히 일기를 뒤적거리던 나는 다시 그를 보며 물었다.
“다일 후보는 나한테서 뭐 필요한 거 없습니까?”
옛말에 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상대로부터 원하는 걸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나의 뭘 원하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걸.
여러 이유를 갖다 붙이고 있긴 하나, 이 다일이란 자도 결국은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기에 이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라 본다.
분명히.
“벨져 후보께 뭔가를 받고자 이걸 드리는 건 아닙니다.”
“저도 아무런 지불 없이 이런 귀중한 걸 받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물어본 겁니다. 적당한 선에서 뭐든 말해 보시죠.”
다일은 잠시 내 눈을 피하며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 온 것 같군요.”
그러다 갑자기 바깥쪽을 쳐다봤다.
“벨져 후보께서 괜찮으시다면, 이걸 부탁하고 싶군요.”
“말씀하시죠.”
-똑똑
그때 누군가가 접견실의 문을 두드렸다.
다일은 문소리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끼익
이내 문이 열리며, 문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에 익숙한 장검을 차고 있는 백발의 마족.
다일의 퍼밀리어 페르였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꾸벅 숙였다.
“벨져 후보님을 뵙습니다.”
대충 기운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진 않았다.
거기에 다일이 내게 뭘 요구할지까지 덩달아 예상이 갔다.
“제 퍼밀리어와 검술 대련을 해주시겠습니까?”
딱 예상대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