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71
제71화. 불청객
살다 보면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저지를 때가 있다.
평소의 나라면 굳이 잠든 이사벨의 몸을 안고 방에 데려간다는 이런 위험한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것이다.
그냥 ‘다 왔으니 일어나세요’ 하고 매정하게 깨웠겠지.
그래. 이건 엄밀히 말해 내 자의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이지.
지금 변명하는 거냐고?
아니, 이건 탓하는 거다.
저 요망한 서큐버스가 주변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거라고.
“이 야밤에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일단 상황 정리를 위해 마차에서 나온 후 루비아와 대면했다.
루비아는 요염한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야 당연히 놀러 왔지! 물론 지금 온 건 아니야! 낮부터 왔었는데, 네가 이사벨이랑 단~둘이 외출했다길래, 너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루비아는 ‘단둘’이라는 단어를 특히나 힘줘서 말했다.
“주인이 없으면 다음에 다시 오면 되는 거 아닌가?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대기하는 건 무슨 무례한 경우지?”
이에 이사벨은 정색한 얼굴에 냉기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천사처럼 곤히 자던 조금 전과는 완전 딴판인 본래의 드센 그녀로 돌아왔다.
근데, 잠깐만.
그거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전에 내가 마검 만들러 외출한 사이, 내 집에서 닷새를 죽치고 있었던 게 누구셨더라?
얘기해 봐야 지금 상황에선 별 도움 안 될 것 같기에 그냥 닥치고 있기로 했다.
“왜 이리 흥분이실까? 둘이 노는 데 내가 방해해서 그런 거야? 난 욕망의 향기를 좇아 왔을 뿐이야. 냄새를 따라왔더니,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웃기고 있네.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줄 알았으니까, 따라온 거겠지.
아,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난 하늘 아래 맹세코, 이사벨에게 욕망을 품은 적이 없다.
내 행위는 지극히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뭐 거기에 까만 점 하나 정도는 찍혔을지도…….
“이사벨 안고서 뭐 하려고 했어? 벨져 후보?”
날 보고 싱긋 웃으며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다.
진짜 저 꼬리를 잘라 버려야 하나?
“이사벨 님께서 너무 곤히 주무시길래, 방으로 옮겨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방으로 데려간 다음엔 뭘 하려 했는데?”
“하긴 뭘 합니까? 저도 제 방으로 가서 잤겠죠.”
루비아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를 시전했다.
“거짓말을 할 거면, 좀 그럴싸하게 해봐 벨져 후보. 솔직히 그냥 다 왔다고 깨워서 같이 들어가면 됐던 거 아니야? 뭐 하러 번거롭게 자는 그녀를 안아서 데려가려 했던 거야?”
너 때문이라고! 너!
네가 몽마족의 요망한 기운을 풍겨서 그런 거잖아!
“그래, 벨져 후보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럼 이사벨 넌 뭐야?”
“내가 뭘?”
“너 안 자고 있었잖아.”
음?
“천하의 이사벨이 자기 몸에 남자가 손을 댔는데, 아무렇지 않게 받아줘? 어머~! 지나가던 멍멍이가 웃겠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이뉘디아 가에 살면서 경험한 암살 횟수만 셀 수 없이 많다던 그녀가 내 터치에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가 없…….
이 여자 설마?
“내기할까 우리?”
말도 못 할 만큼 당황할 거란 예상관 다르게, 이사벨은 진중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가슴에 달린 마혈석을 내보였다.
“꿈을 지배하는 몽마족의 대표가 잠의 유무까지 판별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잖아? 난 내가 자고 있었단 거에 내 힘 전부를 걸 수 있어. 넌 뭘 걸래?”
뭐야? 왜 갑자기 극단적으로 나오는 건데?
이거 맞아?
“자신 있으면 네 마혈석도 걸어. 루비아.”
이사벨의 날 선 요구에도 루비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물렁해진 건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죽지 않았네 이사벨?”
당황은커녕, 오히려 흥미롭단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 * *
찾아온 손님을 이 늦은 밤에 내쫓은 무례한 행위를 할 순 없을 터.
(사실은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다른 이의 방을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 조건으로 루비아와 미켄, 두 몽마족 남매의 하룻밤 숙식을 허가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건 이사벨이 제안한 조건이다.
아마 명분을 만들려는 속셈으로 본다.
조건을 어기고 허튼짓을 했다간, 그땐 진짜로 죽여버리겠다는…….
아무튼, 지금은 온건파 지부에 다녀온 브릴리스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그녀의 방으로 왔다.
다일의 일기를 본 브릴리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정말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희에게 부족한 실전적인 운영 경험을 보완해주고도 남을 정도로요. 이건 마계 어디에서도 못 구할 겁니다!”
내용이야 나도 오면서 봤으니, 브릴리스의 저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런 걸 정말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영지를 실질적으로 만들고, 운영하는 건 네가 될 테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옳다고 봐. 그 일기를 바탕으로 너도 후대에 길이 남길 영지 일기를 만드는 것도 좋지 않겠어?”
“벨져 님의 그 값진 조언. 잊지 않고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브릴리스는 좋은 의견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다일 후보님의 영지라면, 저도 이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저조차도 여기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샘솟는 곳이었지요. 이번 벨져 님의 영지도 꼭 그런 마음이 드는 영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최선을 다하다가 쓰러지지만 말고…….”
주먹을 불끈 쥔 브릴리스는 영지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하아암….”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았는지, 입에서 대뜸 하품이 터져 나왔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얼른 방으로 가서 쉬심이 어떠신지요?”
“그래야지. 너도 온건파 지부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 그만하고 쉬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녀라면 아마 몇 시간은 더 업무를 보지 않을까 싶다.
“아 맞다.”
나가려다 말고, 다시 브릴리스를 돌아보았다.
“브릴리스. 혹시 온건파 단원 중에 다른 후보의 영지에서 살다 온 마족들은 없어?”
“다른 후보의 영지 말입니까?”
“응. 예를 들면, 베누스 후보의 영지라든지…….”
브릴리스는 잠시 눈을 끔뻑이며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제가 모든 단원의 출신을 아는 건 아닌지라, 그 부분에 관해선 확인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알아봐 줘.”
“예. 벨져 님.”
브릴리스는 내 지시를 업무 일지에 꼼꼼히 기억했다.
대화를 모두 마친 나는 지친 몸을 이끌며 방에서 나왔다.
안 그래도 피곤했던 몸이 예기치 않게 찾아온 불청객 덕에 더 피로해졌다.
빨리 침대에 코를 박고 싶단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니,
“왔어요?”
내 방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사벨과 마주쳤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네. 벨져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이사벨은 진중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내 방문 앞을 꽉 막고 있었다.
뭐야? 뭔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절로 긴장감이 솟은 나머지 침이 꿀떡 삼켜졌다.
“호, 혹시나 오해할까 봐, 당신이 또 괜한 생각 할까 봐, 말해주는 거예요!”
허나 짧은 침묵 끝에 입을 뗀 그녀의 목소리엔 온갖 떨림이 가득했다.
“나 자고 있었어요!”
“예?”
“자고 있었다고요! 마차 안에서 당신이 날 건드린 것조차 못 느낄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어요! 일부러 자는 척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만 벌렸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데서나 자는 여자라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조, 좀 전 같은 경우는 벨져 당신이 편해서…….”
“잘 안 들립니다.”
“당신이 편해서 그랬던 거라고요! 내 몸을 의지하고 맡길 정도로 편하고 의지가 되니까, 나도 안심하고 잔 거예요! 다른 마족들이었으면 어림도 없었다고요!”
이것은 변명인가? 남 탓인가?
그래, 정리하자면 잠을 잔 건 맞는데, 내가 아니었으면 잤을 일도 없었을 거란 말이잖아?
아니 근데, 마혈석까지 걸면서 당당하게 주장한 마당에 굳이 나한테 해명할 필요가 있나?
이사벨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요?”
“사실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뭐가 마찬가지였단 거죠?”
이사벨은 급 눈초리를 세웠다.
“저도 이사벨 님이 있었기에 잘 수 있었던 겁니다.”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이사벨은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아마 마차에 이사벨 님이 아닌 메이나 다른 마족이 있었다면, 저도 그렇게 정신없이 자진 않았을 겁니다. 이사벨 님이 계셨으니, 안심하고 편히 잘 수 있었던 거죠. 이사벨 님은 제가 이 마계에서 유일하게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분이니까요.”
가식 같은 걸 부리는 게 아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는 명백한 진심이다.
내 몸을 타인에게 믿고 맡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타인이 본인에게 있어 전부를 줘도 안심이 될 만큼 의지가 되지 않고선 그럴 수 없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사벨 그녀는 내게 그런 존재다.
내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가 되어도, 옆에 그녀가 있다면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의지가 되는 존재 말이다.
“무, 무슨, 그런 말을……!”
얼굴이 더욱 붉어진 이사벨은 뭐라 말하는지조차 못 알아들을 만큼, 혀가 심히 꼬여 버렸다.
“근데, 정말 그것뿐이었어요?”
“뭐가 말입니까?”
“나 안은 이유 말이에요. 그냥 침대로 데려가려 했던 게 다예요?”
“다입니다만…….”
내 대답에 이사벨은 이유 모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분위기가 갑작스레 어색해져 버렸다.
불편한 헛기침과 껄끄러운 침묵이 이어지던 찰나,
“어머~!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사벨 님이라니! 어쩜 그런 낭만적인 말이 다 있을까~!”
복도 모퉁이에서 원치 않는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모습을 드러낸 불청객은 요망스러운 꼬리를 흔들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이사벨은 좋겠네? 이리 든든한 벨져 후보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으니 말이야! 내가 다 부러울 정도인데?”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순식간에 얼굴이 돌변한 이사벨은 목소리마저 잔뜩 내려앉았다.
“방 드나들지 말랬지, 복도 돌아다니지 말란 말은 안 했잖아? 여긴 엄연히 복도라고! 복도! 모두가 지나다니는 복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반박할 건더기는 없었다.
못마땅함이 극에 달한 이사벨은 이를 드러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 조건을 즉석에서 더 추가해야겠네. 복도도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얌전히 방에 있어. 괜히 돌아다니다가, 남의 대화나 엿듣지도 말고.”
“우리 질투의 종주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난 둘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아주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벨져 후보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 거랍니다~!”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이란 말에 표정이 싹 굳어졌다.
내가 마족으로 환생하고 들은 말 중 가장 신뢰가 안 갔다.
“그런 의미로 우리 방에서 오붓하게 담소 좀 나누는 게 어때요 벨져 후보? 밤은 아직 긴데, 이대로 자긴 아쉽잖아!”
아니요. 난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만?
오늘 영지 방문에, 대련에,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맞이까지 한 터라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라서 말이죠.
전 이제 그만 쉬고 싶거든요?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재워주는 걸 고맙게 여겨도 모자랄 판에, 뻔뻔하게 독대까지 요청하시겠다? 혹시 루비아 후보께선 예의라는 걸 집에 두고 오신 건가요?”
이런 내 의중을 헤아리기도 한 걸까?
이사벨은 특유의 비열한 눈웃음을 지으며 루비아를 도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나 대신 거절의 의사를 밝혀준 건 고맙긴 한데,
어째 속이 시원하다기보단, 불안하단 말이지.
그 말은 선을 좀 넘은 게 아닌…….
“가만 듣자 듣자 하니까 묘하게 거슬리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루비아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서려 있었지만, 그 미소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마 그녀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이사벨 넌 이제 후보도 아니지 않니? 마계의 미래를 위해 후보끼리 진중한 대화 좀 나누겠다는데, 끽해야 협력자에 불과하신 우리 질투의 종주께서 왜 끼어들려 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후보의 협력자로서 후보를 향한 불순한 접근을 차단하려는 것뿐 다른 의도는 없어요. 다른 후보라면 몰라도, 우리 루비아 후보에 대해선 너무나도 잘 아는 저이니, 더더욱 막아서려는 것뿐이지…….”
“어머~! 누가 들으면 내가 벨져 후보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다~!”
저기 숙녀님들?
어차피 말려봐야 안 들을 거 아니, 그만하란 말은 안 하겠는데…….
이왕이면 다른 데 가서 싸워주시면 안 될까요?
전 이제 좀 자고 싶거든요?
저 꼴을 계속 보자니, 차라리 세나와 밤새 카드 게임 하는 게 더 낫겠단 생각이 속에서 강하게 번져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