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78
제78화. 호의는 누구에게나
건물 외벽이 오색의 보석으로 치장된 아와라티아의 본가.
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바쁜 보석들과 다르게 집주인의 낯빛은 그리 밝지 못했다.
평화롭다.
달리 말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고 있지 않다.
일어나선 안 될 고요함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네로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째서냐…….”
교만의 종주 다일과 손을 잡고, 벨져를 제거하려 했었다.
벨져가 나태의 종주를 만나기 위해 청해로 갔단 정보를 입수하고선, 그를 돌아오는 길에 암살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허나, 계획은 실패했다.
손을 잡기로 한 다일 쪽에서 뒤통수를 친 것도 모자라, 벨져와 세나 두 후보가 단일화를 이뤘다는 믿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말이 좋아 계획 실패지,
그냥 망한 거였다.
거슬리는 후보 한 명을 죽이려다 졸지에 역으로 적을 더 늘리고 말았다.
분노는 둘째치고, 지금은 일을 수습해야 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왜 이리 조용한 것이야?”
벨져 측에선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왜? 뭐 때문에?
그로선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을 벼르고 있다는 간접적인 메시지라도 보내야 정상일 텐데,
사실상 무시라고 해도 다름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피를 말리게 할 치밀한 계략을 구상 중이거나,
아님, 자신 따위는 가당치도 않다며, 그냥 무시하고 있다거나.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쾅!
기어이 화가 터진 네로는 탁상을 주먹으로 연신 내리쳤다.
-쾅! 쾅! 쾅! 콰직!
탁상은 부서졌지만, 네로의 분노는 해소되지 않았다.
죽여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죽여야 한다.
소유고 나발이고, 이젠 그냥 죽이고 싶단 감정밖에 남지 않았지만,
“젠장!”
현 상황에 정면으로 멸망전을 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벨져, 이사벨, 세나, 그리고 다른 위치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다일까지.
이제는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나도 많아져 버렸다.
“대체 어디서 그런 놈이…….”
지금은 정보를 모아야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정보를 박박 긁어모아 한시라도 빨리 그의 약점을 찾아야 한단 생각을 하던 도중,
“네로 님.”
네로의 등 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퍼밀리어인 이노투스가 나타났다.
네로는 돌아서지 않은 채 무심하게 답했다.
“뭐야?”
“지금 암시장에 벨져 후보가 왔다고 합니다.”
그 말 한 번에 무거운 엉덩이가 크게 들썩였다.
* * *
-띠링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
소리에 끌려 고개를 든 가게 주인은 나를 보고선 ‘오’하는 짧은 감탄을 내질렀다.
“다시 볼 줄은 알았지만, 이리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의외네요. 전 금방 다시 볼 줄 알고 그런 말을 하신 줄 알았는데.”
“끌끌. 그래도 오늘은 검을 잘 숨기고 왔구먼.”
마르샤는 망토로 가려진 내 등 뒤, 살짝 솟아오른 검 자루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여기 와선 숨길 것도 없기에 나는 답답한 망토를 벗어 던진 뒤,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오늘은 혼자 왔나?”
“일단 이 안까지는 혼자 왔습니다. 저번처럼 괜한 이벤트에 휘둘리면 곤란하니까요.”
나는 질질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보 좀 사러 왔습니다.”
“정보? 난 마수의 사체를 파는 상인이지, 정보상은 아니네만?”
“공짜로 주시면 더 좋고요. 듣자 하니, 할머니께선 과거에 레지에타를 침공한 마왕 군단의 일원이셨다면서요?”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녀의 입에 서렸다.
“그 질투하는 아가씨께서 말해줬나?”
나는 알아서 해석하란 의미로 어깨만 들썩였다.
마르샤는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자네는 보지 못했을, 전대 마왕의 얼굴을 봤던 마족이 바로 나일세.”
“……동안이시네요.”
“고맙네.”
그놈 얼굴을 봤든 말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나도 지겹도록 봤으니까.
“나이를 먹어도 칭찬엔 어쩔 수 없는 법이구먼. 그래서 뭐가 궁금하신가 벨져 후보?”
“분노의 종주…….”
그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베누스 후보와 이라(ira) 가문, 그리고 그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에 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아는 대로 얘기 좀 해주시죠.”
“내가 아는 걸 얘기하기 전에, 자네가 아는 것부터 먼저 얘기하는 게 어떻겠나? 그래야 나도, 자네가 뭘 듣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잠시 천장을 보며 머리를 정리했다.
베누스 이라.
칠죄종 중 분노를 상징하는 이라 가문의 마왕 후보.
그의 영지는 마계 북동쪽에 위치한 대삼림지대로 세나가 살던 청해(靑海)처럼 고유 지명이 있다.
적림(赤林).
이름 그대로 붉은 숲이란 뜻이다.
나무와 풀을 비롯한 식물들이 핏물에 적셔진 듯, 새빨간 색을 지니고 있으며, 가뜩이나 하늘도 새빨간 마계 특성 때문에 마계 중에서도 가장 음침한 분위기가 형성된 지역이라고 했다.
그래도 원래부터 붉었던 건 아니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적림지대 중심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퍼져, 그 지역 전체를 감염시켰고,
이로 인해 한동안 마족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전락하였다.
그 죽음의 땅을 구원한 이들이 바로 이라 가문의 마족들.
그들은 역병에 고통받던 마족들을 치유해준 것에 이어, 역병에 더럽혀진 땅을 정화했으며, 이후엔 자연스레 적림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기를 60년.
이라 가문은 순혈 마족이 아닌, 혈마족이라고 하는 독특한 능력을 지닌 마족들이며, 그 능력에 구원받은 마족들과 후손들은 그 은혜를 지금까지도 간직한 채, 그 영지에 살고 있다.
내가 아는 건 대충 이 정도.
내 이야기를 들은 마르샤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 이상으로 잘 알고 있구먼. 내가 특별히 뭘 더 알려줄 건 없을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더 궁금하다는 거지?”
“할머니도 적림인지 하는 거기, 다녀오신 적 있죠?”
“물론이네.”
“거기 사는 마족들은 정말로 살기 좋아 보였습니까?”
마르샤는 다시 한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살기 좋아 보인다라. 여러 해석으로 갈릴 수 있는 질문이로군. 확실한 기준을 말해주게. 자네가 말하는 살기 좋아 보인다는 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거지?”
살기 좋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허나 그건 이 할머니의 말대로 개인마다 기준이 다르기에 해석이 갈릴 수 있다.
그녀가 정확한 답을 낼 수 있도록 기준을 정해보자면,
“그들은……. 웃으면서 살고 있었습니까?”
이게 되겠지.
마르샤는 바로 답을 내었다.
“아니.”
일말의 고민도 안 느껴지는 칼 같은 대답.
마르샤는 말을 이었다.
“난 그 땅에서 단 한 번도 웃음이란 걸 본 적이 없네.”
이전에 이사벨이 말했었다.
베누스 후보의 영지에 사는 마족들은 전부 다 웃고 있었다고.
전혀 일치하지 않는 둘의 말.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은 내게 잘못된 사실을 전하고 있단 뜻이 된다.
어쩌면 둘 다 맞을 수도 있겠지.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웃는 게 아닌 마족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베누스 이라 그자는 본인의 영지민들에게 있어,
절대 웃음을 보일 수 없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베누스 후보를 비롯한 이라 가문의 일원들은 알다시피, 혈마족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능력을 지닌 일족이라네. 체내에 흐르는 피의 온도를 조절해 신체를 극한의 수준까지 강화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이지.”
피의 온도를 조절한다라.
순간 일련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적림지대에 퍼졌다던 역병은 정확히 어떤 증상을 일으켰습니까?”
“시작은 가벼운 기침과 발열 증상을 보이다가, 병이 진행되면 전신에 걸쳐 광범위한 반상출혈(斑狀出血)이 일어난다네. 이후엔 점점 살이 검게 썩어들어가지. 당시 역병에 죽은 마족들의 시체를 살펴보면 죄다 피가 검게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네.”
살이 검게 썩어?
듣자 하니 과거 지구에서 유행했다는 흑사병(Pest)과 증상이 유사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의사는 아니기에 정확한 진단을 할 순 없다.
하지만,
“피의 변화를 일으키는 병과 피를 다루는 일족…….”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이 둘의 연관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거만큼 미련한 것도 없겠지.
“근거는 없네.”
이런 내 속내를 눈치챘는지, 마르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자네가 하는 생각은 나를 비롯해 누구든 해봤을 것이야.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증거가 없는 가설은 추측에 불과하지.”
“예, 뭐 그렇겠죠.”
“자네가 증거를 찾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왠지 그러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잠시만 기다려주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마르샤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3분 정도 후에 다시 나온 그녀는 내게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상자 안에는 뭐가 담겨있는지 모를 작은 약병이 열 개 정도 들어있었다.
“뭡니까 이건?”
“적림지대로 가면 공기가 익숙하지 않아 목이 매우 답답할 걸세. 그때마다 이걸 마시게나. 목과 더불어 정신도 맑아질 것이야.”
“저 거기 간단 말 안 했습니다만?”
“안 갈 건가?”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어 입꼬리만 애매하게 올렸다.
잠시 약병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얼맙니까?”
“돈은 됐네. 나중에 다녀오면 후기나 좀 들려주게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물질적인 보상보단, 흥미로운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는 법이거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깁니다.”
상자를 재빨리 챙긴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태와 교만에 이어 이제는 분노인가? 자네도 참 바쁘게 돌아다니는군. 보기와 다르게 굉장히 활동적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렇게 망토를 다시 몸에 두르고 돌아서려던 순간,
“만약 그 베누스란 후보가…….”
마르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자네의 기준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지?”
그 말에 나는 유유히 몸을 돌렸다.
저 물음엔 그녀의 확신이 하나 껴있다.
내가 그 베누스란 후보와는 절대 어울리지 못할 것이란 확신.
만약 그 확신이 현실이 된다면,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합니까?”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겠지.
내가 바라고자 하는 마계에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게 있으면,
“죽여야죠.”
난 가차 없이 없앨 뿐이다.
내 단호한 대답에 마르샤는 묘한 표정을 보였다.
나는 다시금 몸을 돌렸다.
“아무튼,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마수 사체를 구하러 가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 한 번 정도는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호의를 베풀어주겠다는 건가? 마왕 후보의 호의라니, 이거 영광이군.”
마르냐는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호의 얘기가 나온 김에 이 말 하나만 더해주지.”
그러다 대뜸 목소리를 내리깔며, 분위기를 바꿨다.
가게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호의라는 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베풀어 줄 수 있는 거라네. 하물며 내겐 자네나, 다른 마왕 후보나,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아무 마족이든 상관없이, 전부 같은 존재들이란 것을 꼭 인지해두게나, 벨져 후보…….”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가게 문 앞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나를 보며 마르샤는 의미 모를 미소만 지을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 * *
벨져가 떠나고 약 한 시간 뒤.
-땡그랑!
가게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종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마르샤는 여유롭게 고개를 들어 손님을 마주했다.
벨져가 방문했을 땐 다소 놀랐던 것과 다르게, 이번엔 올 손님이 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바로 이 암시장의 주인인 네로였다.
“생각보다 좀 늦었구먼. 벨져 후보는 이미 한참 전에 갔다오.”
“상관없습니다!”
네로는 어디서 장거리 질주라도 하고 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이윽고 거구의 몸을 이끌며 터벅터벅 마르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벨져 그 자식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질문을 던지는 네로의 눈엔 엄청난 독기가 서려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