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79
제79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두를 불렀다.
낮잠 중인 세나를 제외한 브릴리스, 메이, 이사벨, 그리고 제임스가 모인 자리에서 당당히 말했다.
내 다음 행선지에 대해서.
“결국 가시려는군요. 적림에…….”
“어. 저 마족들이 아니더라도, 근시일 내에 가려고 했어. 마침 이유가 겹친 거지.”
“제가 준비해 드릴 거라도 있으신지요?”
“있을 리가 없잖아. 넌 내가 없는 동안에도 영지 만드는 거에나 전념해줘. 내가 돌아왔을 때쯤엔 작은 결과물이라도 볼 수 있게.”
브릴리스는 꼭 그러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비록 지금은 정화된 땅이라고 해도, 적림은 아직 역병의 잔재가 남아있는 땅이에요.”
이야기 내내 고심하던 이사벨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곤, 이사벨 님도 한 번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었어요. 적림에 들어가기 전에 정령의 가호를 단단히 둘러서 혹시 모를 역병의 기운이 침투하는 걸 전부 차단했었으니까.”
과연 정령 마법의 대가 다운 능력이다.
“어차피 당신 마음을 내가 꺾을 순 없을 테고…. 마음 같아선 옆에 붙어서 가호를 직접 걸어주고 싶은데…….”
“하지만 이사벨 님….”
“알아요. 내가 따라가는 것보단, 여기 남아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벨져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거. 나도 안다고요…….”
이사벨은 좀처럼 아쉬움이 풀리지 않는 듯, 입술을 잔뜩 깨물었다.
그녀는 내가 인정한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이성적인 여자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본인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끝내 한숨을 내쉰 이사벨은 메이를 돌아봤다.
“잠깐 나 좀 봐요. 메이. 당신이 다룰 수 있는 정화 마법이 어느 수준인지 확인해보고 싶으니까.”
“네, 이사벨 님.”
둘은 그렇게 방을 나갔다.
청해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여정도 메이하고만 동행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맞겠지.
“세나 님에겐 제가 전하면 되겠습니까?”
이번엔 제임스가 물었다.
“아, 세나에겐 제가 직접 전하겠습니다. 따로 부탁할 것도 있으니까요.”
제임스는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길로 방을 나와 세나가 자고 있다는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들르기 전, 잠시 내 방에 들러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상자 하나를 챙겼다.
그렇게 도착한 서재 앞.
“나 들어간다 세나.”
예의상 노크는 한 번 해준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디귿 자로 배치된 책장 사이,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세나의 모습이 보였다.
카리브디스 안에서도 그렇고, 얘는 왜 멀쩡한 침실 놔두고 이런 데서 잠을 자는 거지?
혹시 모를 디버프 존이 있는지 확인 후, 세나에게 다가갔다.
“왔어, 벨져?”
내 인기척을 느낀 세나는 바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미안. 본의 아니게 깨워버렸네.”
“아니야. 괜찮아.”
막상 오긴 왔는데, 어째 입이 열리지 않는다.
이거, 얘기를 어떻게 해야….
“또 어디 가는 거야?”
그런 내 속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세나가 먼저 물었다.
“어? 어…, 맞아.”
“이번엔 어디 가는데?”
“적림에. 베누스 후보 만나러.”
“가면 언제 돌아와?”
“글쎄? 못해도 한 달은 걸리지 않을까? 너 만나러 갔을 때도 그쯤 걸렸으니까.”
한 달이란 말에 세나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벨져가 없는 동안 난 뭘 하고 있어야 해? 너만 가는 것도 아니잖아. 메이도 함께 가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그럼 너희 없는 동안에 난 누구랑 놀아야 해?”
“그렇지 않아도, 나 없는 동안 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을 알려주려고 왔어.”
“새로운 게임?”
세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게임 알려주는 대신에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부탁?”
“어. 별건 아니고, 이건 여럿이 해야 재밌는 게임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마족들과 함께 해줬으면 해서 말이야.”
이왕이면 장소까지 바꿔서 말이지.
나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상자를 마침내 세나에게 건넸다.
“마계…… 마블?”
세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상자를 쭉 훑어보았다.
“지금부터 하는 방법을 알려 줄게.”
지구에서 많이 했던 보드게임을 현 세계에 맞춰 변형 좀 해봤다.
이거 하나면 한 달이 아닌, 반년도 거뜬할 거다.
설명을 다 들은 메이는 얼른 해보고 싶단 욕구가 차올랐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응! 설명만 들어도 엄청 재밌을 것 같아!”
당장이라도 게임판을 들고 제임스와 하자며 달려들 것처럼 보였지만,
-덥썩
그녀가 잡은 건 게임판이 아닌, 내 손이었다.
“가, 갑자기 왜?”
“나도 좀 주고 싶어서.”
줘? 나한테? 뭐를?
붙잡은 손을 멍하니 보던 세나는 갑자기 눈을 감았다.
그러고선 본인의 이마를 그대로 내 이마에 맞댔다.
그렇게 말없이 온기만 전하기를 1분.
다시 눈을 뜬 세나는 만족을 느낀 듯 히죽 웃었다.
“잘 다녀와, 벨져.”
어리둥절한 나로선, 맞댄 이마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 * *
사흘 뒤.
붉은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난 적림지대 중심부, 좌우로 넓게 펼쳐진 이라 가문의 저택.
저택의 주인은 테라스에 나와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흐트러지지 않은 특유의 미소를 머금은 채, 적림을 바라보던 베누스는 손에 든 찻잔을 한 모금 음미했다.
찻잔엔 물도, 차도 아닌 정체 모를 붉은 액체가 담겨있었다.
“베누스 님. 네로 후보의 퍼밀리어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시녀의 얼굴에는 베누스와 마찬가지로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불러들이세요.”
베누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대하게 받아들였다.
곧 시녀의 안내를 받아 네로의 퍼밀리어인 이노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노의 종주, 베누스 이라 후보님을 뵙습니다.”
“네로 후보의 말을 전하러 왔나요?”
베누스는 인사를 받을 새도 없이, 찾아온 목적을 캐물었다.
“그렇습니다. 후보님의 귀한 시간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순 없으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노투스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벨져 후보가 이곳 적림을 찾아올 겁니다.”
흥미가 돋은 듯, 베누스의 미소가 양쪽으로 조금 더 벌어졌다.
“벨져 후보의 현 위세는 베누스 후보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질투의 종주 이사벨에 이뉘디아에 이어, 최근엔 나태의 종주인 세나 피그리티아와도 단일화를 이뤄냈습니다.”
“그 위세를 두려워해, 당신의 주인과 다일 후보과 협력해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노투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서로를 감시하기 위한 까마귀들은 각자 다 있는 것 아니었나요? 당신의 주인도 우리 쪽에 꽤 여럿 심어놓지 않았던가요?”
“……그 점에 대해선, 네로 님을 대신해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잘못을 지적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괜찮으니, 계속 이야기하시죠.”
분위기를 휘어잡은 베누스는 관대한 처사라도 내리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이노투스는 아무런 감정변화 없이,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차후 벨져 후보를 대면하시게 되면, 감히 예상컨대, 베누스 후보님께서도 판단을 내리시게 될 겁니다.”
“판단이라. 나도 앞선 두 후보처럼, 벨져 후보와 단일화를 하게 될 거다, 뭐 그 뜻인가요?”
“그 반대입니다. 베누스 후보님이라면 분명 벨져 후보를 죽여야겠단 마음을 갖게 될 거란 뜻입니다.”
베누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더불어 줄곧 유지되던 그의 미소도 미세하게 좁혀져 갔다.
이에 베누스는 잠시 테라스 난간에 방치하고 있던 찻잔을 들었다.
그러곤 고민할 새도 없이, 한 번에 들이켰다.
“하…….”
찻잔을 비운 베누스는 다시금 평안을 되찾은 듯, 이전보다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말을 정리해보자면, 벨져 후보가 곧 내 영지를 방문할 거고, 난 어떤 이유로든 그를 죽여야 할 존재라고 인식해서, 이곳 적림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란 거군요. 그렇죠?”
“……예.”
“구태여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발을 뗀 베누스는 서서히 이노투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대의 말대로 내가 벨져 후보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그가 가진 힘은 온전히 내가 차지하게 될 터인데, 그럼 당신과 당신의 주인에게도 큰 위협이 되는 거 아닌가요?”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허나 베누스는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듯,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벨져 후보의 힘을 흡수하게 된 나보다, 앞으로 더 위세를 떨칠 벨져 후보가 훨씬 위협적인 존재다……. 라고 네로 후보는 판단하고 있는 건가요? 그의 퍼밀리어인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이노투스로선 차마 바로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대답을 재촉하려는 듯 베누스는 특유의 미소를 지은 얼굴을 이노투스의 앞으로 더욱 들이밀었다.
“난 지금도 밑질 게 없습니다. 네로 후보의 심복인 당신을 죽이고, 모든 힘을 거둬도 충분한 이익을 본다는 뜻이죠. 아니네요! 어차피 벨져 후보가 오는 게 기정사실이라면, 당신도 적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게, 저한테 가장 이득이 되는 일 아닌가요?”
이곳은 엄연한 적의 본진.
이런 평화로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결국, 베누스가 자비를 베풀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노투스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를 절대로 자극할 수 없었다.
“분노에 휩싸이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을 못 내리는 것이 마족의 어리석은 성정이겠지요.”
다시 입을 연 이노투스는 베누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제 주인은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벨져 후보를 향한 분노와 모멸감에 잠식되어, 이후에 벌어질지 모를 더 큰 위협을 못 보고 계십니다. 허나, 그렇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어리석은 주인의 뜻이라도 따라야 하는 것이, 퍼밀리어의 도리인 것을…….”
“쿱!”
급기야 웃음을 터트린 베누스는 배를 부여잡으며 광소를 남발했다.
“어리석은 주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퍼밀리어라! 정말 참된 수하가 아닐 수 없군요! 왜 당신 같은 인재가 그런 탐욕스러운 마족의 퍼밀리어로 있는지, 의문이 들 지경입니다!”
모욕과 다름없는 비웃음에도 이노투스는 주먹조차 쥐지 않았다.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네로 후보는 내가 벨져 후보를 죽여주길 원하고 있다는 거군요. 그 바람에 어울려 줄 수 있을진 두고 봐야 알겠지만, 왠지 어렵지 않게 어울려 줄 거란 예감이 듭니다.”
“베누스 후보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 쪽에서도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말을 부탁이지만, 사실상 지시에 가까웠다.
이노투스로선 거절할 수 없었다.
“뭐든 말씀해 주시지요.”
“제가 찾으려 하는 마족들이 좀 있습니다.”
한껏 드리워졌던 베누스의 미소가 다시금 좁혀지기 시작했다.
“1년 전, 제 영지에서 도망친 영지민들이 있는데, 어디 숨어있는지 도통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아와라티아 가의 정보력이라면 문제없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생포를 원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상처 하나 없이 전부 깨끗한 상태로 데려와 주세요.”
이노투스는 문제없다는 의미의 묵례로 답을 대신했다.
“나도 아직 정하지 못했거든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입술이 기이하게 비틀린 베누스의 얼굴은 마치,
“그들을 위한 환영 선물로 뭘 해줘야 할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금방이라도 극단적인 행위를 저지를 것처럼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