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81
제81화. 적림(赤林)
변덕스럽게 내리던 비가 또다시 그쳤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초연한 미소를 짓는 여인.
우산 같은 건 쓰고 오지 않은 듯, 머리칼만이 아닌 몸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벨져 후보님. 도로시라고 합니다.”
“마족…… 인가?”
“그렇습니다.”
여인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밴시로 착각하고 베어버릴까 봐, 확인차 물어본 말이다.
보통 누군가를 모시러 왔다고 하면 어느 소속의, 어느 직책을 맡은 누구라고 밝히는 법인데, 이 여인은 그런 거 전혀 없이 순수하게 이름만 밝혔다.
그래도 그 베누스란 마족의 밑에 있는 여자란 건, 확신할 수 있겠네.
입가에 서려 있는 미소가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있었으니.
“내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
“제가 아닌, 제 주인께서 알고 계셨던 거겠지요.”
“뭘 통해서?”
“저 같은 우매한 마족이 숭고한 분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내려주신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거짓말한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진 검을 거두지 않았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시다시피, 전 벨져 후보님께 저항할 수 있는 어떠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물며, 제 주변도 마찬가지이지요. 이 주변엔 저와 벨져 후보님의 일행분들 외엔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녀 말대로다.
검을 겨눈 시점에서 혹여나 다른 마족이 주위에 있는지 계속 인기척을 쭉 감지해봤지만,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곤 이 도로시라는 여자 하나뿐.
그녀 외엔 아무도 없다.
나는 비로소 검을 거뒀다.
“네 주인이라 하면, 분노의 종주를 말하는 건가?”
“그러합니다. 저만이 아닌, 이 적림에 거주하고 있는 마족 전부가 그분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적림을 돌아다니는 벨져 후보를 발견한다면, 극진한 예를 갖추어서 이라 가문의 본가로 모셔 오라고 말이죠.”
그 말을 듣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럼 넌 고작 나 하나를 찾겠답시고, 이 비 내리는 숲을 지금껏 돌아다녔다는 거야?”
“예.”
도로시는 변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갈까,
굳이 마족들을 풀어서 날 찾게 했다고?
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딴 걸 지시한 거지?
“저희의 주인이신 베누스 님께선 무척 자애로우신 분입니다.”
그런 내 속내를 유추한 듯, 도로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멀리서 오신 후보님을 한시라도 더 빨리 최선을 다해 모시고자 하는 그분의 배려이시니, 너무 불편하게 보진 말아주시길…….”
불편하게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불편하다.
목을 텁텁하게 하는 이 숲의 공기도,
여기 사는 마족 전부에게 나를 찾으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도,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여인의 태도까지도,
하나같이 다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든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꼴을 보니 그랬다간 내 뒤를 종일 따라다닐 것 같다.
우선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이어진 길을 쭉 나아갔다.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으며 묵묵히 걷던 와중,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베누스 님께서 계신 곳은 이쪽입니다.”
도로시는 왼쪽 길을 가리키며 안내를 이어가고자 했다.
이에 나는 오른쪽 길을 보며 물었다.
“여기로 가면 뭐가 나오지?”
“영지민들이 사는 주거지가 나옵니다.”
“그럼 이쪽을 먼저 가도록 하지.”
나는 고민할 것 없이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눈 깜짝할 속도로 달려온 도로시가 내 앞을 막았다.
“베누스 님께선 벨져 후보님을 바로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그분을 먼저 뵈러 가시지요. 나중에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너한테 책임 물을 생각 없으니까, 그냥 사실대로 보고해. 벨져 후보가 억지로 가려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턱!
도로시는 급기야 내 손을 틀어잡았다.
“그분의 본가로 가시…….”
이에 나는 그녀의 목을 잡아채고선 근처 나무에 처박았다.
“커걱!”
고통에 신음을 뱉는 와중에도, 그녀의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보던 서서히 손아귀의 힘을 풀어냈다.
“이 정도면 됐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도로시는 눈만 멀뚱멀뚱 떠댔다.
“지시를 따르고자 내 앞까지 가로막은 너를, 내가 힘으로 위협했다고 그대로 보고해. 과장을 더 보태도 상관없어.”
“하지만…….”
“자애로운 주인이라면서 설마 이런 것도 용납 못 하는 거야? 영지민의 안위보다, 자신의 지시가 더 우선인 건가?”
도로시는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라면 어서 안내해. 난 여기 길 모르니까.”
잠시 망설이던 도로시는 결국, 터벅터벅 내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나아가던 와중에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숲길이 끝날 때쯤,
“도착했습니다.”
숲 한복판에 평지로 넓게 펼쳐진 주거지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 개인 작업을 하던 마족들은 나를 보자마자, 하나같이 일을 멈추고선 고개를 숙였다.
흠.
여긴 외지인을 보면 예를 갖춰 인사하는 문화라도 있는 걸까?
그럴 리 없겠지.
내가 누구인지 알기에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보시다시피, 이곳의 마족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부족함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농사와 채집은 물론, 식용이 가능한 짐승과 마수들을 사냥하기 위한 사냥법도 고루 숙지하고 있지요. 이 모든 건, 저희에게 살 방법을 알려주신 베누스 님 덕분입니다.”
도로시에 말에 동의하듯 마족들은 영지를 아낌없이 소개했다.
한 해에 곡식 생산량은 얼마고, 주변에는 어떤 열매들이 자라나며, 이름 모를 짐승으로 만든 고기는 특히나 영양소가 풍부하다는 등 영지의 장점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그 기나긴 설명이 끝나자마자, 도로시가 바로 감흥을 물었다.
“어떠십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좋아 보이네.”
좋아 보인다.
나보다 먼저 이곳을 방문했던 이사벨이 느낀 감정과 동일한 감흥을 느꼈다.
하지만 난 거기에 감흥 하나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어색하다.
뭐 하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전부 다 어색하다.
마치 보여주기식의 최절정체를 보는 기분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처럼 똑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마족을 보는 건지, 인형을 보는 건지 구별이 안 된다.
문제는 저 마족들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진심인지, 가식인지조차도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뭐랄까, 진심 같진 않은데, 가식 같지도 않은?
그냥 저들 본연의 표정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을 품으며 영지를 쭉 둘러보던 와중,
“벨져 님 이것 좀 보세요.”
메이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길 끝자락 즘에 자리한 낡은 표지판이었다.
표지판 안엔 해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너머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에 도로시가 바로 만류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60년 전, 이 일대를 죽음의 땅으로 변화시켰던 역병의 발생지가 있는 곳입니다. 정화는 되었다고 하나, 아직 어떤 위험 요소가 있는지 모르기에, 베누스 님께서도 출입을 금하신 곳입니다.”
“역병의 근원지요?”
여태 잠자코 뒤를 따르던 코흐가 처음으로 흥분하며 나섰다.
역병을 조사하러 이곳엔 그에겐 최종 목적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흥분한 것에 민망함을 느꼈는지 코흐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럼,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
“베누스 님께 허락을 구하시지요. 어차피 이 땅의 주인은 그분이신데, 그분의 허락만 있다면야 어디든 못 가겠습니까?”
뭐 맞는 말이다.
땅 주인의 허락만 있다면야, 역병의 근원지만이 아닌 보물 창고도 갈 수 있겠지.
하지만 허락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나는 해골이 그려진 표지판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건……. 너희에게만 해당되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 여기 영지민도 아닌데, 왜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거지?”
억지 아닌 억지에 도로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녀를 제쳐둔 채, 메이와 코흐를 향해 손짓했다.
손짓에 이끌린 둘은 바로 표지판을 넘었다.
“생각을 거둬주시지요. 지금 거길 들어가시면, 필시 화를 면치 못하실 겁니다!”
조금은 다급해진 듯한 목소리.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에게 귓속말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메이는 잠시 입을 벌린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정말로 그래도 되냐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니, 메이는 곧장 마력을 발현하며 주문을 읊었다.
“무, 무슨 짓을?”
“너희 주인이 오면 전해. 벨져 후보가 너를 비롯한 다른 마족들이 만류에도 안 듣고 금지 구역으로 넘어갔다고. 너희로선 차마 말릴 수 없었다고 말이야.”
“그게 그리 간단히 전할 수 있는 일이……!”
-쿠구궁!
도로시의 간절한 외침은 땅에서 거대한 벽이 솟아오르면서 묻히고 말았다.
“이거면 될까요 벨져 님?”
벽 소환을 마친 메이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충분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했으면, 내 뜻은 충분히 남겼다고 본다.
이젠 마음 편히 이 일대를 조사할 일만 남았다.
“제, 제가 할 말은 아닌 줄 알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내 돌발 행동에 코흐가 다시금 흥분하며 물었다.
“귀공 아니, 벨져 님께서 아무리 이곳의 영지민이 아니라고 한들, 여긴 분노의 종주 영역입니다! 자신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하는 자를 용인할 마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분노의 종주라면…….”
“뭐가 두려운 거지?”
흘러내리는 땀에 그의 안경이 삐질 내려왔다.
나는 담담하게 질문을 이었다.
“그 분노의 종주란 자한테 해를 입는 거?”
“그, 그거야 당연한…….”
“그럼 여긴 왜 온 건데? 이 정도의 일은 각오하고 온 거 아니었어?”
인간이든 마족이든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저 떠돌이 의사는 적림에 오기 전, 내게 분명히 말했다.
생명을 지키는 의사로서,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를 역병의 잔재를 조사하고 싶다고.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누구의 소유인지까지 알면서도, 이곳을 오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네 목숨이 아깝다고 느낀 거라면, 난 널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어.”
저런 마음가짐으로 뭘 지키겠다는 걸까?
예나 지금이나, 말과 행동이 다른 족속들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가자, 메이야.”
나는 그 길로 메이를 데리고 금지 구역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메이는 늘 그래 왔듯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자, 잠깐만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코흐도 뒤늦게 우리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점점 우거지는 나무들 사이로 이상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본능적으로 코를 막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주시했다.
“마력의 기운이 느껴져요!”
메이는 아예 범상치 않은 뭔가가 앞에 있다며 예고해 주기까지 했다.
우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인 채, 다시금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도착한 어느 낯선 공간.
붉은 잎이 만연한 나무들 사이로 이끼가 뒤덮인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냄새가 더 심해졌어요!”
“아무래도 저 나무가 주범인 것 같네.”
마수의 사체도 아니고, 나무한테서 냄새가 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
마력이 느껴지는 건 고사하고, 냄새 때문에 접근조차 못 하던 사이,
“저 나무…… 설마?”
급 눈빛이 바뀐 코흐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함부로 다가가지 말라면 경고할까 고민하던 찰나,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조금 전까지 접했던 낯설지 않은 여인의 외침이 뒤에서 처절하게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