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83
제83화. 분노의 종주
엎어진 항아리마냥, 두 쪽으로 나누어진 카라큘의 몸에서 피가 철철 쏟아져 나왔다.
잘린 몸에서 피가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
문제는 뼈나 장기 등 다른 신체 부위는 일절 보이지 않고 오로지 ‘피’만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더 혐오스럽게 보였다.
“피, 피가……!”
그 광경에 충격을 받은 메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에 나는 슬그머니 손을 올려 눈을 가려주었다.
일전에 메이는 내게 부탁했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눈앞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상관없으니, 자신도 함께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었지.
이에 응하려면, 지금 같은 광경도 온전히 지켜볼 수 있도록 해야겠지만,
좋은 것만 보고 자랐으면 하는 주인의 마음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전 괜찮아요, 벨져 님.”
그런 내 의중을 알아챈 듯, 메이는 떨림이 줄어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음을 판단한 나는 살며시 손을 떼주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서 인사를 나눠야 한다니, 마음이 매우 애석하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벨져 후보…….”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쨌든 출입을 금한 장소에 제가 억지로 들어온 것이니까요.”
한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하는 게 맞다.
여긴 어디까지나 내 영역이 아닌, 그의 영역이니까.
혈마족의 대표, 분노의 종주, 적림의 주인.
베누스 이라의 영역 말이다.
“제 누추한 영지에 관심을 가져주신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라 봐야겠지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나 그런 건 애초부터 상관없었다는 듯, 베누스는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인사를 더 나누기에 앞서, 일단 제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부터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내 승낙에 베누스는 피가 흘러넘친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피와 비슷한 붉은빛의 마력이 발현되었으며, 생성된 마력은 바닥을 적신 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무심히 물었다.
“여동생이라고 하던데……?”
“아, 이 피의 주인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글쎄요? 제겐 적림을 방문하신 특별한 손님에게 망언을 퍼뜨린 죄인에 불과해서 말이죠.”
베누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카라큘의 몸에서 나온 피를 전부 흡수했다.
흡수된 피는 점차 뭉쳐지더니, 머리 정도 크기로 구체화되었고, 그렇게 베누스의 가슴에 달린 마혈석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생각보다 방문이 늦으셨군요. 전 좀 더 빨리 오실 줄 알았습니다.”
출발이야 빨리했었다.
별다른 이동 수단 없이 걸어온 통에 오래 걸렸을 뿐.
“내가 올 거란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떠실까요? 명색이 후보 간의 대면인데, 이런 곳에서 지속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건 맞다.
안 그래도 계속되는 냄새 때문에 슬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니.
나는 그러자며 흔쾌히 승낙했다.
베누스는 나에 이어 메이와 코흐에게 연달아 시선을 보냈다.
“옆에 계신 숙녀님은 연회장에서 봤던 퍼밀리어이시고, 다른 한 분은 못 보던 분이신데, 그쪽도 벨져 후보의 일행이신가요?”
“아, 저는 그러니까…….”
“역병을 조사하러 온 의사라고 합니다!”
코흐가 머뭇거리는 사이 여태 잠자코 있던 도로시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의 입가엔 어느샌가 미소가 다시 지어져 있었다.
“역병을 조사하러 왔다고요?”
“예! 전능하신 혈마족의 힘과 보살핌으로 정화된 역병이 재확산한 가능성이 있다는 낭설을 주장하길래, 제가 막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베누스는 못내 흥미를 느꼈는지, 코흐를 보며 직접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제 선조들의 힘으로 정화된 역병이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정말 있다고 보시나요?”
“아, 아직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가능성이 있다는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코흐는 나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역병 재발의 가능성을 설명했다.
설명을 마친 시점에서 베누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로우면서도 일리가 있는 가설이로군요. 그대, 이름이 어떻게 되죠?”
“코, 코흐입니다!”
“좋습니다 코흐 군.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 일대를 마음껏 조사해 보십시오. 적림의 주인으로서 허락하겠습니다. 저도 발견하지 못한 역병의 기세를 혹시라도 찾아낸다면, 그것만큼 감사한 일도 없겠지요.”
“가, 감사합니다! 분노의 종주시여!”
코흐는 허리를 거듭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필요하시다면 적림의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이곳의 지리에 대해선 잘 모르실 테니, 안내자가 한 명 필요할 텐데…….”
“제, 제가 하겠습니다. 베누스 님!”
도로시가 다급히 손을 들며 나섰다.
“좋습니다. 벨져 후보와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온 귀한 손님이시니 아무쪼록 잘 모셔주시지요.”
“베누스 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의외였다.
역병 조사까지는 그렇다 쳐도 저 도로시란 여자,
방금 베누스가 죽인 카라큘이란 마족의 지시를 따랐던 거 아니었나?
아님, 베누스의 지시를 먼저 받고 이중으로 따른 척을 한 건가?
이거 왠지, 매우 복잡한 관계에 끼인 듯한 기분이…….
-딱
살짝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려는 와중, 베누스가 대뜸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뒤로 검은 털과 외뿔을 가진 말 두 마리가 달려왔다.
“벨져 후보는 말을 탈 줄 아시나요?”
“적당히 압니다.”
“잘됐군요. 그럼 저 말을 타고 제 본가로 가시지요. 이미 벨져 후보를 맞이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이에 말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적당히 갈기를 어루만져주며 상태를 확인한 후, 메이부터 위로 올렸다.
그러자 메이가 작게 속삭였다.
“벨져 님. 코흐 씨만 저렇게 두고 가도 괜찮을까요?”
우리 없이 뒀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
뭐 까놓고 말해, 저 도로시란 여자가 해코지할 가능성도 있긴 하겠다만,
“괜찮을 거야.”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죽진 않을 것이다.
이 숲의 주인이 잘 모시라는 확실한 지시도 내린 마당에 뭐가 문제겠는가?
물론 그 주인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가시죠. 벨져 후보.”
앞장선 베누스가 말고삐를 쥐며 먼저 달려 나갔다.
그를 따라나서기 전, 코흐와 도로시가 있는 쪽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마음 편히 조사를 할 수 있단 생각에 조금은 희열감에 차오른 코흐,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도로시에 눈빛엔…….
주인의 지시를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행해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가 엿보였다.
* * *
말을 타고 숲을 달린 지 약 30분.
붉은 숲 한가운데에 자리한 이라 가문의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느낌은 안 들어도, 마왕 후보의 거처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 웅장함이 느껴지는 저택이었다.
베누스는 지체하지 않고 나를 곧장 안으로 이끌었다.
“생각 외로 말을 잘 타셔서 놀랐습니다. 고삐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시더군요.”
“말이 말을 잘 들었을 뿐입니다.”
뻥이다.
이 말, 자기가 정한 임자 아니면 태우지 않는 성격인진 몰라도 말을 더럽게 안 들었다.
용사 시절 때 체득한 다양한 라이딩 경험(?)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마족이 탔다면 오는 동안 몇 번이고 땅을 굴렀을 거다.
이윽고 내부의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벨져 후보님을 환영합니다!”
저택 화장실 청소부까지 싹싹 긁어모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마족이 모여, 나를 환영했다.
마족 환생 이후 가장 성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었지만,
딱히 기쁘다거나 감동의 마음이 들진 않았다.
“어째 안색이 어두워 보이시는군요.”
“너무 큰 환대를 받은 나머지, 마음이 부담스러워졌나 봅니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에 이사벨 후보가 방문하셨을 때도 똑같은 대접을 해드렸으니까요. 아, 이젠 후보라고 불러서도 안 되겠군요. 벨져 후보와 단일화를 하셨으니까요.”
그럼 이사벨도 이 기분을 느꼈다는 거네.
감정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수백 개의 인형 같은 눈동자가,
전부 나를 주시하고 있는 이 꺼림칙한 기분을.
“당시의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타시는지, 옷을 잔뜩 껴입은 채로 오셨더군요.”
옷이라 하면 아마 정령의 가호를 말하는 거겠지.
그 말과 함께 베누스는 가늘게 뜬 눈꺼풀 속에 담긴 눈동자로 내 전신을 짧게 훑었다.
“저는 것 어떤 것 같습니까?”
이에 내가 먼저 역으로 물었다.
“벨져 후보께선 확실히……. 추위보단 더위를 많이 타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난 지금 셔츠에 코트, 거기에 망토 케이프까지 걸친 상태다.
나는 구태여 그 의미를 묻지 않았고, 베누스의 뒤를 따라 준비된 접견실로 향했다.
접견실이라기보단, 대회담장에 가까운 방이었다.
베누스는 2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 최상단에 착석했다.
나는 그와 마주 볼 수 있는 끝자리에 앉았다.
후보 간의 원활한 대면을 위해 시종들은 물론, 메이까지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아까 하던 이야기부터 이어서 하시죠.”
나는 앉자마자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적림에 올 거란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주 전이었죠? 벨져 후보가 오기 전, 네로 후보의 퍼밀리어가 왔었습니다. 와서는 대뜸 벨져 후보가 적림에 올 거라 하더군요.”
비만 마족이 언급되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가 와서 뭘 할 거라고 하던가요?”
“특별히 뭘 할 거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마음을 예측하더군요. 벨져 후보를 대면하게 되면, 분명 죽이고 싶어 할 거라 했었죠.”
약 1초 정도, 정신이 살짝 멍해졌다.
나를 뭐 어쩐다고?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오히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베누스는 입꼬리를 더 활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벨져 후보께선 최근 두 명의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며 든든한 우호 관계를 형성하셨지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확고한 적대 관계도 형성하신 모양입니다. 네로 후보 쪽에선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벨져 후보를 경계하고 있더군요.”
어째 좀 잠잠하다 싶더니만, 다른 데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나?
자기 손으론 아무것도 안 하려는 지극히 비만 마족다운 짓거리였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전 아직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혹시 또 모르지 않습니까? 저 역시 질투와 나태의 종주처럼 벨져 후보에게 호감을 느끼고, 단일화를 하게 될지…….”
사람은 무릇 세 번은 만나보고 판단해야 한단 말이 있다.
그게 마족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겠지.
세 번은커녕 이제 겨우 만난 지 한 시간밖에 안 됐지만, 어째 머리에선 벌써 판단이 내려졌다.
베누스 이라.
이 마족은 나와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녀석이다.
이유가 뭐냐고?
간단하다.
저 녀석은 아까 역병의 나무 앞에서 날 만난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가증스러운 미소의 가면을 쓴 채, 이리저리 날 가늠해보려만 했을 뿐.
내가 이 적림에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저 미소 속에 꽁꽁 감추고 있는 녀석의 본성부터 꺼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럼 이번엔 제 쪽에서 질문을 드려야겠군요. 벨져 후보께선 어떤 연유로 제 영지를 찾아오신 겁니까?”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얹은 베누스는 거의 추궁에 가까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의자에 얹은 손가락만 툭툭거릴 뿐,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손가락이 멈췄을 땐.
“내가 왜 왔냐고요?”
줄곧 일직선을 그리고 있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당신 죽이러 왔는데?”
찰거머리처럼 입가에 딱 매달려있던 그의 미소가 비로소 움찔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