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85
제85화. 웃어
똑같다.
제발 자신들을 못 본 척해달라며 애원하던 클리프 일행의 모습과 똑같다.
차이점은 있다.
클리프와 그 일행들은 전적으로 살기 위해 애원을 한 거라면,
이 시녀는 죽음을 예견하고, 좀 더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자 애원을 하고 있다.
왜?
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
이렇게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본심을 가식적인 미소 안에 숨기는 이유가 뭘까?
안타까움을 넘어 이제는 분노가 치솟았다.
“어차피 이 방을 나가면 전 죽습니다! 그럴 바엔 후보님의 손으로 제발 아프지 않게 죽여주세요! 원하시는 건 모든 해드리겠습니다! 몸도 정신도 다 드릴 터이니……!”
“이름이 뭐야?”
내 물음은 울부짖음을 멈춘 시녀는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슈아, 슈아라고 합니다.”
“가족은?”
“부모는 없고, 언니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언니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거야? 네가 죽으면 슬퍼할 언니는 어떡하고?”
“어차피 살아봐야 이 적림 안이지 않습니까? 이미 베누스 님의 눈 밖에 난 이상, 언니와 온전히 살 가능성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저 저 없이도 혼자 잘 살아주길 바라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시녀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초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절 취할 대로 취하시고, 흥미가 떨어지시거든, 폐기해주시지요. 제가 후보님의 수발을 제대로 들지 못해 화가 나서 죽였다고 하시면, 베누스 님도 넘어가 주실 겁니다.”
이 시녀만이 아닌 적림의 다른 마족에게도 이런 상황이 닥쳤다면, 똑같은 부탁을 했을까?
왠지 그럴 거란 예감이 들었다.
시녀의 눈에선 애절한 눈물이 볼을 타고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보다 못한 메이가 직접 손수건을 가져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사람이 자기 입으로 자길 죽여달란 말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언제인지 아는가?
바로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을 때다.
산채로 영혼이 갉아 먹히는 고통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통해 안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 슈아라는 이름의 시녀도 마찬가지라 본다.
분명 삶의 어느 순간에 죽음을 넘어서는 끔찍한 아픔을 느꼈고, 머지않아 그 아픔을 다시 경험할 거라는 두려움이 차올랐기에,
지금 이렇게 나보고 죽여달라며 애원하는 것이다.
-스윽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그녀의 목덜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단추 하나를 풀어 시녀의 쇄골이 드러나도록 옷을 걷었다.
“베, 벨져 님?”
깜짝 놀란 메이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다.
시녀는 상관없다는 듯 지그시 눈만 감았다.
오해하지 마라.
그런 같잖은 욕망이나 풀자고 이러는 것이 아니니.
“손 치우고 이걸 봐, 메이야.”
“예? 하지만…….”
차마 내 지시를 거스를 순 없었던 메이는 마지못해 손을 내렸다.
작게 실눈을 떠 실루엣만 살짝 보려던 메이의 눈은 머지않아 크게 벌어졌다.
“이, 이건?”
시녀의 쇄골과 가슴 사이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자국이 있었다.
흡사 화상으로 생긴 흉터 같았지만 내 눈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쯤에서 한 번 돌이켜볼 사실이 있다.
60년 전, 이 땅을 오염시킨 역병은 감염자의 몸에 반상출혈 일으켜서, 살을 검게 썩힌다고 했다.
이상하지?
역병은 분명 정화됐다고 했는데,
왜 내 눈엔 이 자국이 그 역병 때문에 생긴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다시 시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내가 널 죽여주길 원해?”
시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
기브 앤 테이크.
상대에게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니, 난 좀 알아야겠다.
“너를 비롯해 이곳의 마족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하물며 이 적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이 땅의 주인이 이들에게 멋대로 씌운 가면 속의 진실을.
“그 베누스란 자식이 너희한테 어떤 개짓거리를 했는지!!”
* * *
이라 가문의 저택 5층.
적림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
벨져가 치료를 핑계 삼아 시녀와 함께 방에 있는 사이,
베누스는 치솟은 감정을 제어하고자, 테라스에서 바람을 쐬었다.
손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찻잔을 쥔 채.
“다녀왔습니다, 베누스 님.”
차를 음미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그의 뒤로 퍼밀리어인 라비에가 찾아왔다.
그 뒤론 코흐와 도로시도 함께였다.
베누스는 뒤돌아볼 새 없이, 계속 차만 마셔댔다.
“오는 길에 베누스 님의 허락을 받고, 금지 구역에서 역병을 조사 중이었다는 마족들을 만나 데리고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어떻게, 조사는 잘 되셨나요?”
자신에게 물은 것임을 깨달은 코흐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당장 할 수 있는 조사는 끝났고, 이젠 변화를 지켜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변화를 지켜본다라?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저,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코흐는 역병의 근원지 주변에서 채취한 지물들을 보여주며, 변화의 과정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베누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병에 담긴 액체의 색이 변하지 않기를 우리는 바라야겠군요.”
“그,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여기서 그 변화를 함께 지켜보도록 하시죠.”
“……베누스 님과 함께 말입니까?”
당황한 코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전혀 없습니다!”
코흐로선 거부할 수 없는 지시였다.
주섬주섬 병을 꺼내는 코흐를 도로시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도 수고하셨습니다.”
“베누스 님의 너그러운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도로시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라비에는 베누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형님. 저 여자는 카라큘의 지시를 따르던 년이지 않습니까? 왜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그녀라고 따르고 싶어서 따랐겠습니까? 카라큘의 농간에 휘둘렸을 뿐이겠죠. 따로 잘못을 짚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뭔가 더 말할 게 있는 듯 라비에는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열진 않았다.
“그보다, 다녀왔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 찾았다고 합니다.”
급 의기양양해진 라비에는 어깨를 쫙 펴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동시에 도로시도 고개를 들었다.
“마계 대륙 중심부 쪽에 포르기네이가 서식한다는 숲이 하나 있는데, 최근 벨져 후보의 수하들이 그곳을 자주 드나든다고 하더군요. 그 이노투스란 자가 말하길, 그곳에 영지를 만들려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뭐 그 얘기야 당사자 입으로 직접 들었습니다만……. 마수가 사는 곳에 영지를 만들려 했다고요?”
“예. 중요한 건, 그곳에 원래부터 살던 마족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베누스의 눈빛이 변했다.
“계속 이야기해보세요.”
“네로 후보 쪽이야, 원래부터 벨져 후보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수하들이 그 숲을 드나드는 목적을 알고자 파견대를 보냈었답니다. 한데, 거기에 사는 마족들의 모습이 저희가 찾던 영지민들과 흡사하다고 전했습니다.”
베누스는 대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더니, 미친 듯이 웃어댔다.
“하하하! 이 편하디편한 땅을 벗어나 기껏 정착했다는 곳이 마수의 서식지였다라……. 내 머리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러다 갑자기 도로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당신은 이해가 됩니까?”
“예?”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는 이 땅을 떠나, 그런 불결한 땅에 정착하는 것이 이해가 되냐는 겁니다.”
“무, 물론 이해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난 그들이 자의적으로 이 땅을 떠났다고 보지 않습니다. 분명 탈주를 부추긴 주동자가 있을 거라고 보는데……. 그게 대체 누구일까요?”
도로시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입꼬리만 올릴 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들 입으로 직접 들어보면 알겠죠. 당신이 가보세요 라비에.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정말 그들이 맞다면!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데려오셔야 합니다! 절대! 생채기 같은 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그 상태로 데려오세요! 아시겠습니까?”
“베누스 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라비에는 새로이 받은 지시 수행을 위해 바로 자리를 떠났다.
“당신도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도, 도로시라고 합니다. 베누스 님!”
“알겠습니다. 그 이름 기억해 두죠. 도로시 양.”
감사의 의미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도로시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렇게 묵묵히 떠나려는 그녀를
“도로시 양은 가족이 있나요?”
베누스가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이 저택에서 베누스 님을 모시고 있는 시녀 중 한 명입니다.”
“그래요? 이름이 뭐죠?”
“슈, 슈아라고 합니다.”
도로시는 대답과 동시에 침을 삼켰다.
이에 베누스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저택의 시녀장을 불렀다.
“이 집에 슈아는 이름의 시녀가 있다는데, 좀 데려와 주시겠습니까?”
“슈아말입니까?”
시녀장은 살짝 머뭇거렸다.
“송구합니다만, 지금 당장은 데려올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지금 벨져 후보와 같은 방에 있는 시녀가 바로 슈아입니다.”
도로시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 아이가 왜 벨져 후보에게?”
시녀장은 미소만 지을 뿐, 도로시의 물음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베누스의 미친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테라스에 울렸다.
“이런 인연이 다 있었군요. 그 시녀가 도로시 양의 동생이었다니.”
“베, 베누스 님? 제 동생이 벨져 후보님과 어떤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도로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도로시의 양의 동생은 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벨져 후보에게 물을 엎지르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거든요. 그래서 화가 난 제가 그녀에게 나이프를 던져버렸습니다.”
차마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하는 베누스.
도로시는 반문조차 못 한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벨져 후보는 사과를 다른 식으로 받아야겠다며, 그녀를 방에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 지금쯤, 속죄를 위한 처절한 춤사위가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뭐 그렇게 해서 벨져 후보가 용서해준다면 다행이겠지만…….”
베누스는 천천히 도로시의 앞으로 가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용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불안하게 움찔거리던 도로시의 눈에서 왈칵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 모습을 표정 변화 없이 지켜보던 베누스는 기어이,
“웃으세요. 도로시 양.”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지시했다.
“난 그대들에게 웃는 것 말곤 그 어떠한 표정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고, 이 땅이 살기 위해선, 여러분이 웃으셔야 합니다…….”
적림에서 사는 마족이라면,
적림에서 살아야 하는 마족이라면,
적림에서 살 수밖에 없는 마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웃으며 살아라.
“그대들이 웃지 않으면……. 나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요!”
살기 위해선 웃어야 하는 운명을 지닌 도로시로선.
치솟는 감정을 꾹 억누른 채,
도로시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도무지 웃는 표정이라곤 볼 수 없는 도로시와 달리,
“그래요! 그겁니다!”
베누스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극도의 희열감에 차올라 있었다.
-저벅 저벅
그 희열에 찬 공간 밖으로 아련히 들려오는 발소리.
베누스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벨져 후보?”
베누스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려 했지만,
-스릉
연이어 들린 싸늘한 소리에 그의 입꼬리가 내려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