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93
제93화. 전언
공중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다섯 속성의 원소.
원소 안에는 각각의 속성을 상징하는 하급 정령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심엔 정령의 소환자인 이사벨이 눈을 감은 채로 명상 중이었다.
이뉘디아 가문의 본가. 저택 외부에 마련된 마법 연무장.
이곳은 가문 내에서 오직 이사벨만 이용할 수 있는 전용 공간으로, 그녀 외엔 어떤 마족도 이용이 불가했다.
본래는 마왕 후보였던 그녀의 정령 마법 연마를 목적으로 마련된 곳이었지만,
후보가 아니게 된 지금도 같은 목적으로 사용 중이었다.
“하….”
답답함이 느껴지는 한숨과 함께 빛은 사그라졌다.
명상을 끝낸 이사벨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날 어지간히도 거부하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건가?”
답답한 마음에 애먼 손가락만 깨물던 이사벨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허공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내 허가도 없이 여기에 들어온 이유가 뭘까요?”
꽤 한참 전부터, 정문 쪽에서 이사벨을 지켜보고 있던 중년 사내를 보며 한 말이었다.
“처벌은 추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마족이었으면, 발을 들인 즉시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을 거예요. 당신이니까 그나마 봐준 줄 아세요. 로베르토.”
“이사벨 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로베르토 번스타인.
이사벨에게 정령 마법을 처음 가르친 스승과도 같은 존재로, 가문 내에서 누구도 믿지 않는 이사벨이 유일하게 적대하지 않는 마족이었다.
물론 적대만 안 하는 것일 뿐, 신뢰하진 않았다.
그녀가 신뢰하는 건 오직 벨져뿐이었다.
“그래서, 왜 왔나요?”
다리를 꼬며 의자에 앉은 이사벨은 도도한 눈빛으로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이사벨 님의 이름으로 전언이 왔습니다. 본가의 다른 마족들이 전부 전하기를 꺼려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제가 전하러 온 것입니다.”
“어디서 왔는데요?”
“주최 측입니다.”
주최라는 말에 이사벨은 바로 다리를 풀었다.
“주최 측에서…… 내 이름으로 전언을 보냈다고요?”
“예. 여기 이름도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로베르토는 전언 봉투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보란 듯이 내보였다.
“당장 갖고 오세요!”
로베르토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와 전언을 건네 뒤, 곧장 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사벨은 그의 행동을 신경 쓸 새도 없이, 바로 전언을 확인했다.
내용을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그녀의 미간은 좁혀져 갔다.
“혹 내용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뭇 심각해 보이는 반응에 로베르토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사벨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단일화에 응한 전 후보를 포함해, 현재 남아있는 일곱 명의 후보들은 다시 회담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적혀 있네요.”
“이, 일곱 명이요?”
덩달아 로베르토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했다.
주최 측이 이제 와서 후보들을 재소집하는 이유도 의문이지만, 지금 주목해야 할 건 그쪽이 아니었다.
전언에 또렷이 적혀 있는 7이라는 숫자.
모두가 알다시피, 이번 마왕 후보 경합은 8명의 후보로 시작했다.
이건 마계에 사는 마족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런 와중에 이전의 후보까지 포함해서 남아있는 일곱 명이라니.
그 말은 즉,
“후보 한 명이…… 죽었다는 겁니까?”
그거 말곤 설명이 안 됐다.
“다른 후보들 쪽에서 따로 넘어온 정보는요? 아무것도 없었나요?”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후보가 죽을 정도의 정보라면, 주최 측보다 저희가 먼저 알았을 겁니다!”
다른 후보 쪽은 특별한 게 없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
“벨져…….”
분노의 종주를 만나기 위해 적림으로 향한 벨져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사벨은 서둘러 벨져의 저택으로 향했다.
* * *
너희는 너희대로 살아라. 난 너희를 보살펴주지 않을 것이다…… 라는 멋들어진 말을 남기고 바로 떠났어야 했지만,
나와 메이는 약 3일 정도 적림에 더 머물렀다.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혈마족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혈마족은 베누스의 퍼밀리어인 라비에를 따라 탈주민들을 잡으러 가버렸단다.
아마 거기에 간 혈마족 중 지금 시점에서 살아있을 놈들은 없다고 본다.
설사 살아있더라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겠지.
어쨌든, 우리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마지막 인사도 없이, 적림을 조용히 떠났다.
코흐는 혹시 있을지 모를 역병 조사를 위해 좀 더 머무르겠다고 했기에, 우리와 같이 떠나진 않았다.
그렇게 오르게 된 귀환 길.
청해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와이번이라는 이동 수단도 없는 만큼, 오로지 두 다리에 의지해야 했다.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모두를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가야겠지만,
우리는 현재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잠시 발길을 돌린 상태다.
-치이익
뜨거운 불길과 아지랑이가 겹쳐 여전한 더위를 유발하는 이곳.
바로 레트나 화산이다.
더위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딱 하나.
이 마계에서 유일하게 검을 만드는 괴짜 대장장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유라고 하면 단연 아크베리아 때문이다.
슬슬 손을 볼 때도 됐고, 큰일을 한 번 치르고 난 이후이기도 하니 점검할 때도 됐다 싶어서 말이지.
그렇게 도착한 대장간 앞.
어째 전에 왔을 때와 다르게 오늘은 좀 조용한 느낌이다.
요란하다 못해 귀청을 떨어트리게 할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간 안엔 울타비스가 없었다.
“울타비스 님!”
메이가 큰 소리로 불러봤지만, 어색한 적막만 흘렀다.
이 괴짜 대장장이, 또 어디 가서 약 팔고 있는 거 아니야?
“어디 외출하시기라도 한 걸까요?”
“일단 좀 기다려 보자.”
근처에 있으면 알아서 오겠지 싶은 마음에 짐을 풀고 털썩 주저앉았다.
간만에 왔다곤 해도, 그렇게 오랜만에 온 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어째 대장간 분위기도 그새 좀 변한 것 같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검, 창, 방패 등 즐비하게 자리하던 무구들은 안 보이고, 웬 여자들이 치장용으로 쓸법한 장신구가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새 전공을 바꾸기라도 했나?
물론 난 장신구 같은 거엔 관심이 전혀 없다.
이런 거 해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실생활에 무슨 도움이…….
어라?
이름 모를 금속들이 어지럽게 쌓인 나무 책상 위,
왠지 모르게 익숙한 장신구가 보였다.
은을 가공해서 만든 듯한 수수한 디자인의 브로치인데,
보석이 박혀있어야 할 부분이 텅 비어있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거 내 거랑 똑같이 생겼는데?
“어? 그 브로치! 벨져 님 것과 똑같이 생겼어요!”
메이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이거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내 마혈석이 박힌 브로치와 똑같이 생겼다.
내 것만이 아니다.
이사벨도 그렇고, 세나도 그렇고.
다른 마왕 후보들도 이 브로치에다가 마혈석을 보관하지 않았었나?
하다못해 내가 죽였던 베누스 그놈도 똑같은 브로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싶은 생각이 든 순간,
“어이쿠! 우린 귀하신 마왕 후보님께서 어쩐 일이신가?”
대장간의 주인이 돌아왔다.
나는 말이 아닌 아크베리아를 들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하! 마검을 수리하러 오셨구먼! 나도 이쯤이면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 거기다 검 두고 잠시만 기다리게!”
주욱 기지개를 켜며 근육을 푼 울타비스는 바로 아크베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칼날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대뜸 고개를 갸웃했다.
“음? 생각보다 많이 안 쓴 모양이구먼?”
그럴 리가.
그동안 손때가 묻다 못해 색이 변할 정도로 휘둘렀는데, 많이 안 썼다고 하면 섭섭한데?
“뭘 안 썼다는 겁니까?”
“검에 마력을 담은 흔적이 생각보다 옅어서 한 말일세. 마검이 왜 마검이겠는가?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검이기에 마검인 거라네! 이런 식으로 쓰면 그냥 일반 검과 다를 바가 없지. 안 그런가?”
난 또 뭐라고.
하기야, 생각해보면 그동안 검에 마력을 전승한 횟수가 적긴 했지?
당장 최근만 해도 마력 없이, 순수 검술로만 베누스를 상대했으니까.
“정작 마력을 쓴 흔적은 옅은데……, 최근에 살검(殺劍)을 한 흔적이 보이는구먼?”
그 말에 절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칼날 상태로 그런 것도 확인이 가능한 겁니까?”
“뭐,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보이는 것이 생겼다고 할까?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네. 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을 테니.”
경험이 쌓였다라.
검을 만드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검을 손질하는 경험은 어디서 쌓은 거지?
그동안 나 외에 다른 검사들도 검도 수리해왔다는 이야기인가?
당장 내가 아는 놈이라면 그 교만의 종주의 퍼밀리어밖에 없는데?
그럼 그 자식도 살검을…….
굳이 생각해봐야 머리만 복잡할 것 같단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울타비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묵묵히 수리에만 열중했다.
집중하는 그를 유심히 보다가도, 불현듯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몸의 원래 주인 벨져 놈.
전대 마왕의 마력을 대체 어디서 받아온 거지?
내 눈은 자연스레 가슴에 달린 마혈석으로 향했다.
알다시피 마혈석은 선조가 쌓아온 힘을 후손들이 물려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마족의 유산 같은 물건이다.
나를 비롯해 다른 일곱 명의 후보들도 각각의 마혈석에 선조의 힘이 담겨 있다고 했었지.
뭐 그들이야 예전부터 내력 있는 가문이었다고 하니, 물려받는 데 큰 문제는 없었겠지만…….
그럼 벨져 얘는 누구한테 받은 거야?
과거 용사였던 시절, 마왕 벨시페르를 죽인 나는 그의 목을 베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성문에 매달게 했고, 시체는 마왕의 부관인 아만 크라우넬에게 돌려주면서 마계로 가져가게 했다.
죽은 시체에 마력이 남아있을 리는 만무하고.
아님, 뭐 레지에타 침공 전에 따로 빼둔 마력이라도 있던 건가?
그 마력이 내려오고 내려와서 이 망나니 후손에게 전해진 거고?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흠, 브릴리스한테 물어보면 알지 모르겠네.
아니지. 그랬다간 왜 그걸 자기한테 묻냐면서 역질문이 올 수도.
내 물건의 출처를 남에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스윽
머리 아픈 고민을 하던 와중, 우리가 왔던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는 놔둔 채 슬그머니 눈만 돌리니, 대장간 정문 울타리 쪽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낯선 누군가를 발견했다.
로브로 몸 전체를 가린 딱 봐도 수상한 냄새가 폴폴 나는 마족이었다.
검 수리에 정신 팔린 울타비스.
독서에 열중 중인 메이.
이 대장간에서 아직까진 나만이 저 마족의 존재를 인지했다.
꼴을 보니 나처럼 검을 수리하러 온 것 같진 않고,
뭘 하러 왔나 싶은 마음에 조금은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지켜보던 찰나,
-휘릭!
로브의 마족은 정확히 나와 2초간 눈을 맞추더니 대뜸 휙 하고 사라졌다.
어째 날 보고 도망친 것 같단 느낌이 드네?
딱 토끼 굴인지 알고 왔다가, 호랑이를 보고 도망친 꼴이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마실 좀 갔다 올게, 메이야.”
“안녕히 다녀오세요!”
메이의 인사를 받으며 대장간 밖으로 나온 나는,
다시 놈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따라잡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기 동작 그만.”
꽁무니 빠지게 달리는 놈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덤덤하게 불렀다.
마족은 순간 어깨를 움찔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멈춰주었다.
“대장간엔 왔다가 왜 그냥 가?”
마족은 입술만 움찔거릴 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어찌 말해야 하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릴 지경이다.
“나한테 뭐 볼 일 있어?”
“……혹시 전언 받으셨습니까?”
침묵 끝에 들은 말은 굉장히 생뚱맞았다.
“전언?”
“예. 저희 주최 측에서 벨져 후보님의 이름으로 전언을 보냈을 겁니다. 그걸 받으셨는지 여쭙는 겁니다.”
잠깐만 뭐? 주최?
“네가 말하는 주최가 어딘데?”
“그야 물론. 마왕 경합 중재 위원회이지 않겠습니까? 위즈 메디아 님께서 이끄시는…….”
나는 약 3초 정도 멍을 때리다가 입을 뗐다.
“받은 거 없는데?”
“그러시군요. 그럼 제가 대신 전언을 드리겠습니다.”
마족은 긴장감 어린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내 앞까지 오더니, 서신 한 장을 건넸다.
“내용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단일화에 응한 전 후보를 포함해 현재 남아있는 일곱 명의 후보 전부는 다시 회담장으로 모여달라는 내용입니다.”
“재소집 이유는?”
“가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안 가.”
나는 전언은 확인도 안 한 채 다시 마족의 손에 얹었다.
마족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급히 다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상식적으로 뭐 때문에 오라는지 이유도 안 알려주는 곳에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날 암살하기 위해 함정이라도 설치한 곳이면 어떡하라고?”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건 앞으로 이어질 마왕 후보 경합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위해…….”
“그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내가 가야 할 이유를 말해.”
“애석하게도 전 거기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럼 네 상관한테 가서 물어보고 다시 오든가.”
나는 뭐가 문제냐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날 필요로 하면 이유와 사정을 조목조목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그냥 편지하나 휙 던지고 말아?
어림도 없지.
“위즈 메디아라고 했지? 그 마족이 경합을 이끄는 자라면, 다시 말해 네 상관이라는 소리잖아? 그럼 그 쪽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혼란에 휩싸인 마족의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