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94
제94화. 중재
마계 대륙 중심부, 드넓게 펼쳐진 초원지대.
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자리한 신전 하나.
이곳은 과거 마계에 처음 발을 들인 고대 마족을 기리는 제단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마왕 후보들을 위한 회담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첫 회담 이후 반년 만에 다시 모인 후보들.
회담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는 후보들은 금방 도착했지만,
회담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이 있는 한 후보는 약속 시각에 가까워져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야이 치사한 놈들아! 한두 번도 아니고! 왜 자꾸 회담장을 내 집에서 먼 데로 정하는 건데?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장소 선정에 불만이 가득한 후보가 회담장으로 들어섰다.
식탐의 종주이자 용마족의 대표, 그룸 굴라였다.
미리 온 후보들을 쭉 둘러보던 그룸은 아무도 자신의 말을 받아주지 않자, 식식거리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앞엔 이제는 후보직을 내려놓은 이사벨과 세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듣자 하니 너희 둘은 이제 후보도 아니라며? 후보도 아닌 것들이 후보 회담엔 왜 온 거지?”
“주최 측에서 와달라 하니 왔을 뿐이에요.”
이사벨은 개의치 않으며 앉아있을 자격이 있음을 당당히 밝혔다.
“헹! 근데 그 벨져란 놈은 어딨는 거야? 요즘 잘나간다는 놈 얼굴 좀 보려고 한달음에 날라왔더니만, 왜 코빼기도 안 보여?”
“진정해 그룸 후보~! 아직 시간 안 됐잖아.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옆자리에 있던 루비아가 능글맞게 웃으며 그룸을 말렸다.
현재까지 회담장에 도착한 후보는 총 여섯.
남은 자리는 두 개지만, 채워질 자리는 하나였다.
회담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이사벨의 초조한 마음은 더해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전언을 받은 지 일주일.
벨져의 집에도 이사벨이 받은 것과 같은 전언이 왔었지만, 정작 전언을 받아야 할 당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적림에서 발생한 소식은 이미 다른 후보의 귀에도 전해질 대로 전해졌다.
분노의 종주 베누스 이라의 사망과 혈마족의 괴멸.
사태의 장본인은 두말할 것 없이 벨져였다.
후보들 간에 이루어진 첫 무력 충돌.
거기서 승리해 상대의 모든 것을 쟁취한 상황이라면 그 기세를 몰아 본인의 위신을 더욱 떨쳤어도 됐겠지만,
정작 벨져는 소문이 퍼진 이후 메이와 함께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일단 자신들만이라도 자리를 지켜야 했단 생각에 이사벨은 세나와 함께 참석은 했다.
허나 두통에 시달리는 이사벨과 다르게, 세나는 세상 편한 얼굴로 조는 중이었다.
-끼익
약속된 시간이 되자, 회담장의 문이 열렸다.
후보들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주역 위즈 메디아가 나타났다.
첫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회담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
“아직 안 오신 분이 있군요.”
위즈는 오자마자 비어있는 자리를 보며 말했다.
이에 여태 묵묵히 있던 네로가 눈초리를 세우며 물었다.
“언제까지 온 이유도 모른 채, 멀뚱히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시간 됐으니, 할 말 있으면 빨리 전하고 끝내시죠!”
“그럼 5분만 더 기다리겠습니다. 5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회담을 시작하도록 하죠.”
위즈는 회중시계를 꺼내며 시간을 확인했다.
네로는 그의 처사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딱히 더 반박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이사벨의 마음속에선 째깍째깍 시곗바늘 소리가 미칠 듯이 울려댔다.
그리고 마침내 4분 55초가 지났을 때쯤.
-끼익
회담실의 정문이 열리며, 마침내 마지막 후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아직 시작 안 했어요?”
지각에 대한 미안함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당돌한 실언을 뱉으면서…….
“어서 앉으시죠.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위즈의 재촉에 벨져는 슬그머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앉자마자 이사벨의 불같은 시선이 몰려왔다.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칠 수 없던 벨져는 딴 곳만 쳐다봤다.
그렇게 회담은 시작되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모여주신 후보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합이 시작되고, 반년도 안 된 시간에 여러 눈에 띄는 일들이 있었지요. 이사벨 후보와 세나 후보의 단일화 선언. 그리고 베누스 후보의 죽음까지…….”
전부 한 후보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에 모든 후보의 시선이 자연스레 벨져에게 돌아갔지만, 벨져는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은 듯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경청했다.
“잘못된 흐름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앞으로 벌어질 거라고 충분히 예상한 일이지요. 베누스 후보 외에 다른 후보의 빈자리가 만들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쾅!
갑자기 네로가 탁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런 따분한 이야기나 듣자고 온 거 아닙니다! 잡설 치우고 우릴 부른 이유나 빨리 말하십시오!”
다소 과격한 반응이었지만, 그런 네로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그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위즈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보님들께 게임을 하나 제안해 드릴까 합니다.”
“게임?!”
그 말에 여태 졸고 있던 세나의 눈이 번뜩 뜨였다.
* * *
이야기는 잠시 회담일로부터 3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트나 화산 인근 이름 없는 작은 마을.
흰색 로브를 두른 어느 백발의 마족이 주인 없는 작은 오두막 앞에 와선 문을 두드렸다.
“네~!”
활기찬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다름 아닌 메이였다.
“어서 오세요! 오시기로 한 위즈 메디아 님 맞죠? 들어오세요!”
메이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로 손님을 반겨주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오두막에 들어선 위즈는 마침내 만남의 당사자 벨져와 얼굴을 마주했다.
벨져는 살짝 어이가 없었는지 작게 실소했다.
“진짜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나도 당신을 직접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위즈는 덤덤하게 대답하며 벨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전 잠시 나가 있을게요!”
둘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메이는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었다.
경합 중재 위원회.
마왕 후보 경합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관장하는 곳이라곤 하나, 벨져로선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던 곳이었다.
말이 중재 위원회지, 사실 첫 회담 이후 방관하다시피 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던지라, 그냥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런 곳에서 난데없이 모여달라고 종이 한 장만 툭 건네는데, 달가울 수가 있겠는가?
벨져로선 당연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 자길 부르고 싶으면, 그곳의 장이 직접 와서 이유를 설명해보라는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인데,
설마하니 진짜로 와버릴 줄은 몰랐다.
“저희로선 사실 다행입니다. 다른 후보님들이야 어디에 계신지 알기에 전언을 보내기 쉬웠지만, 본가가 아닌 다른 곳에 계셨던 벨져 후보님의 경우엔 어찌 전해야 하나 난감했었습니다.”
“뭐, 집에서 전언을 받았다 하더라도 제 대답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를 경계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신뢰를 안 한다고 보는 게 맞겠죠.”
살짝 날이 서 있는 대답이었다.
“이해합니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무작정 모여달라 한 저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글쎄요. 그렇게 보내도 다른 후보들이 다 모일 것이라 확신하신 것 아닙니까?”
위즈는 허를 찔린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벨져의 눈을 무심히 쳐다보다가도,
“많이 변했군요. 벨져.”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힘을 가지면 아무리 망나니였던 마족도 변하는 법일까요? 마혈석을 가지기 전에 당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당황한 벨져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허나 내색하진 않으려는 듯 최대한 표정을 감췄다.
“힘이 전부인 마계에서 힘은 재산과도 같죠. 그게 없었던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았고요. 하지만 힘은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걸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삶은 달라지지 않겠죠.”
“갑자기 그 이야긴 왜 하시는 겁니까?”
“전대 마왕의 마혈석을 드렸을 그때와 비교해서, 눈에 띄게 발전한 모습이 감탄스러워서 드린 말입니다. 너무 신경 쓰진 마시길…….”
그 말에 벨져의 정신이 약 1초 동안 정지됐다.
방금 그의 말을 정리해 보자면, 벨져에게 전대 마왕의 마력이 담긴 마혈석을 준 장본인은 바로,
‘이 자였나? 이 망나니 후보에게 마혈석을 준 마족이?’
위즈라는 뜻이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생뚱맞은 사실에 벨져는 애먼 입꼬리만 움직였다.
이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위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데, 이번에 베누스 후보와 무력 충돌이 벌어졌을 땐, 그 마력을 쓰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소문에 의하면 역병에 고통받는 마족들을 정화하기 위해 퍼밀리어에게 마혈석을 넘겨주셨다던데…….”
소문보다는 당시 현장에 있던 당사자로부터 그 목격담을 들은 듯한 느낌이었다.
“원래부터 다른 힘이 있으셨던 겁니까? 제가 알던 벨져 후보는 그런 힘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
“저에 대해서 뭘 얼마나 잘 아시는진 모르겠지만…….”
벨져는 대답과 함께 옆에 놓인 의자에 걸쳐놓은 아크베리아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선, 스스로에게도 숨겨야 하는 무기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 개념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그렇군요.”
위즈는 얼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저희가 왜 다시 후보들을 모이게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고 하셨죠?”
“그랬죠.”
“중재를 위해섭니다.”
중재란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벨져 후보께선 어찌 생각하실진 모르겠지만, 이번 사태는 벨져 후보에게도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베누스 후보와의 혈전 이후, 타 후보와의 다른 충돌이 발생하진 않았으니까요.”
“뭐 그렇긴 했죠.”
“하지만 이제부턴 다를 겁니다. 남은 후보들은 앞으로 더욱 벨져 후보를 주시하고 경계하겠죠. 이전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땐 지금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일 리 있는 말이었다.
칼을 한 번 휘두른 마당에 두 번, 세 번 휘두르지 말란 법 없다.
언제 그 칼끝이 자신을 향할지 모를 상황에서 묵묵히 지켜만 볼 린 없을 터.
이는 벨져도 어느 정돈 예상한 일이었다.
“허나 후보 간의 싸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마계엔 큰 손해겠지요. 더군다나 그 손해를 감당해야 하는 전적으로 힘없는 마계의 소시민들이 될 겁니다. 의도하셨든, 의도하지 않으셨든 말이죠.”
이전에 다일과 만났을 때, 그가 한 주장과 비슷했다.
즉 결론은 앞으로 크게 번질 싸움을 대비해 주최 측에서 중재를 좀 하겠다는 건데,
벨져는 이해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마왕 경합의 본질은 마계에서 가장 강한 마족을 선출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 차원에서 보면 싸움은 다소 과격하긴 해도, 제일 정직한 마왕 선출 과정이라 해도 무방했다.
이걸 굳이 주최 측에서 중재한다고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답은 딱 하나.
중재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입을 가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벨져는 다시 위즈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 중재란 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실 저희도 아직 고민 중입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벨져는 고개를 갸웃했다.
“벨져 후보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계획을 세울 순 없으니까요. 이번 모임의 핵심은 벨져 후보의 참석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너무 부담 주시는 거 같은데요?”
“부담 줄 행동을 여태 하시지 않았습니까?”
유구무언.
머쓱한 마음에 벨져는 코를 쓱 문질렀다.
“뭐 알겠습니다. 근데 조금 늦을 수도 있습니다. 급히 다녀올 데가 하나 생각나서요.”
“너무 늦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다른 후보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테니까요.”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벨져는 목적을 달성하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위즈를 한 번 더 불러 세웠다.
위즈는 고개를 끄덕였고, 벨져는 말을 이었다.
“과거의 제가 이 질문을 했었는진 모르겠지만……. 왜 주신 겁니까? 이 마혈석?”
위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듯, 그 통제하기 힘든 마력을 벨져 후보라면 잘 다룰 수 있어 보였기에 드린 겁니다. 아무리 과거의 영광만 남았다고 해도, 벨져 후보는 전대 마왕 벨시페르의 후손이시니까요.”
그 말을 들은 벨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는 마족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고.
* * *
다시 회담장.
게임을 제안하고 싶다는 위즈의 발언에 모든 후보의 눈이 부릅떠졌다.
침묵 속에서 다일이 손을 들며 물었다.
“무슨 게임을 제안하시겠단 겁니까?”
“그야 물론, 여러분의 힘과 관련된 게임이겠지요.”
위즈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하자, 이번엔 이사벨이 물었다.
“힘이라고 하면, 마력과 관련된 건가요?”
“마력도 관련은 있지만, 크게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겁니다. 모두 탁상을 봐주시죠.”
회담장에 있는 모든 눈동자가 탁상 중앙으로 향했다.
탁상 위엔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반투명한 형상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