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 소원
[접촉한 몬스터 및 NPC의 설정을 확인하고 거기에 개입 및 왜곡이 가능합니다.현재 개입 가능한 개체 정보: 가을 거목의 숲
대륙 전쟁 시절 헤르도아의 군대에 의해 대규모 저주에 걸려 오염된 땅. 가을 거목의 숲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고 거기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드라이어드의 어머니였으나, 현재 그 땅은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대지가 되었다. 중앙에 버티고 선 가을 거목 역시 오염되어 언젠가 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 한번 오염된 땅은 돌아갈 수 없다.
현재 변경 가능한 설정: 설정 스크립트 수정, 롤백, 리셋, 데이터 삭제.]
숲이라는 넓은 자연 지역엔 통하지 않을까 싶어 걱정했지만, 이 숲 모두가 ‘가을 거목’이라는 대표 NPC의 영역으로 적용되어 있었다. 또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이 순간에도 썩어 바스러지고 있는 저 거대한 나무는 지금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설정 스크립트 변경. 저주가 풀렸다, 로 수정.”
[해당 수준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부정적인 알림창이 올라왔으나 아인은 상심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롤백이나 설정 스크립트 수정도 만능은 아니었다. 개입한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바꾸는 정도라면 능력이 제한되어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다며 막힌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어느 정도까지는 세상이 이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은 그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만일 아인이 정말로 이 세상을 좀먹고 멋대로 구는 능력을 가졌다면 이런 제한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아인 혼자만의 생각이고 근거 없는 망상일 수 있다. 어쩌면 정말로 세상에 위해가 가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어린애 병 고쳐 주고, 죽어 간 마을 좀 되살리는 걸로 망할 세상이면 망해 버리라고 해!!’
아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계속해서 설정 스크립트 수정을 시도했다.
“그래도 나무는 멀쩡한 상태이다, 라는 문장 추가.”
[해당 수준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저주를 풀 마법이 생겨났다, 라는 문장 추가.”
[해당 수준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천천히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중이다, 라는 문장 추가.”
[해당 수준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극단적으로 시작해 조금씩 완화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또 다른 방식으로 빙 돌려 바꿔 보고.
어느새 오염이 덜 되어 지나갈 수 있는 곳을 찾은 사하바티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을 무렵, 아인은 마지막으로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마지막 문장 삭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댄 손아귀에 힘을 주고, 손가락 사이로 썩은 흙들이 잡혔다. 아인은 천천히 다가오는 사하바티의 발소리를 들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회복될 것이다, 라는 문장 추가.”
이후 알림창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아무 반응이 없다가 뒤늦게 문장을 띄웠다.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알림창을 본 아인은 동시에 급하게 퀘스트창을 켰다. 사하바티가 주었던 퀘스트를 확인해 보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말미의 문장이 바뀐 것이 보였다.
[퀘스트명: 저주받은 땅신성한 가을 거목이 있던 대지는 헤르도아에 의해 황폐해지고 오염되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며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한다면 오염이 다른 땅으로 전이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사태를 무마시켜 보자. 언젠가 땅은 회복될지도 모른다.]
보상: 경험치, 가을 거목 드라이어드족의 신뢰, 가을 거목의 숲이 수복됐을 시 일정량 보상.]
마지막 문장이 달라지고, ‘반복’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보상도 추가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드라마틱하게 땅의 오염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이곳을 원상태로 만들려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와 ‘작더라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바뀔 것이다.’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새까만 동굴에 빠졌을 때 티끌만 한 빛이라도 보인다면, 엉망인 상태라도 언젠가는 비척비척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아인, 길을 찾았어. 내가 앞장서 안내할 테니 그쪽으로 가면 될 거야.”
“다행…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응. 오래 걸리지 않아 다행인데. 우는 거니? 길을 찾은 것이 그렇게 감동적인 걸까.”
사하바티는 돌아오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인을 보며 갸웃했다. 아인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내다가, 한 번 크게 훌쩍이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슬픈 일이니?”
“슬픈 일이지만 언젠가 괜찮아질 일이에요.”
“다행이구나.”
사하바티는 부드럽게 웃었고, 아인은 사하바티를 한 번 꼭 끌어안은 후 이곳을 정화시키는 퀘스트를 몇 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할 일은 다 끝내야겠지만. 이번엔 금방 해결됐으면 좋을 텐데.’
사하바티는 아인의 손을 잡은 뒤 비교적 오염이 덜한 길을 따라 숲을 나아갔다. 사방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조금 떨어진 오염의 중심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마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타락한 드라이어드들이야. 끝까지 이곳에 남은 이들이란다.”
“…이곳에 남은 이들이 많나요?”
“대부분은. 이전에 보았던 그렉이나 내가 오히려 희귀한 경우야.”
드라이어드는 대부분 태어난 숲에서 여생을 보내며, 숲에 질병이 돌거나 불이 나더라도 설사 죽더라도 그곳에서 죽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납치나 외적인 이유가 아닌 스스로 마음을 먹고 마을을 벗어난 드라이어드는 별종 취급을 받는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사하바티는 벗어나도록 ‘설정된’ 드라이어드일까.’
만일 그런 사항조차 처음부터 결정된 사항이라면 만감이 교차할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손을 잡고 있으니 ‘설정 프로그램 개입’을 읊조리기만 하면 된다.
“…사하바티?”
“왜 그러니?”
“나가기로 한 건. 사하바티가 직접 결정한 건가요?”
“응.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이 길이 옳다고 생각했어.”
아인은 작게 웃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정 프로그램 개입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남의 과거를 헤집어 보긴 싫었고, 설사 정해진 것이라 해도 직접 행동하고 그동안 느낀 감정이 가짜라고 말할 순 없기에.
둘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걸었다. 직선으로 간다면 이미 돌파하고도 남았겠지만 오염이 덜 된 길을 따라 빙빙 돌다 보니 꽤 시간을 오래 잡아먹었다. 운이 좋게도 중간에 습격하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중간에 쓰러져 꿈틀대고 있는 생물을 보며 아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덜 썩은 곳인데도 오염이 정말 심하긴 한가 봐요. 여기도 타락한 드라이어드가 있네요. 먼저 공격하진 않을까요?”
“응. 이쪽에 달려들진 않을 것 같아.”
“그래도 타락한 드라이어드라 해도 이성은 남아 있나 봐요.”
“아니. 저건 그냥 죽어 가는 인간 같아서.”
“그 말을 먼저 하세요!!!”
‘과거의 동료를 찾아서 감동의 눈물을 머금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타락한 드라이어드.’ 같은 망상을 하고 있던 아인은 기겁을 하면서 급하게 쓰러진 이에게 다가갔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한 남자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는데, 몸에 독소가 퍼진 듯 목과 얼굴이 새까맣게 질려 있었고, 새파랗게 변색된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정신 차리세요!! 괜찮으세요?”
“ㄴ, 네. 괘. 괜찮. 괜찮아요….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해요. 갈 길 가세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아인은 남자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안절부절못하며 사하바티를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오염됐을 때 치료 방법은 없나요? 약초나 응급 처치라든지…!”
“일단은 오염된 부분을 잘라 내는 게 가장 일반적인 응급 처치 방법이긴 해.”
“알겠어요! 오염된 부분을…!”
그리고 아인은 머리 전체가 오염된 남자를 보며 절규했다.
“이건 응급 처치가 아니라 사후 처리 방법이 되어 버리잖아요!!”
“아니 저 진짜로 괜찮…. 지금 상태가 별로긴 한데….”
아인은 뭐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남자에게 더 말하지 말라며 아예 입을 막아 버렸다.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치료 방법을 찾을게요. 죽지 마세요.”
아예 ‘설정 프로그램 개입’을 통해 롤백을 시켜 버릴까. 아인이 그 생각을 하며 남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앞에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플레이어에게는 해당 시스템 사용이 불가합니다.]“에?”
아인은 의문으로 물든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답을 도출하고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카오스의 조각이셨구나.”
“네. 그래서 그냥 죽었다가 몸 상태 리셋되는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인은 그 말에 한숨을 쉬더니, 남자를 번쩍 들어 업어 버린 후 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함부로 죽느니 마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 주실 이유는….”
“있어요!”
남자는 아인의 등에 업힌 채 어쩌지도 못하고 매달리기만 했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라지만 몸을 움직일 정도도 아니었고 이대로 두면 죽는 것은 확정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키가 비슷하거나 약간 작은 편이라 업기에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아인은 한 번 몸을 들썩여 자세를 고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곳에 쓰러져 계셨던 거예요?”
“원래는 다른 마법사분이랑 얼어붙은 바다로 가고 있었는데, 급한 일 때문에 로그아웃을 하셨어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 혼자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래도 혼자 남겨 두는 건 너무해요.”
“오염이 덜 된 곳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둘이 갈 때는 괜찮았는데. 제가 좀 운이 안 좋아서 혼자 남자마자 갑자기 으웨엑….”
남자는 그 말을 하다가 입에서 줄줄 새어 나오는 피를 닦아야만 했다. 아인은 기겁을 하며 다시 눕히려 했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일인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기본적으로 몸이 안 좋아 가지고 10여 개의 질병들을 달고 살곤 해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이는데요?! 무지하게 신경 쓰이는데요! 대체 같이 오셨던 분은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질병을 달고 사는 분을 놓고 간 거예요!”
“어…, 동생이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때문에 트리 꾸며야 한다며 자기 부른다고 했어요.”
크리스마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아인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건 뭐예요? 전 세계적인 대규모 종교 행사인가요? 트리라는 건 종교 제단이고요?”
“종교 행사….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묘하네요.”
“거기에선 어떤 신을 모시나요? 카오스의 조각들이 섬기는 신이니까 굉장하겠죠?”
“어어…, 섬긴다고 해야 하나…. 특정한 날에… 한 해 동안 울지 않는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하늘을 나는 썰매를 타고 선물을 주는… 빨간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 신…?”
“우와. 아이들이면 잘 울 텐데 엄격한 교리네요. 마법 실력도 출중한 것 같고.”
남자의 말에 아인은 감탄을 했다. 하루 동안 전 세계의 아이들 중 울지 않은 아이들을 선별하고 그들에게 선물을 준다니.
심지어 직접 발로 뛰어서 줄 리는 없을 테니, 전 대륙 차원으로 마법을 시행했을 것이다. 하늘을 달리는 마차 역시 얼핏 들어도 최고급 마법 용품이었다.
이후로 아인은 산타가 이끄는 마수가 페가수스일지 드래곤의 아류일지에 대한 생각을 말하다가, 잊어버렸다는 듯 ‘아차차’ 하고 소리를 냈다.
“통성명도 안 했네요. 혹시 이름 여쭤봐도 될까요? 제 이름은 아인이에요.”
“아인. 좋은 이름이네요.”
남자는 힘없이 짧게 새는 웃음소리를 내고는 아인의 등에 업힌 채 느릿하게 말했다.
“이름몇자까지… 아니. 그냥 이름이라고 불러 주세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부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