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1)
11화 : 컨셉충이란게 뭔가요?
PC사이에도 일정한 등급이나 경계가 나뉘어져있는 것일까.
아인은 긴장된 얼굴로 닉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닉은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손가락을 네 개 핀 뒤, 차례로 접었다.
“첫 번째. 효율충. 그야말로 빠른 성장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 너같이 순진한 애들이 그런 놈을 만나면 진즉에 털리고 네 모든 물건은 그 녀석의 인벤토리 안에 들어가 있을 거다. 상대방이 어떤 감동적인 스토리나 트레일러 영상을 가지고 있든, 전체 스킵한 뒤에 알맹이만 빼먹을 족속이야.”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잔악무도한 강도를 설명하는 듯한 묘사에 아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설정충. 여긴 비교적 나은데, 모든 것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며 주접을 떨거나 말 같지도 않은 스토리를 예상하는 놈들이지. 가끔 보면 재밌는데, 자기가 생각한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갑자기 캐붕이니 설붕이니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피곤해.”
끔찍한 소리다. 강대한 힘을 가진 작가 자신만의 억지스러운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겠는가.
마족에게서도 카오스의 조각이 발현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 중에 삐뚤어진 신념을 가진 마왕이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세 번째. 고인물. 아직 오픈 초기니까 얘들은 없겠지만… 차후 어디에선가 속옷만 입고 다니거나 괴상한 동물 로브 입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점프만 하고 다닌다든지 굳이 어렵게 몬스터를 잡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면 도와주지 말고 피해. 지루한 삶에 자극이 필요한 놈들이다. 붙들리면 귀찮아져.”
왜 속옷만 입고 다니는 건지, 점프는 왜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작 중간계의 일원에 불과한 아인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같은 카오스의 조각인 닉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하나가 남았는데, 이번에는 아인도 유추할 수가 있었다.
리치와의 전투 후 만났던 PC. 바로….
“컨셉충인가요.”
“맞아. 이 세계가 진짜인 줄 알고 과몰입하는 녀석들이야. 이상할 정도로 매사에 진지하거나 되도 않는 명대사를 읊으려는 놈이 있으면 피해. 모 아니면 도야. 가장 위험하다.”
닉은 아인에게 단단히 충고를 했지만, 아인은 첫 문장 이후 뒷말을 반쯤 흘리듯 들었다.
이 세계는 분명 진짜인데. 카오스의 조각들에게는 한낱 유흥에 불과한 세계로 여겨지는 것일까. 닉의 말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아인은 뭔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는 말투만으로는 파악이 힘들어요. 예시라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예시? 뭐라고 해야 하나. 딱 느낌이 있어. 얘는 진짜구나 하는.”
닉이 팔짱을 끼고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인의 어깨에 앉아있던 윈디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닉이 로그아웃을 하고 있을 때 느꼈던 불온함이 다시금 덮쳐들었다.
심지어 이번엔 기척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악의를 한데 모은 듯한 부정적인 기운이 하나의 인영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요, 요. 용사님. 용사님… 저기….”
“좀 허세 넘치고 그런… 어? 어? 왜?”
닉은 눈을 깜빡이며 아인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던 ‘그것’은 그제야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을 들었다.
썩은 생선처럼 생기가 없는 두 눈은, 건조한 황야처럼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련한 필멸자야. 나약한 불멸아. 두려워하지 말라.”
“아. 딱 저런 말투인데.”
***
그것은 아인과 닉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모습은,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보는 것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위선의 개늉늉. 몽매한 이들을 헐벗기고 검은빛을 알리는 신자. 너희에게 닥쳐올 앞날을 예견해줄 뿐이오니. 이를 알고, 더욱 퍼트려 공포를 전하거라.”
“개늉늉 씨!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난 개늉늉이 아니다.”
자신을 신자라고 자칭한 이는, 아인의 말에 멈칫했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
역시 광기에 차 있는 존재에게 다른 이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걸까. 아인이 손을 품에 넣어 고위 정령석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닉이 아인의 어깨를 잡아챘다.
“왜 그러세요?”
“쟤는 우리 공격 안 할 거야.”
“왜요?”
“나 아직 계정생성한지 얼마 안 된 초보라서 함부로 PVP하면 패널티 엄청 받거든.”
“PVP요?”
“플레이어 브이에스… 음 그러니까….”
용사님은 콧잔등을 긁으며 단어를 고르듯 눈을 굴리다가, 아직 음험하게 중얼거리고 있는 신자를 가리켰습니다.
“쟤도 PC야.”
정곡을 맞았는지, 그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가벼운 말로 나를 통칭하려 하지 마라.”
“와… 찐이다.”
신자는 일순간 발끈하는 듯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하던 말을 계속했다.
결국 직접 나서기로 했는지 닉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저기요 님. 보니까 말단에서부터 시작해서 소문? 영향력? 그런 거 퍼트려야 하는 퀘스트 종류인건 알겠는데.”
“나는 쇠하지 않는 자. 불멸의 신자일지니.”
“어느 정도는 도와 드릴 테니 적당히 하세요. 엔피시 상대면 몰라도 저희가 보기엔 진짜 좀 그래요.”
“카오스의 조각은 혼돈에서 비롯된 것.”
“처음에 개 뭐라고 하려다가 욕설 필터링된 거 다 들렸거든요.”
“…이 대륙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지니!!”
신자는 분노로 일갈하며 갑작스레 마력을 방출하더니, 사악하기 짝이 없는 지팡이를 꺼내 닉을 가리켰다.
이윽고 지팡이에서 검붉은 화염구가 방출되자, 당황한 닉은 칼을 빼들어 그것을 베어버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열기와 불똥이 휘날렸다.
아인은 빠르게 몸을 움츠려 피해가 없었지만, 닉은 미처 피해를 흘리지 못했는지 얕은 신음을 흘렸다.
“괘, 괜찮으세요?”
“심하게 다치진 않았어. 그나저나 진짜 공격할 줄은 몰랐네.”
“다, 당장 주변의 모험가들을 부를까요?”
아까 전에도 모험가가 지나갔으니, 바람의 정령을 사용해 크게 고함을 지르면 사용하면 적지 않은 이들에게 목소리가 들릴 터였다.
게다가 이미 앞서가던 모험가 몇몇은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다른 곳에서도 이곳을 향해 오는 발소리가 빨라지는 것이 아인의 귀에 들어왔다.
하나 닉은 여전히 이 상황을 위협적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 자신을 공격한 신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인 또한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자, 그곳엔 공격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신자가 있었다.
눈은 데굴데굴 굴러가지만, 입도 열리지 않고 더 이상의 마력도 방출되지 않았다.
“이, 이게 대체 뭐예요?”
“전장 아닌 필드에서의 합의 없는 pvp. 렙차가 남. 나는 여기 온지 일주일도 안 된 신생계정. 그런 상태의 나를 공격하면 일정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하거든. 껐다 켜도 상관없이. 몇 번 더하면 밴 먹을 텐데 어지간히 버튼 눌렸나봐.”
일단 세계가 닉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다는 것일까. 아인은 슬슬 자기 식대로 이해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신자를 살펴보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위선의 개새끼들을 벌하소서.”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느꼈던 탁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온함이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여명의 검은 빛을 알리는 신자. 쇠하지 않는 이들.”
아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방금의 신자가 그저 끄나풀이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위험한 자가 나타났다고.
닉도 여유가 있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얼굴을 찌푸렸다.
“엔피시는 욕설 필터 안 걸리는구나. 괜히 억울하네.”
팽팽해진 긴장감이 장내를 휘감았다. 소란을 듣고 찾아온 다른 모험가들도 멈칫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찰나의 적막 사이로, 검붉은 로브를 입은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새까만 흑발과 눈동자. 찢어질 듯한 입은 실온에서 썩은 치즈처럼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좌중을 한번 느리게 훑더니, 이내 닉과 신자를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미소지었다.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라 보냈더니, 도리어 호된 고행을 당하고 말았군요.”
“저건 따지면 지가 알아서….”
닉의 설명에도 아랑곳 않고 여성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세력을 떨칠 때에, 언제나 방해자는 존재했었지요. 한번은 우리를 절멸에 가깝게 무너뜨렸고 말이죠. 후후. 당신도 이번에 그럴 생각인가요.”
“아니 전 그냥 용사….”
“용사. 확실히 우리의 적절한 고행이 되어줄 사명을 가졌군요.”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봐. 일단 쟤가 저렇게 된 건….”
“왜 우리의 신자가 당신을 공격하자마자 몸이 굳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높은 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요? 과연. 마치 예전의 그 관철자를 상대하던 때의 위압감이었나. 좋아요. 이번에도 우리 헤르도아의 부활과 영광을 막아보시길 바랍니다. 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이 미친늉늉 아까부터 지 좋을 대로만 듣고 있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는 닉의 뒤에서, 아인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이름 때문이었다.
헤르도아.
수십 년 전 대륙 전체에 악명을 펼치며 ‘혼돈의 재림’을 예언하던 최악의 사교도 집단.
이 세상을 혼란과 혼돈으로 이끄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악마는 물론 천사까지 마구잡이로 강림시키고 수십 개의 왕국을 지도에서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분명 헤르도아는 전 대륙이 힘을 합쳐 절멸시켰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다시?
아인은 헤르도아가 다시 부활했다는 사실도 경악스러웠지만, 그곳에서도 카오스의 조각이 나타났다는 점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카오스의 조각이 악과 선의 개념이 없이 평등하며, 모든 곳에서 그 위상을 알리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자, 어쩌면 닉이 저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아인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한참을 씨근덕대던 닉은, 아인이 자신의 손을 잡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 이런 젠장….”
어느새 구름처럼 몰려든 모험가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개중엔 카오스의 조각도 섞여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말을 대화를 주고받았다.
“야 빨리 스샷찍어.”
“메인시나리오 아냐 이거?”
“쟨 뭐야? 용사? 그런 사명 있어?”
“히든인가봐. 부럽다.”
닉은 그야말로 황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조용한 솔플 라이트 유저로 살고 싶었던 내 꿈이….”
“히, 힘내세요. 모두가 용사님을 주목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싫다는 거야.”
그 사이에도 모험가들은 점점 몰려왔고, 에스텔 쪽에서 왔는지 말을 탄 정찰병 두어 명이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내 큰길을 꽉 채울 만큼의 인원이 몰리자, 검붉은 로브의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펼치고 소리쳤다.
“이제 곧 모든 곳에서 헤르도아의 재림이 울려퍼질 것입니다. 목도하라! 목격하고 간증하여, 당신의 가족과 친우에게 전하라! 죽지 않는 영광에 고개를 숙이고 참된 진리를 알 준비를 하라. 혼돈이 머지않았음을 알려라!”
어투와 목소리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명이 말하는 것처럼, 가늘었던 미성이 목을 긁는 듯 거칠어졌다.
도시에서 온 정찰병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에 저마다 바람의 중급정령 제피로스와 땅의 중급정령 불칸을 불러냈다.
“멈춰라! 에스텔의 경비병이다. 너희는 누구지?”
혼탁한 기운에 제피로스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온화한 성격인 불칸조차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지금 당장은 당신들에게 아무 짓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검붉은 로브의 여성은 어느새 목소리가 돌아와 있었다.
정령과 정찰병을 귀엽다는 듯 보며 입가를 가리고 웃은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뒤 고개를 까딱였다.
“그저 다가올 몰락에 벌벌 떨어달라 부탁드릴 뿐.”
그 말을 남기고, 검붉은 로브의 여성은 용사를 한번 보고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자리는 ‘메인 스토리’라느니 ‘첫 레이드퀘’ 같은 단어로 가득해졌고, 개중엔 은근슬쩍 닉에게 다가와 길드 가입을 권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선 닉은, 나직한 중얼거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의 감상을 대신했다.
“시1발.”
저건 욕이다. 아인은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