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 전 멀쩡해요 아마도
닉은 천장을 부수며 날아오는 에르를 보며 두 가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첫 번째는 어지간해서는 모든 일에 덤덤하고 무관심한 에르가 이 정도까지 화내는 것을 보면 상황이 적당히 끝날 리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펫 에르의 주인인 자신이 저 고급 숙소의 배상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르 진정해봐. 천천히 말해봐. 아 참고로 천장 부서진 건 내가 변상 안 할 거니까 책임자 물어볼 때 내 이름 대지 마라. 난 저기에 안 묵었으니까.”
닉이 차분하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 사이, 에르는 오른쪽에 화염구와 뜨겁게 달아오른 쇠창, 왼쪽에 파직거리는 뇌격의 검과 날카로운 얼음 송곳을 떠올린 채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 마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는 진정하라는 말에는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아인의 이름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닉의 옆에서 공포에 질려 있는 이름을 보더니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너야? 네가 아인이랑 같이 있었어?”
이름은 몸을 잘게 떨며 당장이라도 쇠창을 꽂아 넣을 것처럼 구는 에르의 앞에서 완전히 굳어있었고, 닉은 에르를 뜯어말리려 했지만 완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닉은 호루라기를 꺼내 불어 에르를 강제로 역소환시켰다.
“흐악?!”
갑자기 사라진 에르에 또 한 번 놀란 이름은 뒤로 넘어지듯 주저앉고, 닉은 한숨을 쉬며 허리를 굽혀 이름과 시선을 맞추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드문드문 딸꾹질까지 하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제 펫인데, 아인이라는 애 이름만 나오면 눈이 뒤집혀서…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오해가 생긴 것 같아서. 그 부분은 사과드릴게요.”
닉의 말에 이름은 고개를 기울이다가 살며시 손을 휘적거렸다.
“아 근데. 저랑 같이 있던 건 맞아요.”
“그걸 빨리 말하란 말이야!! 괜히 역소환했잖아!!”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제가 위험에 빠트리기까지 해서.”
“심지어 에르가 말한 것보다 더 심각해!!”
아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에르에게 사과할 거리도 생겨버렸다. 닉이 마른세수를 하며 탄식을 뱉던 중, 이름은 닉의 손을 붙잡고 얼어붙은 바다가 있는 곳을 한번 쳐다보았다.
“길게 상황설명을 할 시간이 없어요. 얼어붙은 바다에서 헤르도아의 사제들이 저희를 덮쳤어요. 저랑 아인이랑 사하바티라는 분은 바다에 빠졌고요.”
“근데 왜 당신만 여기 있어요?”
“…저는 그때 시작된 레이드 업데이트 패치 때문에 강제 종료됐어요. 마지막 마을인 여기로 로그인 위치가 옮겨진 모양이지만, NPC인 그분들은 아직 거기에 있을 거예요.”
헤르도아의 사제들은 이전에도 한번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악식왕에 의해 간단하게 제압되기도 했거니와, 그사이에 또 올까 하는 안일한 마음이 있었다.
“젠장. 이전에도 한번 습격하려는 낌새 보이더니 포기 안 하고 또 온 건가. 애초에 왜 둘만 거기에 간 거야? 돌아버리겠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바다에 빠져 있어도 문제고 헤르도아에게 잡혀 있어도 문제니까 빨리 가야 해요.”
이렇게 추운 곳의 바다에 빠졌으면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다. 닉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얼어붙은 바다 쪽으로 가려는데, 이름이 뒤에서 닉의 손을 꾹 잡았다.
“같이 가세요. 중간에 오염된 숲이 있어요. 지나치려면 독성이 덜 된 곳을 따라가야 해요.”
“응? 그러면 네가 앞장서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왜 뒤에 있어.”
“제가 앞장서면 독이 없던 곳도 생겨서… 제가 잡고 있으면 아무렇게나 가도 될 거예요. 그냥 발 닿는 곳이 정화된 곳이고 그럴 테니까요. 믿어주세요.”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시간도 부족했다. 닉이 급하게 발을 옮기며 이동하던 중 어느새 여관 안에 있던 라칼과 이후프도 뒤에 따라붙었다.
“갑자기 무슨 소란이 있나 했더니. 일이 생기면 우릴 불렀어야지.”
“여러분들이 나서는 걸 보고 바로 나왔답니다.”
“너희들…!”
닉이 감동한 눈으로 이후프와 라칼을 보고 있는데, 여관 안쪽에서 고함 소리가 울렸다.
“천장 무너뜨린 놈 누구야!! 당장 나와!!”
라칼은 닉의 어깨를 툭툭 치며 더 빨리 가자는 듯 은근히 밀었고, 감동으로 물들어있던 닉의 파란 눈동자는 점점 건조하게 변해갔다. 닉은 그나마 상식을 겸비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후프를 배신자 보듯 쳐다보다가 결국 얼어붙은 바다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하나같이 스탯이 보통 이상인 이들만 모여 있는 데다 거의 뛰다시피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어붙은 바다까지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어느새 오염된 가을 거목의 숲 지척까지 도착했을 무렵, 사방에서 풍겨오는 썩은 냄새에 라칼은 얼굴을 구겼다. 이후프는 표정이 없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드문드문 내는 침음엔 긍정적인 느낌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이제 고향에는 미련이 없다고 하더니. 그럴 만도 하군.”
“미련이 없을 리가요. 미련이 없게 하려고 이곳을 떠난 거겠죠.”
“넌 괜찮나? 이런 풍경을 봐도.”
“괜찮지 않지만, 흔들릴 정도로 무르지도 않아요. 저는 돌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이후프는 농조로 말하며 자신의 몸을 몇 번 두드리고, 라칼은 그런 이후프를 가만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코를 막은 채 일행의 중간에 섰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진흙을 손으로 퍼서 가만히 쳐다보던 이후프는, 손을 탁탁 털고 다시 일행들을 쫓았다. 이름의 말대로 닉은 내키는 대로 아무 곳에나 발을 딛고 있었으나 운 좋게도 오염이 덜 된 곳만을 골라 나아가고 있었다.
행운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몰아주는 자신의 특성을 잠깐이라도 멈추지 않으려는 듯, 이름은 닉의 손을 꽉 잡고 있다가 눈치를 보며 다른 손으로 어깨를 톡 건드렸다.
“저 그런데….”
“왜?”
닉은 곧바로 고개를 휙 돌리고, 특유의 예민하고 차가운 인상에 이름은 잠시 겁을 먹었으나 간신히 용기를 내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같이 가자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의심하거나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 없으신가요? 하다못해 제가 잡고 있으면 그냥 가도 된다는 말도 이상하게 여길 법한데.”
“아 그거?”
닉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고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담담하고 심드렁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뒤로 흘렀다.
“앞으로는 복잡하게 생각 안 하기로 했어. 대충대충 넘기는 게 원래 내 성격이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말려고.”
“하긴 하드 게이머가 아니면 게임에서 일희일비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죠. 그냥 놀려고 왔는데 과몰입하면 스스로 현타가 오기도 하고….”
“게임이라서 그런 것보다는… 우리 사는 곳에서도 직접 피해받는 일 아니면 대충 넘기잖아. 여기라고 크게 다를 바 있나 싶어서.”
닉은 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다가 멈칫하고 단어를 고쳐 말했다. 이름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갸웃하다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염된 숲도 거의 다 끝났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될 거예요.”
“생각보다 넓네.
닉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았다. 사하바티의 잃어버린 고향이자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곳. 반복 퀘스트가 생기던 장소라는 것을 상기한 닉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의미는 없더라도 끝나고 한두 번 정도 퀘스트는 할까.’
사하바티가 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모양새 정도는 내고 싶었다. 사실 사하바티 본인은 하든 안 하든 태도에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숲의 끄트머리에 다다를 무렵, 닉은 전에 보았던 퀘스트창을 열었다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분명 원래는 반복 퀘스트였는데?’
끝에 붙어 있던 ‘반복’이라는 말도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설명도 미묘하게 바뀐 상태였다. 물론 한두 번으로 끝낼 만한 횟수는 아니겠지만, 반복 퀘스트가 아닌 이상 계속해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진행하다 보면 언젠가 숲은 회복이 되고 이 퀘스트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
닉은 미간을 좁히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혹시 이것도 아인의 짓인가? 함부로 넘겨짚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퀘스트까지 함부로 건드리고 있는 거라면 역시 한 번쯤 말해야 했다.
아인이 난리를 친다고 닉에게 책임이 돌아가진 않더라도, 그런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으면 아인 본인에게 업보가 돌아가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에.
“빨리 가자. 그런데 얼어붙은 바다라더니 그냥 비유만 그런 거야? 바다에 빠졌다면서.”
“아 그게 사정이 좀 긴데….”
“간략하게 설명해봐.”
“크라켄이 다 깨부쉈어요.”
“약간만 설명을 보충해줄래?”
“제가 크라켄을 불러서 다 깨부쉈어요.”
“너 말을 할수록 오해 사는 타입이라는 얘기 안 들어봤어?”
결국 ‘바다에 빠지기까지의 과정’을 편견과 오해가 묻지 않게 상세하게 설명하던 중 얼어붙은 바다에 도착한 일행은, 한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동영상을 촬영중이었다.
“쟤 직업 뭐야? 성직자인가?”
“일단은 NPC인 것 같지? 플레이어면 저렇게 과몰입하기 힘들 텐데.”
“되게 귀엽게 생겼는데. 어디서 봤더라. 얼굴 익숙한데.”
불안한 예감이 솟구친 닉은 인파를 뚫고 나가 그 중앙에 있는 자를 살폈다.
그곳에는 두 손과 몸의 절반 정도가 새파란 얼음에 구속된 채 움직이지 못하는 헤르도아의 사제들이 죽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에게 말을 걸고 무어라 대화를 시도하는 갈색 머리의 하프엘프가 있었다.
‘저거 아인이잖아…!’
머리 스타일이나 머리색, 눈 색도 바뀌긴 했지만 닉의 눈에는 영락없는 아인이었다. 그는 헤르도아의 사제 한 명을 붙잡고 계속해서 대화를 하다가, 종국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마구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사제를 택하셨구나. 저도 소중한 분이 저주에 걸려서 아파하고 계세요. 그걸 풀려면 같은 헤르도아의 사제가 필요하죠? 그 마음 잘 알아요.”
중년의 남자는 아인의 말에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자신의 과거를 줄줄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평범한 농부로 태어나서 성실하게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헤르도아의 사제가 딸에게 저주를 걸고 어떤 약을 써도 무용지물이 되자 끝내 헤르도아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으나 딸을 되살리고 싶어서…….
헤르도아의 사제들은 중년의 남자처럼 구슬프게 우는 이들도 있었고, 변화 없이 광기 어린 말들을 중얼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변화가 없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아인은 끈질기게 그런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대화를 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극소수의 사제들은 조금씩 머뭇거리며 입을 트기 시작하기도 했다.
닉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혹시 이것도 아인이 능력을 실험하기 위한 일환이 아닐까. 설정을 뒤집어버린 후 얼마나 적용될지 알아보기 위한.
분명히 사과를 하고 다시 잘 지내보자는 마음으로 로그인했지만 이런 식으로 시스템을 가지고 노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닉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낮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아인의 밝은 귀에는 들어갔을 것이다. 곧바로 아인이 움찔하며 몸을 뻣뻣하게 굳히자, 닉은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던거 끝나고 나와. 나 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