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 멀쩡해 보이질 않아
아인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라는 설정을 추가해놓은 헤르도아의 사제들과 이야기를 끝냈다. 오래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숫자가 숫자다 보니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수많은 사제들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마음이 바뀌거나 바뀔 가능성이라도 보인 것은 10% 미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광기에 깊게 물든 상태였고 여전히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인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적어도 가능성은 보였다는 뜻이니까.
이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다른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왔다. 우선 이 헤르도아의 사제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것.
당장은 엘퀴네스의 도움으로 몸의 절반을 완전히 얼려버렸기 때문에 안심이라지만 이 상태로 둘 수도 없었다. 노타나 영지의 명물로 ‘산 채로 얼어 죽은 100인의 헤르도아 사제상’이 생겨난다면 여러 의미로 곤란할 터였다.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은 당연히 안 된다. 헤르도아의 사술은 억제하고 몸만 자유롭게 해서 내쫓을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속 편한 길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엘퀴네스는 사제들을 얼린 후 몸을 피한 상태이기 때문에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평범하게 기절을 시키고 오염된 숲 인근에 던져놓을까 하던 중, 얼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엘퀴네스 님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했나?’
하지만 엘퀴네스는 이렇게 요란하게 등장하진 않는 성격이다. 그러면 이곳에 있는 누군가가 마법이라도 썼나 했지만 별다른 마나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인을 둘러싸고 헤르도아의 교화 과정을 촬영하던 플레이어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하나둘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진동은 멈추기는커녕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일었다.
“여기 흔들리는데?”
“누가 지진 사용했어?”
“잠깐만. 이거 지진 같은 게 아니라… 밑에서 뭐가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밑에 뭐가 있더라. 아인은 그 생각을 했다가 곧바로 떠올린 답에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잠잠했던 탓에 깨닫는 것이 늦었다. 아까 전 재앙의 패치가 완료되었다. 즉 아까 시점부터 실질적으로 레이드가 시작된 것이며, 그에 따라 새로이 업데이트된 재앙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번 차례의 재앙은 ‘살아 움직이는 해저’ 카리브디스.
두 주신 사이에서 태어난 바다의 아이이자 대양의 정당한 지배자.
“피하세요!!!”
아인이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두꺼운 얼음을 깨고 크라켄과 거대 상어 메갈로돈이 솟구쳐올랐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인간보다 두꺼운 촉수가 한번 휘둘러지자 다수의 플레이어와 헤르도아의 사제가 공중으로 날아가고, 메갈로돈이 사람들과 얼음을 동시에 먹어치웠다.
“제기랄 여기 재앙 영역이야!!”
“운도 지지리도 없지. 왜 내 발로 레이드 지역에 뛰어 들어와선!!”
범고래처럼 생긴 몬스터가 초음파를 내지르자, 헤르도아의 사제들을 감싸고 있는 얼음은 물론 까마득한 넓이의 얼음이 모두 붕괴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바다에 빠져버리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크라켄과 메갈로돈에 이어 바닷속에서는 인어들이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하반신이 사람의 형태인 어인들이 구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올라와 뼈로 된 무기를 들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에는 피아가 구별되지 않았다.
헤르도아의 사제는 물론 크라켄이 어인들을 잡아먹기도 하고 메갈로돈이 크라켄을 물어뜯는 등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 사이에 아인은 몸을 숙이고 손에 잡히는 아무나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어느 정도 인파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아인을 확인한 닉과 라칼이 그를 데리고 나오고 이후프는 축축하게 젖은 채 멍때리고 있던 사하바티를 들쳐 업었다.
닉은 아까 전 날아오는 얼음덩어리에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혀를 찼다.
“우선 여기에서 피하는 게 급선무야. 잠깐, 이름은 또 어디 갔어?”
“방금 자신 능력으로 사람들 구하겠다며 뒤돌아갔다. 카오스의 조각이니 내버려 뒀어.”
이름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운이 무차별적으로 빼앗기는 특성을 가졌다. 자신에게 공격이 몰아지든 다른 사람들이 운 좋게 피하든 이렇게 난전의 상황에서 분명 탱커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예상보다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닉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플레이어 몇몇을 주축으로 튀어나온 해양 몬스터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해서 그것들이 더 이상 밀려오고 있진 않았다.
“그런데 데려온 애는 누구인가요? 바다에 같이 갔던 분인가요?”
“네? 누구요?”
아인은 이후프의 질문에 의문스러운 눈을 끔뻑였다가 ‘아!’하는 소리를 내며 뒤늦게 자신이 잡고 있는 이를 돌아보았다. 아까 난리 통에 아무나 데리고 빠져나온다고 덥석 잡긴 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상태였다.
“아 죄송해요! 아깐 너무 급해서요. 놀라셨….”
하지만 옆을 본 아인은 제대로 말을 잇질 못했다.
상대는 아직도 말이 없었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검붉은 로브에 불온하게 풍기는 탁한 마나가 느껴졌다.
아인과 엘퀴네스에 의해 얼음에 갇혀 있다가, 중간에 몬스터들에 의해 얼음이 깨지며 풀려난 헤르도아의 사제 중 한 명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아인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시선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아까부터 자신에게 한소리를 할 작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닉부터 시작해 헤르도아에게 악감정을 지닌 이후프와 사하바티, 아예 보기만 해도 죽일 생각부터 하는 라칼까지.
“에르는 어디 있어요…?”
“너무 흥분한 상태여서 일단 역소환을 해 뒀어. 시간 지나면 나오게 할 거야.”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줄 이를 간절하게 찾으며, 아인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가 슬금슬금 헤르도아의 사제를 뒤로 숨기며 눈치를 살폈다.
“잠깐만 이야기 나눠보면 안 될까요?”
“나도 얘기 좀 하고 싶은데.”
닉은 한숨을 쉬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어지간해서는 의견을 따라주는 사하바티와 이후프조차 대답 없이 사제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으며 라칼은 벌써부터 발톱을 꺼내고 있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아인은 눈동자만 옮겨 헤르도아의 사제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뭐라도 말 좀 해 봐요.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난다구요.”
하지만 사제는 고개도 들지 않고 얼굴을 푹 숙이고 있다가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죽여도 할 말은 없고 목숨에 미련도 없으니까.”
힘없이 지친 목소리. 아인은 아까 전 헤르도아의 사제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던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파시에. 파시에 맞죠? 자, 잠시만요! 이분은 헤르도아의 사제가 맞긴 하지만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이렇다 할 활동도 안 했던 사람이에요! 아까 마음 돌렸던 분 중 하나고!”
아인은 아예 대놓고 파시에를 감싸며 두 팔을 벌렸다. 라칼은 그런 아인을 빤히 보다가, 한 손으로 옷깃을 잡고 옆으로 던져버렸다.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아인이 옆 나무의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라칼은 거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 모자를 걷었다.
금발에 새빨간 붉은 눈동자.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생기도 초점도 흐렸다. 기껏해야 막 성인이 되었겠다 싶은 어린 라칼은 혀를 차고 한 손으로 파시에를 들어 올렸다.
“젖살도 안 빠진 꼬맹이잖아.”
“성인이야.”
“대답은 잘하는군. 네가 온 곳이 어딘지 말해라. 헤르도아의 본거지라든지 지부 같은 곳.”
“헤르도아에서는 주기적으로 말단 사제들의 기억을 어지럽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곳을 말해봤자 헛고생만 할걸.”
라칼은 혀를 차곤 파시에를 떨어트렸다. 그러곤 이프리트에게 받았던 불꽃을 오른팔에 두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고통은 없을 거다.”
아인은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뭇가지에 옷이 걸린 채 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가지를 부러뜨리고 한달음에 달려와 라칼의 왼팔을 붙들었다.
“죽이면 안 돼요 라칼!!”
“안 될 이유는 뭐지? 반성하는 기미도 없고 삶에 대한 미련도 없어 보이는군.”
“…바뀔 수 있어요. 반성할 수 있고 미련도 생길 수 있어요. 어차피 그런 헤르도아의 사제는 라칼도 별로 흥미 없잖아요. 부탁이에요. 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이제 시작이에요.”
“헤르도아의 사제가 이제 시작이라고? 아인. 이미 거기까지 간 게 삶의 막바지라는 증명이나 다름없다. 거기까지 빠졌으면 다음은 없어.”
실제로 헤르도아의 사제로 귀의한 이들 중에는 생활이 막장으로 몰린 이들이 많았다.
헤르도아의 저주에 의해 주변에서 버림받거나 치료를 위해 재산을 탕진한 이들. 단순히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 들어간 이들. 어떠한 이유로 세상에 버림받고 크나큰 앙심을 품어 모든 것을 혼란에 밀어 넣기 위한 이들.
지금까지 헤르도아의 사제 중에서 일반인으로 돌아온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아인은 그것이 설정상에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라는 종류의 문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극단적이기 짝이 없는 설정에 단지 그 말만을 적어놓았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마음을 돌리는 이들이 생겼다.
아인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닉은 기다려달라는 제스처를 취하곤 아인을 따로 불렀다.
“너 또 무슨 이상한 짓 했어?”
“기… 기준 날짜가 언제부터죠?”
“무슨 결제 내역 살펴보냐? 대체 얼마나 해 먹은 거야.”
“세 봐야 알 것 같은데….”
닉의 말마따나 지금까지 하고 벌인 짓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당장 아까만 해도 헤르도아들의 설정을 건드리기도 했고, 오염된 가을 거목의 숲을 바꾸기도 했고.
닉은 아인의 어깨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체 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반복 퀘스트 지운 것도 너야? 지금 헤르도아의 사제가 마음 바꾸는 것도 그런 거고? 네가 멋대로 바꾸는 게 옳다고 생각해?”
“저라고 모든 것을 바꾸진 못해요.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크게 바꾼 것도 아니에요.”
“한 장소를 통째로 변화시키고 사람 인생까지 조종했는데 바꾼 게 아니라고? 예전엔 뭐 하나 잘못해도 겁먹고 그러더니.”
아인은 닉의 말에 입을 벙긋했다가 미간을 좁혔다. 억울함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은 누군가의 삶을 조정하거나 바꿀 자격은 없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만 놓았을 뿐이에요.”
아인은 오염된 가을 거목의 숲 설정을 뒤엎어 버린 것은 아니다. 헤르도아의 사제에게 ‘개과천선했다.’라는 설정을 붙인 적도 없다. 또한 그 많은 사제들의 설정을 모두 건드렸지만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단 10% 미만이었다.
“누구든 변하잖아요. 정해진 대로만 살지 않잖아요. GM한테 물어봤어요. 용사님이 원래 살던 곳도 운명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면 여기도 똑같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D등급 겁쟁이 용병이었던 자신이 여기까지 오고. 무조건 고개만 끄덕이다가 이제는 누구에게라도 바락바락 대들 수 있는 것처럼.
계기가 있고 바뀔 의지만 있으면 누구든 변화한다. 이는 비단 아인뿐만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이다. 이것은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다 보면 바뀌잖아요. 그게 당연하잖아요.”
눈가가 약간 벌게지긴 했지만, 아인은 닉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피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결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