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아인의 표정에 닉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려던 이야기가 산더미 같았지만, 모두 잊어버린 채 방금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닉은 한 발 뒤로 물러나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지만. 남용하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니까.”
“이것만 믿고 마구잡이로 휘두를 생각은 없어요.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할 거예요.”
“일단 의심할 생각은 없어. 뭣하면 에르로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결국 네가 그 능력으로 하고 싶은 게 정확하게 뭔데?”
닉의 질문에 아인은 아까보다도 더욱 눈썹을 구겼다.
당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말싸움으로 인해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아인은 가만히 닉을 바라볼 뿐이었고 닉 역시 아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
“…….”
계속해서 기다렸다. 분명히 쉬운 대답은 아닐 것이다.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짊어진 부담감이나 책임감이 있을 테니까. 닉은 그런 것은 잘 몰랐기에.
“…….”
“…….”
닉은 조금 더 기다리다가, 여전히 진중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고민 중인 게 아니라 모르겠어서 그러는 거니?”
“네.”
집어치우고 싶다. 닉은 잠깐 생각하다가 심호흡을 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신중하게 대답을 고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생각이 없는 거였구나.”
“그렇게 말을 하시면 제가 뭐가 돼요! 그냥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을 뿐이란 말이에요!”
“계획도 없이 마구잡이로 무기 휘두르면 그게 미친 싸이코패스랑 다를 게 뭐야!”
“대략적으로는 있어요! 우리 스스로 정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쪽으로 할 거예요!”
“스스로 정할 수 있다니?”
“설정으로 적혀 있는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알아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끔 만들고 싶어요. 제가 헤르도아의 사제에게, ‘가능성이 있다.’라는 문장을 추가하고 반복 퀘스트를 없앤 것처럼요.”
“그에 따른 부작용은 어떻게 하려고? 가령 이번에도 반복 퀘스트를 없애서 퀘스트가 완전히 해결이 되어버리면, 드라이어드의 신임을 얻는 보상은 더 이상 없을 텐데.”
“신임을 얻는게 꼭 그것만이 방법은 아니잖아요. 신임을 얻는 퀘스트는 언제고 나타날 거예요. 용사님은 망한 고향을 재건하도록 도와줘야만 신뢰 생겨요? 저는 가벼운 친절만 줘도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기던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닉이 입을 다물고 볼만 긁적이자, 아인은 조금은 기세등등해진 얼굴로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그러면 됐죠? 용사님 말씀처럼 의심스러우면 에르한테 물어봐도 상관없어요. 근본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저도 이 능력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말은 쉽다. 그 후에는 평범한 NPC가 되어 살아간다 이런 장래라도 꿈꾸는 거야?”
아인은 ‘당연하죠!’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채 뱉지 못했다. 평범한 NPC로 돌아간다는 것은 즉 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재에 대해 GM이 알고 있지만 단순히 영향력과 명성이 높다는 이유로 삭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존재감이 옅어질 즈음 언제고 자신을 삭제하기 위해 돌아올지도 모른다. 영향력이 사라질 때를 기다린다고 아예 못을 박아 놓았으니.
“어떻게든 살겠죠?”
애매하게 웃으며 이런 대답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영 시원치 않은 아인의 대답에 닉이 가늘게 눈을 뜨자, 아인은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리려다가 과장스럽게 ‘아!’하는 소리를 냈다.
“에르는 슬슬 다시 소환해도 되지 않을까요?”
“소환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자극이 덜 한 곳에서 나타나게 할 거야. 걔는 헤르도아의 사제를 무조건 나쁜 쪽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나타나자마자 바로 죽일 수도 있어.”
에르를 나쁘게 보거나 비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아인도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이던 중, 문득 라칼과 독대하고 있는 파시에의 상태가 걱정됐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라칼이 해치거나 하진 않았겠죠?!”
“장담은 못 하겠는데. 일단 비명 소리는 안 들리지 않았나?”
“아 그러네요. 그나마 다행….”
“물론 한 번에 목을 따버리면 비명도 못 지르긴 하지만.”
“파시에!!! 파시에!!!”
아인은 기겁하며 몸을 돌려 라칼과 파시에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온 것도 아니기에 두 명의 모습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라칼은 심각한 얼굴로 파시에에게 무언가를 계속해서 물어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작았기에 이 정도 거리에서는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협박을 하는 것인지 심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불안감이 커져가던 중, 그들에게 다가가는 아인을 이후프와 사하바티가 막아 세웠다.
“기다리세요 아인.”
“더 가까이 가지 않는 걸 추천해.”
“왜요. 이후프랑 사하바티도 저 헤르도아의 사제가 싫어서 그런 거예요?”
“다른 것 때문에 말리는 거예요. 아인을 위해서.”
“이야기는 나중에.”
“싫어요. 다른 건 몰라도 헤르도아 앞에 있는 라칼은 믿기 힘들어요.”
아인은 자신을 잡아채려는 이후프와 사하바티의 손을 피한 뒤, 자세를 낮추며 그대로 쇄도하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인이 사라진 자리에 바람도 반 박자 느리게 반응했을 정도. 진심을 다해 뛰는 아인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없었고, 곧 라칼과 파시에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게 거짓이라면 넌 내가 아니라 아인한테도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기억이 뒤섞이긴 해도 말과 상황 자체에 대한 왜곡은 없어.”
“그래서, 지부 하나를 깽판 친 뒤에 귀의했다는 녀석이 자기가 페리스라고 했다고?”
라칼의 말에 아인은 발을 우뚝 멈췄다. 뒤늦게 이후프와 사하바티가 달려와 아인을 감싸고 귀를 막았지만 이미 중요한 것은 들은 이후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페리스? 길드장님을 말하는 거예요?”
아인의 말에 라칼은 움찔하고 아인을 돌아보았다. 이후프와 사하바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고, 라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능한 아인에게는 듣게 하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젠장. 언제 거기 있었던 거야.”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귀의라니. 그럴 리가 없어요. 잘못 들은 거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페리스 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대륙전쟁 당시의 영웅이었는데.”
“네 말대로 이 녀석이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라. 지금은 눈앞에 떨어진 재앙부터 처리해야 해.”
이후로도 라칼은 아인을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했지만 아인의 예민한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시선은 파시에 한테만 고정된 채 이후프의 손을 뿌리치고 비척비척 걸어 가까이 다가갔다.
“더 기억나는 건 없어요?”
“…굉장히 불안정해 보였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정상은 아니었고. 내가 있던 지부를 궤멸시켜버리더니, 지금 당장 헤르도아 교주를 데리고 오라면서.”
“그 이후는요? 무슨 근거로 귀의했다고 하는 거예요?”
파시에는 여전히 냉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다가, 아인의 얼굴을 보곤 결국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귀의까지는 아닐지도 몰라.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파시에는 말을 돌렸지만 누가 봐도 티가 나는 거짓말이었다. 아인은 동공이 수축된 채 입을 뻐끔거리다가 뒤에 있는 닉에게 몸을 돌렸다.
“용사님. 에르… 에르 불러주세요. 거짓말이에요. 누가 봐도 거짓말이잖아요. 페리스 님이 헤르도아에 귀의됐다니 큰일이에요. 다 제쳐두고 가 봐야….”
“…가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장소는 알 수도 없고.”
“헤르도아에 들어가게 되면 세뇌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도 없…!!”
아인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닉은 한 손으로 아인의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파시에를 가리켰다. 닉이 가리킨. ‘돌아온’장본인을 보던 아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조금씩 진정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모든 것은 살아가다 보면 변한다. 그 역시 자신이 한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변화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후프는 앞으로 다가와 아인과 시선을 맞추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아인이 이렇게 해 주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만날 분이에요.”
귀의를 하지 않았다면 가트에 대한 치료법을 찾았을 때 돌아올 것이고, 귀의를 했다면 헤르도아의 주적이 되어 있는 아인이 더 유명세를 떨칠 때쯤 맞서게 될 것이다. 이후프의 말대로. 어느 쪽이든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었다.
아인은 손을 떼어달라고 눈짓하고, 입이 자유로워지자 헛기침을 하곤 파시에를 보았다.
“아까 한 말은 잊어주세… 으악?!”
파시에는 말없이 아인을 꽉 끌어안더니 그대로 등을 토닥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돌아올 거야.”
길지 않은 위로.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 하지만 가볍지 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헤르도아의 귀의하는 상당수 중 하나는 소중한 이가 헤르도아의 저주에 걸려 그를 치료하기 위해 귀의하는 경우이고.
파시에 역시 그 유형 중 하나였기에.
아인은 어느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다가,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머리를 떼었다.
“죄송해요. 바로 앞에 있는데 그런 말을 해서.”
“괜찮아. 사실 나도 헤르도아에 귀의했다가 돌아왔다는 전례를 들은 적 없어. 마음을 돌렸다곤 하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상태라 좀 마음이 이상해.”
“그러면 파시에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고향이요?”
“별로. 유일하게 반겨줄 사람도 저주를 안 푼지 너무 오래 돼서.”
이후로 파시에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아인도 더 묻지 않고 곰곰 생각하다가 무언가 떠올린 듯 눈썹을 올렸다.
“같이 헌터 길드에 갈래요? 지금도 묵고 있는 숙소가 있는데, 제가 잘 말씀드려볼게요.”
“…난 헤르도아의 사제 출신인데.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되긴 하는데.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좋아할까 봐 걱정돼요.”
마라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헤르도아에서 벗어난 최초의 사례라고 하면 문전박대는커녕 온 힘을 다해 끌어 들여올 것이다. 이후로는….
닉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 파시에가 마라와 함께 화목하게 있을 광경을 생각하다가 은은한 웃음을 지으며 파시에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걱정되는데 그냥 다른 곳 알아볼까요?”
“그 정도야?”
“네.”
“헤르도아라는 지옥에 있었는데 이젠 어디든 상관없어.”
나는 다른 지옥을 알려준 게 아닐까. 아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일행과 함께 얼어붙은 바다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염된 가을 거목의 숲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파시에는 주변을 둘러보며 짧은 감상평을 중얼거렸다.
“…헤르도아의 저주가 어린 곳이네.”
그에게는 더없이도 익숙한 기운일 터였다. 아인은 사하바티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가, 오염된 땅을 한번 가리켰다.
“아참 파시에. 관련해서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혹시 아직도 저주가 이어지고 있는지. 시간이 지나거나 지금까지… 많이 도와준 분들도 있을 테니까. 호전되지 않았을까 하고?”
“응. 잠깐만 기다려봐. 오래 안 걸려.”
설정 프로그램 개입을 통해 땅을 바꿔놓았다고 설명하기엔 사하바티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사하바티는 기대도 포기도 않는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파시에는 무릎을 굽혀 땅에 손을 대고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는 몰라도 맥이 끊겨 있네. 저주는 이제 더 이상 다시 생겨나거나 이어지진 않을 거야. 남아있는 오염만 정화하면 다 사라질 걸.”
그 말에 라칼과 이후프는 진심으로 놀란 듯한 소리를 내고, 이미 알고 있던 닉과 아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사하바티는 내내 감정 변화가 없더니,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곤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며 짧게 말했다.
“그렇구나.”
그러고는 땅을 짚어 흙을 한 줌 짚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큰 상처도. 언젠간 괜찮아지는구나.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