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 설정대로 움직이는 것
“왜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까지 아인이 설정 프로그램 개입으로 살펴보았던 NPC나 몬스터들은 다 제각각의 설정이 있었다. 서풍의 숲에서 보았던 아이도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는 설정이 있고, 오시하는 눈처럼 중요도가 높은 몬스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모든 이들이 설정 스크립트에 쓰여 있는 대로 결정되고 움직였다. 오염된 가을 거목의 숲은 반복 퀘스트로 인해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했을 것이고, 얼마 전에 본 헤르도아의 사제들도 자신을 노린다는 설정 하나 때문에 죽는 것도 상관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반대로 약간의 가능성을 남겨두었을 뿐인데 오염된 숲은 언젠가 그 상태가 회복되게끔 바뀌었다. 헤르도아의 사제 중 일부는 마음을 고쳐먹기까지 했다. 특히 에리식톤의 위장에서 보았던 ‘시체 덩어리’들은 설정을 주입하는 순간 괴이한 존재로 변이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설정’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웅이라는 자는 분명히 NPC일 것인데 알 수 없는 글자만 나열되어 있을 뿐 어떤 설정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 느꼈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의아함과 슬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 두려움이 아인의 마음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자가 진짜로 혈육이라면 자신 역시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설정은 그 NPC나 몬스터의 핵심적인 삶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설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살아있을 뿐인. 살아있어 봤자 의미가 없는. 그렇게나 살아남으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발버둥 치고 있는데도.
아인의 얼굴이 조금씩 창백해지며 식은땀이 한 줄 흐를 즈음, 영웅은 아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아. 나쁠 것 없어.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
형식적인 위로라고 생각했는지 아인의 안색은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영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뒷목을 매만지더니 조금 허리를 굽혀 아인을 세우고 시선을 맞췄다.
맑은 녹색을 띠는 두 쌍의 눈동자는 각각 다른 빛을 발했다. 한 쪽은 불안에 질린 채 흐려져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여전히 생생하고 이채를 띄고 있었다.
영웅은 자신의 팔에서 아인의 손을 떼어냈다. 영웅의 별 볼 일 없는 설정창이 아인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그때서야 아인은 간신히 영웅의 눈을 마주쳤다.
“네가 봤다시피 나는 아무런 설정이 없어. 억지로 따낸 영웅이라는 사명 하나를 제외하면. 아마 너도 비슷할 거야. 하지만 그건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야.”
영웅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이 세상에서 가치 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말을 듣고 있다는 듯 시선은 앞에 고정된 채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영웅은 작게 웃음소리를 낸 후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해. 삶의 방향이 잡혀 있고 운명처럼 따를 뿐인 다른 NPC와는 달리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냥 좋은 대로 말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다소 삐뚤어진 반응이긴 했지만 대답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영웅은 내심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너 플레이어… 그러니까 PC한테 설정 프로그램 개입 사용해 봤니?”
아인은 눈을 위로 올리고 곰곰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에 헤르도아의 사제였던 플레이어에게 손이 닿았을 때, 변경 권한이 없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는 안 되던데요. 권한이 없다고 하고….”
“아직 그 정도는 아닌가? 아니면 그 PC가 권한이 막강해서 그럴 수도 있어. 이 세상에서 꽤 높은 명성이나 영향력을 가졌다면, 플레이어한테도 설정 프로그램 개입이 가능해.”
“그, 그래도 되는 거예요? 큰일나는 거 아니에요?”
“큰일날 만한 짓을 하면 곤란하지. 가능은 하다고.”
“…그래서 그 말을 하신 저의가 뭔데요?”
그 말에 영웅은 입꼬리를 올리며 시원스레 미소를 지었다.
“PC한테 설정 프로그램 개입을 했을 때 나오는 설정은, 아무것도 없어.”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럼 PC들이 오류 데이터라는…?”
“그게 아냐.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야. 인간으로도 엘프로도 드워프로도 천사로도 악마로도 변할 수 있는 존재들에게 미리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니.”
아인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카오스의 조각들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는다. 마을을 약탈하는 오크족의 수장이 되는 것도, 그들을 토벌하는 기사단장 역시 카오스의 조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한다면 종족이나 나이, 성별까지 자유자재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니 아인 너도 마찬가지인 거야. 우리하고 플레이어들은 다르지 않아.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어. 살아갈 방향과 가치는 오로지 네 손에 달려 있는 거야.”
영웅은 그 말을 하곤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아인은 한결 가벼워진 어깨를 힐긋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은 반파된 침대를 보며 ‘이걸 어떡하지….’라고 중얼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내가 서풍의 숲을 떠난 이후로 어떻게 살았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아. 뻔뻔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내 자식의 여정은 알고 싶거든.”
아인은 다소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까지는 한 순간이라도 꼴도 보기 싫었는데, 적어도 자신에 대해 생각해주는 점은 진짜라는 느낌이 들자 또 마음이 약해졌다.
“말하자면 좀 긴데….”
“생각나는 것만 말해도 돼.”
“일 년 내내 배고픔에 굶주리고 구걸하고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고 노예상에게 붙잡히고 또….”
“…….”
결국 5분을 채 듣다 못한 영웅 쪽에서 먼저 아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영웅은 굉장히 복잡한 얼굴로 입꼬리를 움찔거리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진짜 살면서 온갖 사람 다 만나봤거든. 온갖 악당과 용사와 재앙과 귀족과… 어지간한 불행 서사는 다 봤는데 널 따라올 만한 애가 거의 없는데….”
‘그냥 데려갈 걸 그랬나.’하고 중얼거리는 영웅에게 아인은 픽 웃으며 말했다.
“고작 평범한 하프엘프에게 이런 설정이 쓰여 있진 않았겠죠?”
“…반대로 카오스의 조각을 만나 여행을 하고 재앙들을 쓰러트린다는 설정도 없을 거야.”
몇 문장으로 표현하기에는 미적지근한 여정들. 어지간한 영웅보다도 더한 행보들. 그것은 누구도 결정짓지 않았다. 오로지 아인이 선택하고 행동한 결과물이었다.
아인은 처음보다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더니 문을 가리켰다.
“할말 다 끝났으면 이제 가세요.”
“냉정해!”
“절 생각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아직 용서는 안 했거든요? 앞으로도 할 생각은 딱히 없어요.”
“…알았어. 하지만 오시하는 눈의 불꽃 조각은 받아가야겠어.”
“싫어요.”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거야?”
“살아 움직이는 해저… 카리브디스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오시하는 눈을 되살린다는 것밖에 없다는 게 설정상으로 정해진 거라면. 반드시 다른 방법을 찾아서 통한다는 걸 보일 거예요.”
“내가 괜한 물을 들였나….”
영웅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다가 결국 혀 차는 소리를 내고 문 쪽으로 향했다.
“제한시간이 있다는 건 너도 알 거야. 그 사이에 처리하지 못한다면 힘을 써서라도 가져갈 테니 그렇게 알아. 그리고 그 사이에 너를 노리는 사람들도 잔뜩 있다는 걸 인지하고.”
“이미 겪어봤어요. 그래도 어지간한 헤르도아의 사제들 정도는 저희도 감당할 수 있어요.”
“그 정도로 끝날 거라면 이렇게 얘기하지도 않았어. NPC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들도 널 노리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힘들지 감도 안 잡힌다. 게다가….”
영웅은 환경설정을 통해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더니 개중 영상 하나를 허공에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 유저가 누군가를 몰래 촬영하고 있는 영상이었다.
무척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영웅과는 달리 새까만 흑빛 갑주를 입은 존재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상당한 규모의 기사단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말이 좋아 싸움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도륙에 가까웠다. 어떤 공격도 그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고, 내지르는 공격은 어떤 갑옷과 방패도 막지 못했다.
수백이 넘는 기사단이 모두 쓰러지고 난 뒤 그것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을 찍고 있는 플레이어를 보았고, 영상을 찍던 이가 기겁하며 도망치려는 순간에 화면이 암전되었다.
아인은 언제부터인지 영상이 무서워 영웅의 뒤에 숨어 보고 있었고, 영웅은 뒤로 감기를 몇 번 하더니 흑빛의 갑주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는 장면에서 화면을 멈추고 그것을 가리켰다.
“이 녀석도 조만간 너를 노릴 수도 있어.”
“왜요?! 이 사람이 누군데요?”
벌써부터 자신이 저 사람의 칼에 꽂히는 광경을 상상했는지 아인의 얼굴이 핼쑥해지고, 영웅은 화면을 바라보는 흑색의 갑주를 톡톡 건드리며 투덜거렸다.
“카오스라는 놈이야. 내가 하는 일을 뒤에서 다시 망가뜨리는 녀석인데… 진짜 말도 안 되게 강해. 나도 지진 않지만 이기지도 못하겠고. 지금 영상도 내가 한바탕 휩쓴 헤르도아 지부에 황실 기사단이 잔당 소탕하려 가는 길인데 그걸 막은 거야.”
“그럼 악당인가요…?”
아인의 질문에 영웅은 표정이 애매해졌다. 오히려 그 얼굴에 아인은 의문이 들었다. 기사단을 학살하는 과정이라든지, 헤르도아의 잔당을 소탕하는 것을 방해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악의 세력이 아닌가?
“자기 말로는 세상의 균형을 위해 움직인다는데… 일단 너에게 호의적이진 않을 거야. 그건 확실해. 그러니 이 녀석하고 마주치면 끝난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강한데 그냥 몸으로 밀고 들어오면 끝 아니에요…?”
“균형을 우선시하는 놈이라서 사람 많은 곳에서 난리 치는 건 안 좋아해. 특히 NPC들 밀집 지역은 쳐다도 안 보니까 어지간하면 혼자 다니지 말고 마을에 있거나 모여 다녀.”
“이 사람도 플레이어예요?”
아인의 질문에 영웅은 멈칫하더니 길게 침음을 흘렸다. 이내 팔짱을 끼고 오래 생각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잘 모르겠어. 그런데 설정 프로그램 개입은 시도하려 하지 마. 안 통하니까.”
“이미 시도해봤군요….”
영웅은 조금 우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인은 ‘별일 없을 때는 마을에서 벗어나지 말 것.’이라고 약속까지 한 후에야 영웅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러면 진짜로 가 볼게. 그 사이에 카리브디스를 해치울 방법이 생각나길 진심으로 바라고. 몸 건강하고. 밥 꼬박꼬박 챙기고….”
“빨리 가요. 시간 끌다가 여기 있는거 눈치채면 어떡해요.”
“괜찮아. 여기 우리가 있는 거 아무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듣는다고 했잖아.”
그때.
“아인 뭐해? 들어간다?”
닉의 목소리가 문 뒤에서 울리고, 곧바로 노크를 하더니 깔끔하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아인이 영웅을 쳐다보고, 영웅은 ‘아’하는 짧은 소리를 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는 안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