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 협상
갑작스레 나타난 인물에 놀랐는지 페리스는 검을 내려치지도 못하고 마라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페리스와 아인을 한 번씩 가리켰다.
“둘은 무슨 사이? 부모님의 원수 같은 거? 한 여인을 둔 연적? 그거라면 나 굉장히 관심이 가는데. 아니겠지? 설마하니 거지와 왕자 같은 거 연극 리허설은 아닐 거 아냐.”
“아뇨. 저희 용병 길드 길드장님이신데요. 마라 님은 무슨 일로 으아악 조심하세요!!”
“아항. 뭔가 깊고 깊은 사연이 있나 보구나. 헌터 길드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도 구매해! 나는 사실 여기가 아니라 카오스가 왔다는 곳에 가려고 했는데 너도 같이 갈래?”
“안 그래도 걱정돼서 가려고 하긴 했는데. 으아아악 답변하면서 피하지 마세요! 불안해요!!”
“좋아! 그러면 내가 데려가 줄게. 그러면 이 퇴폐미 넘치는 아저씨부터 어떻게 해야겠지?”
마라는 자신에게 쇄도하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도 아인의 말에 또박또박 대답해주었다. 그러던 중 마라는 연막탄 하나를 품에서 꺼내 바닥에 터트리더니, 페리스가 도망치는 사이 알 수 없는 아티팩트 하나를 더 발동시킨 뒤 아인을 잡아채고 달리기 시작했다.
“회포를 방해한 건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에 만나줘!”
“그냥 도망가게 둘 것 같나?”
연막으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지만 아직 추적이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눈을 감고 들려오는 발소리를 파악하려는데, 연막탄의 안개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마라와 아인과 비슷한 기척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잔머리를. 이건 무슨 마법이지?”
“방금까지의 기척을 완벽하게 복사해주는 아이템이야! 아 이런 거 다 설명해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마라 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합창으로 들으며 감상평이라도 적고 있도록 해!”
수십 겹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페리스는 이를 뿌득 갈았다. 심지어 목소리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일일이 확인하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 같았다.
“귀찮게 하는군.”
페리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자세를 낮추고 검을 집어넣었다. 멀찌감치서 마라에게 안겨 도망치던 아인은,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페리스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마라 님 엎드려요!!”
“어? 어?!”
이유를 물어볼 새도 없이 마라는 일단 바닥에 풀썩 엎드렸다. 직후 날카로운 소리가 공간을 한번 울리더니, 수백 그루의 두꺼운 나무들이 동시에 베여 쓰러졌다.
“…와 미친. 칼잡이인 줄 알았는데 이런 범위기가 있었단 말이야? 이건 예상 밖인데.”
“저 상대할 때는 진짜 엄청 봐주고 있었나 봐요….”
혼자서 수천수만에 달하는 헤르도아의 지부를 엎어버릴 수 있었던 페리스의 대군용 비기. 사방으로 흩어지던 목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기척은 단 하나만이 남았다. 페리스가 아인과 마라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자, 마라가 진중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아인은 마라에게 아직 남아 있는 수가 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라는 가볍지만 할 때는 진지하게 해 주는 스타일이니까. 특히나 지금 표정은 위험을 타개하기 위해 고민하는 진중함마저 엿보였다. 아인은 조금씩 다가오는 발소리에 두려움을 품으면서도 마라를 믿기로 했다.
“무슨 생각 하세요 마라 님? 새 전략이라면 저도 도와드릴게요.”
“늉1늉. 아 이거 막혔네. 시2발 망했다는 생각 중이야.”
“대책 없었잖아! 그럼 왜 그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건데요!”
“아니 상황이 조2옷 됐는데 이유 없이 깔깔거리고 있는 것도 문제니까?”
그 사이 페리스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라는 자신의 인벤토리를 뒤져가며 적절한 아이템을 찾아보다가 아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저 사람 왜 저 상태인지 알아? 보아하니 헤르도아 소속 같은데.”
“…원래는 헤르도아 소속이 아니에요. 길드장님에게 소중하게 여기던 동료가 있는데, 한시라도 바삐 치료하려고… 사실 잘못을 따지면 저에게 있는데… 그것 때문에 길드장님이 헤르도아에 귀의해서… 꿈에도 생각지도 않았던 적이 되고… 거지꼴이 되고… 저하고 싸우고… 팔도 자른다고 하고… 막 이렇게….”
아인은 간신히 멈췄던 눈물을 다시 글썽거리기 시작하며 상황설명에서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마라는 건성으로 위로를 해 주다가 인벤토리 구석진 자리의 무언가를 보고 눈을 빛냈다.
“즉 지금 멘탈이 간당간당한 사태라 이거지? 딱 어울리는 거 찾았다.”
마라는 둥그런 구체 하나를 꺼내더니, 페리스가 지척까지 다가올 즈음 구체를 바닥에 던져 터트렸다.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페리스의 앞에 아까처럼 기척 하나가 생성되었다.
“두 번 속을 것 같냐.”
아까처럼 눈속임용 더미라고 생각한 페리스가 망설임 없이 베어버리려는 찰나, 연기가 걷히고 그것의 얼굴을 본 페리스의 손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심지어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기까지 했다.
“…가트? 가트야? 정말로?”
거대한 키. 바위 같은 탄탄한 몸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 헤르도아의 저주 따위는 보이지 않는 가트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가트는 페리스를 냉정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그래서는 안 됐어. 설사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라도 그 선택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말에 페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도 알아. 나도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왜 이러는지 종종 회의감도 들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뭐든지 했어야만 했어. 이러지 않으면 더 많이 잃었을 거야. 믿어줘. 이 방법밖엔 없었어.”
이후로도 페리스는 마라와 아인을 쫓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연신 사과와 변명을 거듭했다. 아인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뭘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존재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듣게 만들어.”
“…시간 끌기엔 정말 최적이네요. 미리 좀 쓰시지.”
“정신 멀쩡한 사람한테 보여줘 봐야 잔소리하는 엄마 정도밖에 안 나오는 데다 환각이라는 것도 곧바로 알아챈단 말이야. 물론 저렇게 멘탈 바사삭인 사람한테 던져주면 효과가 500% 정도 발휘되지만. 부작용이 있다면 두 번은 안 통한다는 거.”
페리스는 시야에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까지 가트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존재라고 해도 같은 사람이 나왔을 것이다. 아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한 입맛을 삼켰다.
아마 다음에 또 보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욱 가차 없을 것이다. 사정을 봐주며 죽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페리스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페리스라도 자신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멀리까지 오자, 아인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마라의 인벤토리를 가리켰다.
“그런데 혹시 페리스 님은 제2의 사명으로 연금술사 같은 거라도 가지고 계신가요?”
“응? 아니. 모험가 관련 사명이고 다른 특성도 죄다 그쪽에만 치우쳐져 있어.”
“항상 신기한 아이템을 가지고 다니시는 것 같아서요. 어디에서 얻는 거예요?”
“아. 나는 현질전사거든.”
그 말에 아인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전사시구나. 같이 다니는 탕 님도 전사 사명인 것 같던데 그러면 좀 겹치지 않나요?”
“아 아니. 그 전사가 아니야. 헤비과금러? 고래? 이렇게 말해도 모르나?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니? 돈으로 때리는 사람이야.”
“…아무래도 화폐 중에서 동전 같은 경우는 딱딱하니까 무기로 사용할 수 있기도 하죠?”
산적에게 몰린 상인들이 무기가 떨어지자 금화를 잔뜩 넣은 주머니를 둔기처럼 휘둘렀다는 기록은 아인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런 쪽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마라는 설명을 포기하고 초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사라고 하자. 돈으로 연성을 하면 등가교환으로 아이템을 얻어.”
“왠지 돈이면 다 된다는 이미지가 더욱 강화됐어요.”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에르와 닉, 카오스가 있다고 추측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방향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싸우는 소리가 아인의 귀에 끊임없이 들려왔으니까.
***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가트의 모습이 사라지자, 거의 울부짖고 있던 페리스의 목소리도 우뚝 멈췄다. 자신을 질책하던 가트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실소를 흘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갑자기 가트가 올 이유도 올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내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공포심이 눈앞에 닥치자 악몽이라도 만난 듯 온몸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마주하고 나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같은 수법을 만나더라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멀리 갔나.”
집중을 해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페리스는 혀를 차고 검을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얼마든지 기회는 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아니면 다음 임무에라도. 일 하나를 처리하지 못했다고 처분될 정도로 자신은 가벼운 카드가 아니었다.
“내가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거라고 했던가.”
마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듯, 페리스는 아인과 마라가 지나간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망령들의 주인’이라는 그의 특성을 생각하면 혼잣말은 아닐 것이다.
“너무 멀리 가버린 사람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해. 무슨 갈림길을 선택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꼬이고 꼬여서.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그리고 그런 마음 편한 기회는 오지 않아. 페리스는 전투 중에 엉망이 된 자신의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하고 발을 옮겼다. 검은 더 이상 집어넣지 않았다.
***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나도 들린다. 밸런스 파괴범들의 전투가….”
지금 아인과 마라가 있는 곳은 전투의 중심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인데도 그 여파가 미쳐 있었다. 아직도 검은 불꽃에 타오르고 있거나, 독에 오염되어 있거나, 통째로 얼어 있는 나무들. 어떤 곳은 사람 크기만 한 쇠창 수십 개가 땅 곳곳에 꽂혀 있기도 했다.
“이거 우리가 어설프게 가 봤자 휘말려서 죽을 것 같은데. 넌 어때?”
“…동감이에요.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가야 할 것 같.”
아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인의 눈앞으로 새까만 갑옷- 카오스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날아와 저 멀리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후 카오스가 있는 곳의 땅이 통째로 갈라져 그를 삼키더니, 들끓는 용암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것은 둘째치고 형체라도 남아있을지 의문인 공격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오스는 땅에서 비틀거리며 튀어나오더니 다시금 검을 잡았다.
하지만 ‘일발역전’을 사용해 카오스의 뒤를 잡은 닉이 그를 붙잡고 에르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아인을 보곤 더욱 크게 고함을 질렀다.
“잡았어! 여기에 공격 퍼부… 야 잠깐. 넌 왜 여기 있어?!”
순간 닉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카오스가 빠져나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두 자루의 장검과 단검을 들고 아인에게 쇄도하던 중, 그 앞을 막아서는 마라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마라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아인의 눈을 다시 뜨게 하더니, 전에 없이 긴장감과 호기심이 얽힌 얼굴로 카오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카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