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 장비 교체
캐시샵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아인의 눈앞에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아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감각. 무언가 달라지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인은 몸을 흠칫하고는 몸을 움츠렸다.
“저… 계세요?”
샵이니까 가게의 일종이고 가게니까 주인이나 직원이 있을 것이라는 당연한 판단하에 아인은 애타게 가게주인을 찾았으나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자신이 오류 데이터라는 것을 미리 파악해서 도망치거나 경계하는 걸까. 혼자 울적해진 아인이 주변을 살펴보는데, 자신을 무시한다기보다는 애초에 어떤 인기척도 없는 듯했다.
아인은 조금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게나 손을 휘저었다. 아인의 손짓에 따라 상단에 온갖 글씨와 그림들이 움직였는데, 아무거나 건드려보긴 무서웠기에 그나마 익숙한 단어인 ‘방어구 및 무기’ 쪽을 꾹 눌렀다.
그 순간 온갖 옷의 샘플이 주르륵 나열되며 다른 한쪽에는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소리를 질러버렸는데,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혼자 민망해하며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거울의 일종인 걸까…?”
이 세상에도 거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신을 모두 비출 정도로 깨끗하고 큰 거울은 상당히 비싼 축에 속했기에 대도시의 유명 옷가게 정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기에 아인은 신기한 얼굴로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어린아이나 귀여운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좀 어려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짧고 뾰족한 귀 끝을 톡톡 건드려보던 아인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상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방어구라기엔 그냥 천으로 된 옷도 많은데. 그냥 겉보기에만 그렇고 안에 금속을 덧댄 건가? 아닌데. 분명히 그냥 천으로만 이루어진 건데….’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는 카오스의 조각들은 방어구의 개념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종의 문화 지체라고 이해하며 아인은 타 종족의 문화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가령 기본적으로 피부가 두껍거나 상처 회복력이 뛰어난 종족은 두꺼운 갑옷을 오히려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니까.
“몇 개는 용사님한테 골라주고 싶은데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없네. 아, 이건 진짜 예쁘다.”
아인은 고풍스러운 귀족처럼 보이는 천 갑옷 아바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손을 가까이 대는 순간 자신이 투영된 모습에 그 천 갑옷이 입혀졌다.
“우와아?!!”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놀람이 호기심이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샘플을 누르면 자신의 모습에 옷이 입혀진다는 것을 깨달은 아인은 침을 삼키고 눈을 빛냈다.
“조…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 끝내자. 조금만 더.”
아인은 옷을 구경하고 입어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게에서 직접 입어보는 것은 다소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싼 재질이라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하락할 것은 당연하며 자칫 입다가 뜯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물어줘야 하니까.
그런데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옷을 구경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입어볼 수 있다는 것은 아인에게 일종의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곱게 자란 귀공자 같은 스타일부터 깔끔한 정장, 닳고 닳은 용병 같은 스타일, 매니악한 의상의 코스프레 차림이나 장신구까지. 어지간한 옷은 모두 자비로운 눈으로 보는 아인이라지만 몇몇 의상들은 도저히 이해가 힘들었다.
‘토끼 모양 머리띠나 동물 잠옷 같은 건 왜 방어구라고 하는 거야? 내가 너무 뒤떨어진 건가? 아니 하지만 상식적으로 전장에서 토끼 모양 머리띠나 동물 잠옷을 입고 싸운다니 말이 안 되잖아. 기능적으로나 품위적으로나! 그딴 방어구나 나오면 즉시 역사서에 박제될 텐데!’
아인은 또 혼자 열을 올리다가 다시금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토끼 귀 머리띠를 쓰면 토끼처럼 밝은 청각을 가지거나, 동물 잠옷을 입으면 해당 동물이 가진 특징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카오스의 조각들 본체는 평소에 저런 것을 즐겨 입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자신과 다른 문화라고 배척하는 일은 아인 스스로도 정말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오늘도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며 다른 옷들을 구경하던 중 아인은 1분 만에 화를 터트리게 되었다.
“이, 이게 벗은 거야 입은 거야?!”
차라리 한바탕 격렬한 전투를 한 뒤 반파된 컨셉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온갖 노출이 되어 있는 걸레짝 비스무리한 것을 완성된 옷이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명히 이 옷을 디자인한 자는 노출된 부분의 천을 모아다가 다른 옷 하나를 만드는 비리를 저질렀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보수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걸 입고 돌아다닌다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으로 ‘문화 존중’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아인은 방어구 아바타에 수영복이 있는 것을 보고 결국 포기한 듯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왜 이게 방어구인데.”
심지어 수영복이랍시고 내놓은 것을 입혀 놓으면 그 위에 다른 것을 겹쳐 입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이 속옷 하나만 입은 상태로 나돌아 다닌다는 것인가? 아무리 카오스의 조각들이 죽음도 모르고 뒤가 없는 존재들이라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푸, 풍기문란이야. 풍기문란이야! 만일 에스텔에 그런 변태가 돌아다닌다면 용납하지 않겠어.’
‘플레이어들은 평소에 벗고 다니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잖아.’라는 마음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이라는 마음이 상충하며 아인은 꽤 오랫동안 혼란스러워했다. 적어도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만큼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쁘지만 고된 시간이었어. 한두 개만 더 구경하다가 나가야지.’
힐링의 시간을 가지고자 아인은 마음에 들었던 옷들을 한 번씩 더 살펴본 뒤, 마지막으로 두 옷을 살펴보았다. ‘찜하기’라는 버튼을 눌러놓기까지 했던 옷이었다.
하나는 철제 흉갑과 부분갑주가 적절하게 들어가 있으면서도 디자인도 예쁜 갑옷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험가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떠오르는 옷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옷이었다.
언젠가 닉과 같이 이 옷들을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인은 마음속으로 헤실 웃었고, 이내 구석에 있는 X자를 눌러 캐시샵을 껐다.
그리고 캐시샵을 끄자마자 바로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닉과 눈을 마주쳤다.
“흐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아인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몸을 휙 물리다가 벽에 뒤통수를 박아버리고, 닉은 아인이 놀라는 것에 마주 놀라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성큼성큼 더 앞으로 다가왔다.
“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도 없고. 분명 이쪽을 보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눈에 초점은 완전히 나가 있고. 내가 산 게 그렇게 별로인가 해서 상처까지 받았잖아.”
“죄, 죄송해요! 그,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다른 일? 다른 생각이 아니라? 유체이탈이라도 했던 거야?”
“좀 비슷한… 정령화 비스무리한 거라고 해야 하나….”
아인은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에르가 있었다면 대번에 ‘거짓말이야.’라는 말이 나왔을 테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건지 닉은 한쪽 눈썹만 휙 올리더니 알아서 화제를 바꿔주었다.
“아무튼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려나 싶어서 갑옷 디자인 조언 좀 받으려고. 구매한 지 10분 이내면 같은 가격의 다른 결로 교환할 수도 있거든.
“조언이요? 맡겨만 주세요!”
관심 분야가 나오자 아인은 주먹을 꼭 쥐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보았던 옷들은 수영복이나 토끼귀 같은 것만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닉이 입어도 잘 어울릴 것들이 많았다. 닉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 샀던 아바타를 착용했다.
“으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아인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왜? 왜?! 대체 어디가 문제길래 아까보다도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건데?!”
“지금 그걸 방어구랍시고 사신 거예요?!”
“아니 나는 능력치 보고 가장 가성비 좋은 거 샀단 말이야. 이전 것보다 방어력도 높아.”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아무리 봐도 예전보다 피격범위가 스무 배는 늘어났는데요!”
아인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닉을 손가락질했다. 그녀는 허리와 어깨, 가슴께와 허벅지가 드러난 여성용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런 디자인에 익숙한 닉은 그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인은 한쪽 눈만 간신히 내민 채 잔소리를 퍼부었다.
“용사님은 일단 전방에서 싸우는 전사 포지션 아니에요?”
“그렇지? 원거리 공격은 없다시피 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맨살이 드러난 방어구를 입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아니 지금 배의 장기하고 심장이 그대로 드러났다고요?! 기동성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숲 지나다가 풀독 오르고 나뭇가지에 살 찢기고 눈먼 화살에 옆구리 맞아서 비명횡사할 것 같은데요!”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한데.”
“아무튼 전쟁 하면서 패션쇼 할 거 아니면 저는 반대예요! 대체 누가 이런 갑옷을 입어요?!”
“플레이어들은 이런 거 입는 게 일상화되어 있는데.”
“…….”
닉의 말에 아인은 진심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닉의 말은 ‘일반적인 게임에서 다 이렇게 입는다.’라는 말이었겠지만 아인에게는 다르게 들린 모양이었다. 카오스의 조각들이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상상도 하기 꺼려졌다.
“카오스의 조각들은 원래 벗고 다니는 게 취미예요?”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이상하잖아.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니즈를 반영한… 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류의 디자인이 싫다는 거지? 그러면 좀 기다려봐.”
닉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더니 다시 캐시샵으로 들어갔다. 행여나 누가 볼까 아인은 그 사이에 이불을 가져와 닉의 몸을 가리기까지 했다.
“차라리 토끼 귀를 입는 게 낫지….”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며 한숨을 쉬는 사이, 닉은 그새 무언가를 샀는지 몇 번 허공을 휘적여 설정을 조작하더니 마지막으로 ‘확인.’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아인이 보기엔 남부끄러웠던 옷은 사라지고 평소의 은색 흉갑에 파란 옷을 입은 차림새로 돌아왔다.
“그 옷은 안 사시기로 한 거예요?”
“아니. 사긴 했는데 아바타 가릴 수 있는 기능도 하나 샀어.”
“그게 뭐예요? 옷을 가린다뇨? 지금 입고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아까 그 옷을 입은 상태이긴 한데 겉보기에는 가려진 상태인 거야.”
아인은 제대로 기능 이해를 못했는지 몇 번 더 물어보다가, 간신히 납득하고는 자신이 이해한 대로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그 부끄러운 옷을 남몰래 입고 있는 상태군요?”
“틀린 말은 아닌데 너 진짜 그딴 식으로 말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