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 불법 프로그램
한창 닉 일행이 식당에서 밥상머리 유교 예절을 앞세워 만찬을 즐기고 있을 무렵, 황궁 복도에 떨어져 있던 구체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라가 아인에게 호신용이랍시고 줬던 것.
구체는 점점 더 크게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바닥에 녹아내렸다. 본래 크기보다도 훨씬 많은 액체를 쏟아내던 그것은, 끈적한 젤리 같은 탄성을 자랑하듯 꿈틀거리며 인간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뚜렷한 이목구비와 장비까지 제대로 갖추었다.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완전한 인간. 마라가 옷을 툭툭 털어내고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크아악… 감각 진짜 이상하다. 유용하긴 한데 자주 쓸 수는 없겠어. 폐쇄공포증 걸릴 뻔.”
마라는 진저리나는 표정으로 황궁 구석에서 고개를 도리질 치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이내 특유의 호기심 넘치는 말괄량이 얼굴로 돌아오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황궁이란 말이지. 정말이지 스피릿 볼이랑 아인이 아니었으면 못 들어올 뻔했네.”
영혼을 간직해두고 있다가 특정 구역에서 소환하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려나는 아이템. 입구가 엄청나게 좁은 던전을 탐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지만 직접 사용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효과에 비해 조합 재료가 엄청나게 비싸기도 했고.
“자 그러면 한번 모험을 시작해볼까나~.”
그녀는 신나는 얼굴로 장비를 교체한 뒤 황궁 곳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장식품이나 마법 아이템은 따로 메모하고 날개 달린 신발로 천장을 구경하기도 했다.
마라의 호기심은 비단 던전에 그치지 않는다. 플레이어들이 거의 간 적 없거나 확인되지 않아 정보가 없는 미확인 구역도 탐사 대상 중 하나였으며 거기엔 황궁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지역 중 하나이지만 오히려 삼엄한 경계 탓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 황제의 초청을 받아 들어갈 수는 있다지만 극소수였으며 그나마도 황궁 전체를 둘러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황궁 안에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있는 플레이어는 채 다섯 명이 되지 않았다.
최초의 사례가 바로 우라노스. 다음으로는 마법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공로로 초청받은, 최고위 마법사인 메이지. 에스피드켈론을 죽인 닉과 살아 움직이는 해저를 소멸시킨 악식왕.
“그리고 이 마라가 바로 다섯 번째로 들어온 플레이어란 말이지.”
사실 우라노스가 들어간 이후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잠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삼엄한 경비와 마법 결계를 뚫는 것이 불가능했고, 몸집을 아주 작게 만들어 숨어들었다가 흑심을 들킨 정령에게 발각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모습까진 드러나진 않았지만.
황궁 곳곳에 경비 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내부에 들어온 이상 트랩은 마라의 전문소관이었다. 던전을 탐사할 때도 함정 해체와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데 특화된 마라였으니, 인간이 만들어낸 함정 정도는 너무나 가볍게 파훼할 수 있었다.
“와 미친… 이 아이템은 대체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는 거야? 밖에 가지고 나가면 난리 나겠네. 다음 재앙 레이드 때 풀리려나. 이 바닥 소재는 아직 공식적으로 나오진 않은 것 같은데. 하우징에 나왔으면 좋겠다. 되게 고급지네. 어라 이 예술품은….”
마라는 함정과 경비 시스템을 간단하게 지나치며 산책이라도 하듯 황궁을 구경했다. 어지간한 던전보다도 거대한 규모인 데다 곳곳에 함정까지 있고 지나가는 누군가를 피하는 것이, 정말로 공략할 던전을 사전에 탐색하는 것 같아 점점 흥이 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상태면 금방 들통날 텐데. 슬슬 운 나쁜 메이드 한 명 안 지나가려나….”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메이드 한 명이 복도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라는 그 불행한 메이드에게 짧게 위로의 말을 중얼거린 후, 발소리를 죽여 뒤로 다가가 순식간에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소리를 지르지 않게끔 완벽한 대처를 한 뒤 마라는 즐겁게 웃었다.
“아가씨 미안해용~ 옷 잠깐 빌려도 될까? 나쁜 짓은 안 할게. 대신 다른 옷 하나 선물로….”
하지만 마라는 말을 하다가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당했으면 발버둥을 칠 만도 한데 메이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냥 가던 길만을 가려는 듯 발만 움직이고 있었다. 반항도 체념도 아니다. 그저 정해진 일만 수행하려는 듯.
기괴한 느낌에 마라가 얼굴을 확인해보니, 메이드는 표정 없이 눈만 이따금 깜빡이고 있었다. 당혹감 같은 것은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저기요 여보세요? 혹시 인형이야? 키워드 입력해야 돼?”
마라는 메이드의 뺨을 쳐 보기도 하고, 정신을 회복시키는 물약을 마시게도 하고, 어지간한 정신계 공격은 모두 풀어주는 비싼 아이템까지 사용해주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효험이 없었다.
황궁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인체실험 같은 거라도 하는 걸까 싶었지만, 헌터 길드의 정보력으로도 비스무리한 정보는커녕 괴담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황궁 내의 정보력이 삼엄하다 한들 약간의 소문 정도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대규모 퀘스트는 뜬금없이 나오는 경우가 없었다.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알아차리게끔 떡밥을 던져준 뒤 지켜보다가 풀어내기 시작한다. 황궁의 흑마법이니 대규모 인체실험 같은 것은 대륙 퀘스트에 준할 정도로 엄청난 사안일 것이다.
하지만 세간에선 정보가 돌지 않는다. 경비가 삼엄한 황궁 내에 들어와야 알아챌 수 있는 단서라니. 인공지능이 그렇게 배치해두었을 리가 없다.
‘데이터가 자체적으로 꼬이기라도 한 건가? 그러면 인공지능이 고치거나 삭제라도 할 텐데.’
하지만 이 기괴한 메이드는 여전히 이곳에 존재한다. 마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다가 꺼림칙한 가설 하나를 생각해냈다.
‘인공지능의 눈에 띄진 않을 정도로. 누군가 일부러 데이터를 꼬아 놓았다.’
마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녀는 작은 창고로 보이는 방에 들어가 옷을 바꿔 입은 뒤 메이드를 기절시키고 조금 더 세세하게 근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다른 메이드나 관리인들이 보이긴 했지만 대다수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거나 할 일을 시키는 등 방금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비슷한 유형의 NPC가 보이기도 했다. 목적도 없이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마라가 그자도 아까처럼 붙잡아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당혹감도 발버둥도 없이 발만 움직일 뿐이었다. 데이터를 확인하면 좋겠지만 자신은 큰오빠처럼 권한이 높은 GM이 아니었다.
‘데이터를 건드려서 자신의 정보 수집용 NPC로 만들기라도 했나?’
온갖 가설만 머릿속에서 부풀어 오르던 중, 마라의 눈에 복도 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공식적으로는 소재가 존재하지도 않는 벽. 얼핏 봐서는 티가 나지 않지만, 아주 자세히 관찰하면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선이 한 픽셀 정도 어긋나있는 등 그래픽이 다소 깨져 있는 식이었다.
마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손을 대려는 순간-
삐이이이이익!!
그곳에 있던 경비 시스템이, 허락받지 않은 이가 왔다는 것을 알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걸리지 않았을 테지만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아버렸다.
‘아 제기랄….’
“침입자다!! 황궁에 침입자가 나타났다!!”
마라는 급하게 아바타를 이용해 외양을 바꾼 뒤 도망치는 메이드 사이에 섞여 뛰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혼자 눈에 띄면 안 된다. 기회를 봐서 빠르게 도망치려고 눈치를 보며, 마라는 이를 뿌득 갈았다. 누군진 몰라도 NPC나 황궁에 조금씩 손을 대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걸로 손 벌리고 싶진 않았는데. 그 자식한테 한번 얘기를 해 봐야겠어.’
***
황궁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외침이 들리자마자,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호위병들이 황제를 감싸더니 비밀 공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라노스는 물론 악식왕과 닉 일행은 그대로 황궁 밖으로 안내되었으며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반쯤 쫓겨나게 되었다.
라칼은 그 대담한 침입자와 한 판 붙어보고 싶었는지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투로 황궁을 보았고, 사하바티는 도리어 그 침입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후프는 아까부터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황궁 밖으로 나와 있는 수준이라, 닉은 우두커니 서 있던 중 머리를 긁적이다가 어색하게 우라노스에게 인사했다.
“에 뭐… 오랜만. 한 명하고는 살갑게 이야기할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군. 나도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으니 이쯤에서 서로 헤어지도록 하지.”
“진짜 개까칠하네. 아직도 밥 먹을 때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 으른한테 임마 어? 예의를 지켰으면 아까 찍힐 일도 없고 말이야.”
식사를 하는 도중 우라노스는 최소 다섯 번 이상 황제가 실망을 느꼈다. 반대로 그만큼 닉과 아인은 호감도를 얻었다. 최소한 지금만큼은 닉이 우라노스보다 확연하게 신임을 얻었을 터.
우라노스는 닉을 째려보다가, 더 말할 것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몇 발자국을 걸은 뒤 고개를 돌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씹듯이 말했다.
“어차피 황제와 황궁을 손 안에 넣는 건 나다. 머지않았으니 기다려라. 척살령을 내릴 테니.”
“먜쟤앤앴애내 걔대럐래. 챌색럥앨 내롈 톄녜~.”
우라노스는 결국 몇 마디 욕설을 퍼붓고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둘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악식왕은 무거운 얼굴로 닉에게 다가와 우라노스가 사라진 곳을 보았다.
“요즘 MZ세대는 어쩔티비 저쩔티비라고 말싸움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에요.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와서 그 부분에서 태클 걸지 말라고요.”
“아무튼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최근 커뮤니티에선 프로토게노이가 거의 조롱에 가까운 대상이야. 그것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다.”
“대충 이해는 돼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지들이 신경질 부리는 게 어이가 없긴 하지만.”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의미 없는 불나방짓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두 번이나 반복되자, 인벤과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온갖 밈과 조롱용 짤방이 대거 육성되고 있었다. 결국 아이템과 사망 페널티 원금도 회수를 못해 거액의 손해가 발생했으며 길드를 탈퇴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입지가 흔들리긴 했지만 프로토게노이가 명실상부한 대륙 랭킹 1위 길드라는 것은 여전하다. 불씨를 너한테 튀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
조롱하고 놀리는 것은 인터넷 내에서일 뿐. 여전히 인게임에서는 프로토게노이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우라노스는 결국 1위 랭커이며, 그외 하이 랭커들도 다수 포진한 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큰 사고 터져서 길드 자체가 분해됐으면 좋겠다. 닉은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한숨을 쉰 뒤, 악식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대륙 퀘스트 만들 수 있지 않았어요? 따로 퀘스트 나온 건 없던데.”
“정말로 가지고 싶은 귀한 식재료가 생기면 그걸 얻을 때 사용할 예정이야.”
“당신도 어지간히 요리에 미쳐 있구나….”
“밖에서는 손님들에게 맞춘 요리를 하거든. 여기에서만큼은 오로지 나에게 맞춘 요리를 하고 싶다.”
본래 레스토랑을 운영한다고 했던가. 닉은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동쪽으로 갈 거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봅시다.”
“자연이 가장 잘 보존된 대륙이지. 맛있는 것도 많으니 인벤에서 특산품 검색해봐. 내가 출시한 음식들도 꽤 많을 거다.”
이내 악식왕도 손을 흔들며 제 갈 길을 갔고, 닉은 깊게 숨을 뱉고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제… 동쪽 대륙의 거석의 무덤이란 곳으로 갈 거야. 바로 갈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머물다가 가?”
“그래도 제국 수도에 왔는데, 조금은 즐기다가 가고 싶어요!”
아인이 손을 번쩍 들며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다른 이들도 딱히 반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면 좀 놀다가 갈까? 그러고 보니 여기에도 헌터 길드 숙소가 있으면 좋겠는데. 마라한테 부탁해서… 어라.”
말을 하던 닉은 위화감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이 이유를 몰라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중, 닉은 불안해지는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였다.
“마라 어디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