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5)
15화 : 고향으로
자신을 영주라 칭한 자연 친화적인 존재, 심지어 그는 드라이어드인 사하바티나 골렘인 이후프보다도 청아하고 깨끗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악수를 하면 괜히 더럽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에스텔의 영주는 엘프인데…?”
그 사이에 영주가 바뀌었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다. 아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애매하게 몸을 움츠리는 사이,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는 닉이 덥석 손을 잡고 흔들었다.
“닉 모하지입니다. 풀네임으로 부르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캐시샵에서 닉변경권이 아직 없더라고요.”
“하하, 말을 하며 은근히 카오스의 조각인 것부터 증명하시는군요. 똑똑하신 분이네요.”
“아니 저는… 그래요 알아서 생각하세요.”
둘은 적당히 악수를 하고 손을 떼었는데, 닉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가볍게 털었다.
“뭐야? 순간적으로 자연친화 스탯이 상승하네.”
“그만큼 제 정령화가 성공적이었다는 거겠죠? 다행입니다.”
정령화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아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특정한 자연친화력을 극도로 올려, 일정 시간동안 말 그대로 신체를 정령화시키는 기술.
하지만 말이 쉬워서 극한까지 올리는 것이지, 단순한 반복 수련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 무성한 추측만이 있지만 결국 가설에서 끝날 뿐.
정령화에 성공한 이들은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자연 속에 은거해 있거나, 전승 속에서만 나타나는 정도였다.
“대, 대단하세요.”
“그렇게 엄청난 거야?”
심드렁하게 묻는 닉의 말에 정령화를 한 장본인인 데이드완보다 아인이 더욱 호들갑을 떨며 말을 이었다.
“그럼요! 전 대륙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일 거예요.”
“공홈에도 인벤에도 안 보이던데. 가짜 정보 아냐?”
미심쩍은 얼굴을 하는 닉에게, 데이드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홈과 인벤. 당신들의 정보 길드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 모습을 본 외부인은 여러분이 처음이니까요. 이솔라의 지인이라는 말을 믿고, 악용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 보여드린 거랍니다. 평생 감추고 살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데이드완은 눈웃음을 한번 지은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귀가 더 뾰족해지며 하얀 머리색은 금발로 물들어갔다.
“이 정령화로 말하자면, 조금 길지만… 아, 죄송해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정령화에 대해 설명해줄 듯 운을 띄우던 데이드완은,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아직은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걸까. 아인이 아쉬움에 작게 한숨을 쉬고 있는데, 닉은 허공에 손을 휘적이며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스킵. 스킵.”
“…?”
이번에도 환경설정 마법을 사용 중이신가? 아인이 닉에게 물어볼 시간도 없이, 데이드완은 곧바로 일행들을 부른 용건에 대해 설명했다.
말인즉, ‘오픈베타’를 시점으로 곳곳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정기점검’이후에는 다양한 종류의 정령뿐만 아니라 타락한 정령마저 나타난다는 것.
심지어 바람의 정령왕이 있다고 알려진 곳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령이 나타났기에, 그곳으로 아인 일행을 보내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위치가… 어디라고요?”
“서풍의 숲입니다. 갈 수 있으신가요?”
서풍의 숲.
지명을 들은 아인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닉은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듯 허공을 훑더니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죠 뭐.”
닉을 시작으로, 라칼과 이후프. 사하바티도 앞으로 나섰다.
타락한 정령이 헤르도아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은 이상 그들의 수락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랑의 송곳니 라칼. 이번에야말로 헤르도아의 끄나풀을 찾고 말겠어.”
“서른 번째 파편 이후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가을 거목의 사하바티. 숲이 고통 받는 것을, 모른척하는 드라이어드는 없어.”
“…그렇게 멋지게 말하니 나만 이상하게 보이잖아.”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데이드완의 제안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아인은 어물어물하다가 급하게 그들의 뒤를 쫓듯 어설프게 예를 갖추고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용병 아인. 의뢰를 수락하겠습니다.”
***
“쟤 또 왜 저래? 요즘 사춘기야?”
“끌고 갈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물어보는게 좋겠어요. 억지로 데려갈 순 없잖아요.”
“시간이 약일지도.”
아인은 데이드완이 쉬고 가라고 한 응접실의 소파에 누워 베개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너 가도 되는 거 맞지?”
닉은 그늘을 드리우며 아인을 내려다보았고, 아인은 입을 뻐끔거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거기 가기엔… 저와 용사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뭔데? 너하고 나 둘 다?”
“서풍의 숲은 인간에겐 무척 적대적이에요. 수인족에겐 적대적이라 할 만큼은 아니고. 이후프나 사하바티는 반쯤 정령이라고 볼 만큼 자연 친화적이라 오히려 반기겠지만, 용사님은 자칫 입구에서 막힐 수도 있어요.”
“종족이 문제라는 거지?”
“네. 카오스의 조각이라는 것을 밝히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괜찮아. 단기 종변약 팔더라. 이런 때에 사용하라는 용도인가 보다.”
“종변약이요?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변비약 이름 같다. 아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종족변환약.”
“종족변환? 그런 것도 가능해요?”
“못할 건 뭐가 있지?”
“보통은 못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이럴 때마다 새삼스레 닉의 지금 모습이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아인은 다시 한숨을 쉬고는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면 제가 제일 문제가 되겠네요.”
“왜? 너도 따지면 엘프잖아?”
아인은 대답 없이 웃으며 무심코 귀를 매만졌다. 인간보다는 뾰족하고 길지만, 엘프보다는 짧은 애매한 형태.
“따지면… 이긴 한데.”
지금부터 그들이 가려는 곳은 서풍의 숲.
그가 태어나고 버려졌던, 아인의 고향이었다.
***
일행은 데이드완이 마련해준 성 내 숙소에서 하루를 쉰 후, 아침 일찍 서풍의 숲으로 향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침을 먹은 뒤 잠깐 종족만 바꾸고 오겠다는 닉은 정오가 다 돼서야 돌아왔다.
라칼은 카오스의 조각들이 가지는 시간관념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내고, 닉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제 얼굴을 매만졌다.
“미안, 미안.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네. 원래 커마라는 게 다 그래. 이해해줘.”
엘프로 종족변환을 한 닉의 모습은 길어진 귀를 제외하곤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인이 볼 때는 이곳저곳 다른 부분이 보이긴 했지만.
“키도 약간 더 커졌고, 턱선도 약간 더 날렵해지고, 코가 약간 더 올라가고, 머리카락이 약간 더 자라고, 광택이 약간 더 가미되고, 눈매가 약간 내려가고, 동공이 약간 더 커지고, 피부가 약간 더 뽀얗게 변하셨네요!”
“그 미묘함을 알아주는 건 너밖에 없다… 그러면 지금 당장 출발할까?”
닉은 종족 변환약에 시간제한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은 눈치였고, 사하바티나 이후프도 굳이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솔라에겐,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까 간단하게 하고 왔답니다. 형식적인 인사치레는 싫어하셔서.”
이솔라는 말투만 퉁명스럽고 직설적일 뿐, 방금도 아인에게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잔뜩 일러주고 오던 차였다.
짐을 챙기고 문을 나서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데이드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행의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떠나시려는 건가요?”
“네! 시간을 끌어도 좋을 게 없을 것 같고.”
“하기야 그 일이 발생했는데 한시바삐 가는 것이 낫지요. 해서, 저희 쪽에서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멀미 혹은 고소공포증이 있으신가요?”
“그건 왜요?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긴 한데.”
“아. 그렇군요. 하기야 골렘분도 있으니 그 방법은 다소 어렵겠어요.”
“??”
의중이 파악되질 않아 아인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바람의 상급정령보레아스가 아쉽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아~ 따로 가면 안 돼? 이런 귀여운 아이를 안고 하늘을 휘저어보는 게 영생의 목표 중 하나란 말이야.”
“하, 하늘을 휘젓는다뇨? 그리고 전 아이가 아니에요!!”
“정령 앞에선 죄다 아이들이지 뭐.”
공중에서 다리를 꼬며 생글생글 웃던 보레아스는, 작위적으로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데이드완을 쳐다보았습니다.
“어차피 얘만 데리고 가면~.”
“포기하세요, 보레아스. 이미 불칸과 키샤르를 준비해 두었으니까요.”
결국 보레아스는 투덜거리며 팔을 축 늘어뜨리고, 이제야 의중을 파악한 아인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땅의 정령들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시려는 거군요?”
“그거 동물, 아니 정령학대 아냐?”
떨떠름한 얼굴의 닉을 돌아보며 아인은 고개를 저었다.
에스텔에서는 땅의 정령인 노움과 불칸을 이용하여 물건을 옮기는 일이 꽤 흔했다.
한때 닉이 말했던 것처럼 정령을 혹사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정작 정령에게서 불만이 일어난 적이 없어 흐지부지된 적이 있었다.
땅의 정령이라 그런지, 무언가를 짊어지고 옮기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따지면 여러분이 학대당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거예요. 성 입구에 마련해 두었으니 바로 타고 가시면 됩니다.”
데이드완은 농조를 섞어 말한 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인은 작별인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우물쭈물하다가 참고할 사람을 보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ㅂ-.”
닉은 말할 것도 없이 기각.
“헤르도아의 끄나풀이 보이면 팔 하나는 찢고 시작할거다.”
“숲이니까, 거름이 되어서 괜찮을지도.”
“하하… 아무쪼록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일을 마치는대로 정령을 보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지 위에 선 이들에게 모든 축복을.”
들끓는 분노를 울컥이는 라칼과 차분하게 동조하는 사하바티, 유일하게 이후프만이 제대로 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결국 아인도 급하게 허리를 꾸벅이며 인사를 한 뒤 밖으로 향했다.
밖에는 데이드완이 말한 대로 불칸 넷과 키샤르 하나가 대기를 하고 있었다.
곰과 개를 합쳐놓은 것 같이 생긴 땅의 중급정령 불칸과, 흉악한 들소의 모습을 띈 땅의 상급정령 키샤르. 하지만 둘 모두 온순한 것으로 유명한 정령이었다.
잘 다져놓은 흙바닥에 앉는 듯 승차감도 좋았다. 사바하티는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으며, 친화를 위한 대화일까 싶어 아인은 그쪽에 귀를 기울였다.
“화분에 심겨진 나무 같네.”
영양가는 없는 대화였음을 깨달은 아인이 애매하게 웃으며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칼은 무언가에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자꾸만 다리와 몸을 움찔거리며 자세를 고쳤고, 나중엔 숫제 등 위에 엎드리기까지 했다.
아인과 닉은 각각 불칸에 어렵지 않게 탑승했다. 라칼이 자세를 안정적으로 할 때까지 여유가 생길 정도였다.
“근데 하이엘프 종족 특성치 보니까 그닥 좋을 것도 없던데?”
“네?”
“처음부터 중급 정령 쓸 수 있다는 거 제외하면 신체능력 완전 개판이고. 패시브로 타 종족간의 불화 가능성 있는 건 처음 본다.”
“아하하… 종족 내 결속력이 강하다보니….”
“그런데 너도 중급 정령 쓸 수 있지 않아?”
“그렇죠?”
“몸놀림도 좋고.”
“그렇죠?”
“왜?”
“에?”
왜냐고 물어본다면 아인은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태어났을 뿐이니까.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닉은 허공을 휘적이더니 자신 앞에 보이는 인벤의 화면과 아인을 번갈아보았다.
“하프엘프는 인간하고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거라서 신체 능력도 친화력도 애매하다고 나와 있어서.”
“…그냥 이따금 다른 경우도 나오는 게 아닐까요?”
“데이터로 결정돼서 나오는데 이따금 나온다는게… 아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네가 노력했거나.”
딱히 노력한 적도 없긴 한데. 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구태여 더 말해봤자 귀찮아질 것 같아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용사님은 제가 하프 엘프라고 했을 때 무슨 생각 들었어요?”
“별 생각 없는데. 그냥… 엄마하고 아빠 중에 누구 더 닮았을까 정도?”
“외관은 어머니를 닮았어요. 성격은 아버지 쪽이지만.”
“그럼 거기 가면 볼 수 있는 거야?”
“음… 글쎄요.”
순간 아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볼 수 있을까. 보려고 해도 그 쪽에서 피할지, 그쪽에서 보려고 해도 자신이 피할지. 서로 피하려고 할지도.
표정이 복잡해지려는 찰나에, 닉 님이 아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뭔 생각 하는 거야? 부모님 보고 싶어?”
“…아뇨.”
“잘 보진 못했는데. 무슨 퀘스트가 떴다가 사라졌다가 떴다가 사라졌다가 하네. 결정되면 말해.”
“아하하… 카오스의 조각 앞에서 뭘 숨기려는 게 잘못이었나 봐요.”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보상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것도 있긴 한데. 엔피시도 보다 보면 정드니까.”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어투. 하지만 아인에게는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편안한 온기로 다가왔다.
닉이 누군가를 위로할 때엔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라칼이 올바른 자세를 찾았고, 일행을 태운 불칸과 키샤르는 땅을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서풍의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