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 불안한 예감
어둠과 불꽃, 바람이 한데 뒤섞여 검붉은 화염이 토네이도로 변해 실리본을 덮쳤다. 영창조차 없는 대규모 술식. 실리본은 순간적으로 방어막을 둘러 공격을 받아냈지만, 예상치 못한 충격에 입가에서 한 줄기 피가 흘렀다. 주위에 이는 열기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실리본은 짧게 한숨을 쉬며 입가의 피를 손가락으로 문지른 뒤 근처의 나무에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방금의 공격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확실하게 실리본을 죽이기 위해 내지른 공격이었다. 데이드완은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하게 이성을 유지하니까.
즉 이것은 실리본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는 하나의 의사 표명이었다.
발밑의 땅이 꿈틀대더니 실리본을 집어삼키기 위해 갈라졌다. 실리본은 비행 마법을 이용해 높이 뛰어오른 뒤 상황을 살폈다. 모종의 방어 마법을 사용한 것인지 그 와중에 실리본이 있던 곳의 나무나 풀들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저 정도 위력의 공격을 하는 동시에 숲을 지키기 위해 비슷한 수준의 방어 마법을 영창 하나 없이 모조리 이루어냈다는 말이었다. 마법이나 정령술의 재능은 둘째 치더라도 마나의 절대량이 얼마나 많은 건지. 최강의 대마도사라고 불리기도 하는 실리본조차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이 반격할 기회이지만 구태여 더 싸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서 완전히 사이가 틀어졌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기로 한 실리본은 자신에게 쇄도하는 빛의 창들을 피하고 파훼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제기랄, 이실라가 말투 안 고치다가 언젠가 혼이 날 거라더니 미리 말 좀 들을 걸 그랬군.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네 신념마저 부정할 생각은 없어.”
“말투가 어떻든 말씀하시려는 것은 제 모든 삶이 조종되는 가짜 삶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듣고 싶다면 들어라.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이야기는 아니야. 우리의 이 정해진 운명들을 부숴버리자는 거다. 네 지식과 힘이라면 가능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미 늦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가지고 모아온 이 힘으로 대륙을 통째로 바꿔서, 오래도록 꿈꿔왔던 제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결론도 났고요.”
데이드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그였지만, 감정적이지 않고 언제나 확실하고 이성적으로 움직인다.
즉 데이드완의 계산으로는, 자신과 헤르도아가 합쳐진다면 정말로 대륙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어설픈 야망으로 끝내지 않을 힘이 있었다.
실리본은 데이드완을 가만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얼핏 보면 그것은 자포자기한 실소 같기도 했지만, 실상 그것은 안쓰러움을 품은 동정심에 가까웠다.
“정말로 늦기 전에 그만두라는 거다. 네 계획은 반드시 실패할 거야.”
자신감과는 다른 부류였다. 결국에는 실패할 거라는 확신이 담긴, 마치 답이 정해진 공식의 해설을 읊기라도 하는 어조. 학자이기도 한 실리본은 ‘반드시’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는 데이드완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손에서 일렁거리던 마나를 거두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당신도 제 힘을 방금 보셨을 텐데.”
말마따나 데이드완의 이 힘은 현재 대륙에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힘의 총량으로만 따지자면 오시하는 눈이나 살아 움직이는 해저가 더 강할지 몰라도, 그들은 특정한 약점이나 상성이 존재하는 만큼 그 부분만을 공략하면 어떻게든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데이드완은 현재 약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현존하는 모든 자연 속성대로 정령화를 시전할 수 있는 데이드완은 상황에 맞춰서 속성을 변환하면 그만이다. 일반적인 물리 공격은 무의미한 데다 어설픈 마법이나 정령술은 오히려 흡수할 것이다.
물리 공격과 마법 공격 양면에서 면역에 가까운 존재. 악 속성으로 대응하자니 정령술이 상극이고 성 속성으로 대응하자니 순수한 광기를 가진 데이드완이 악 성향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실리본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을 끌려는 것이라 판단한 데이드완이 더 이상의 지체 없이 공격을 이어갔다. 거대한 벼락이 실리본에게 꽂히고 고온의 빛이 뿜어졌다.
실리본은 블랭크나 단거리 텔레포트를 이용해 피했지만 결국 몇몇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가는 핏줄기가 하나 더 흘렀음에도 그는 웃음기를 머금고 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NPC는 PC를 이길 수 없다 데이드완.”
“…….”
“그렇게 정해져 있을 거다. 세상을 끝낼 것처럼 하늘에 군림하던 오시하는 눈도, 실제로 전 대륙을 멸망의 전초까지 끌고 갔던 살아 움직이는 해저도. 결국에는 그들이 이겼어.”
그는 흐르는 핏줄기를 다시금 근처의 나뭇잎으로 대강 닦은 다음 말을 이었다.
“너는 강하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헤르도아와 힘을 합친다면 정말이지 성가시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될 거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공략하기에 어렵고 성가시지만 그 나름대로 싸우는 유희를 주는 존재.’ 지금 네가 카오스의 조각들에게 듣고 있는 평가일 거야.”
실리본은 데이드완을 특별히 아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시건방지고 오만한 평가가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열불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네가 어떻게 발버둥을 치든 시간을 끄느냐 마냐의 문제야. 네가 파훼 당할 공략법은 하나쯤 존재한다. 세상에 무적의 적은 없어. 이건 학자로서도 NPC로서도 너에게 유의미한 충고야.”
“…그렇게 해서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데이드완의 말에 실리본은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 픽 웃었다.
“살아갈 수 있다.”
숲속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공격을 시작할 당시 실리본은 무섭게 노려보던 정령들은 어느새 의아하거나 혼란스러운 얼굴로 데이드완과 실리본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데이드완의 감정에 반응한 결과이고, 그의 심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대한 설명도 아직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결론 내지 못한 걸 너 같은 애송이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단지 데이드완을 쥐어흔드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분일초가 소중한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끄는 것이 중요했다. 실리본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중, 데이드완은 다시금 손안에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다만 지금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주변에 온갖 속성의 정령술이 모이기 시작했다. 불과 물, 바람, 빛, 어둠, 번개, 그 외 수많은 속성들이 천천히 주위를 맴돌더니 각각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적어도 당신만큼은 전력 외로 해야 여러 측면에서 제가 편해질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윽고 모든 드래곤들이 실리본에게 쇄도할 준비를 마쳤다. 하나하나가 마을 하나 정도는 지도에서 없어지게 만들 위력을 가졌을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방어막을 방출하면 아슬아슬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몸 한 곳은 불구가 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실리본은 비죽 웃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
“학자이자 마도사로서, 자료든 공격이든 잃어버리거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는 건 기본이지.”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실리본이 숲 곳곳에 묻혀 놓았던 핏자국들이 빛을 내뿜더니 거대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까의 공격으로 흘렸던 피는 무의미하게 닦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 하나하나가 유의미한 마법 술식이었으며, 실리본은 이 숲을 하나의 거대한 마도서로 ‘집필’한 셈이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데이드완이 급하게 술식을 지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실리본의 입이 짧은 영창을 중얼거렸다. 다시금 숲 한복판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고, 동시에 실리본에게도 수많은 원소 드래곤들이 입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
“방금 또 폭발음이 울렸어요.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걸 모르냐? 지금 거기까지 가는 것보다 우리 살아가는 것부터 생각해야 할 판국이야! 업데이트 전까지 적당히 로그아웃할 곳도 찾아야 한다고!”
본래도 이 근방의 몬스터들은 하나하나 상대하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는데, 숲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습격하기까지 하니 죽을 맛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숲에 있는 정령들은 모종의 명령이라도 받은 것인지 자연 친화력이 높은 아인조차 적대하며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아오! 진짜 개 스트레스 받는다. 하급 정령이라도 공격 은근히 아픈 데다가 잡아채기도 어려워. 게다가 나는 약한 애들한테 쥐약이란 말이야. 안 해 먹어!”
숲속을 누비며 온갖 원소 공격을 깔짝이는 하급 정령들은,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작은 크기 때문에 잡기도 어려울뿐더러 닉은 용사의 특성 때문에 자신보다 약한 존재일수록 오히려 공격의 위력이 낮아지는 페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닉은 바람의 정령 하나를 놓친 후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더니 라칼과 에르가 상대하고 있던 육식 동물에게 달려갔다. 일반적인 사자보다도 몇 배나 큰 덩치에 어지간한 방어구보다도 단단한 갈기 때문에 급소 공격이 쉽지 않은 몬스터였지만 차라리 닉에겐 이쪽이 편했다.
“센 놈 한둘은 내가 처리할게. 정령 좀 맡아줘! 사람이 전공 맞춰서 살아야지.”
사하바티는 자신의 가지에 붙은 불꽃을 가볍게 털어낸 후 안타까운 얼굴로 주위에 맴도는 하급 정령들을 하나하나 마주 보았다. 같은 자연의 존재로서 적대하는 것이 신경 쓰인다는 듯.
“하지만 이렇게 작은 아이들을 공격하자니 마음이 아프단다.”
“사하바티 너 지금 정령 한 마리 뿌리로 얽어서 쥐어짜지 않았어?! 내가 봤어 내가 봤다고!”
“아픈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의지라는 것은 생각보다도 강인해.”
“으아아악 하급 정령들 꼬챙이로 만들면서 마음에 담아둘 수 있을 아름다운 문장 읊지 마!”
결국 어찌어찌 근방의 몬스터들을 처리한 뒤 한숨을 돌린 일행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업데이트 시간까지는 5분. 그사이에 다른 몬스터들이 올 것 같지는 않았기에 닉은 언제나 그랬듯 적당히 기대기에 편한 나무를 골라 그 밑에 주저앉았다.
그 사이에 이후프는 골렘의 파편으로 보이는 돌멩이들을 찾기 위해 바닥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자라난 풀과 나무에 덮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나마 구분이 가능했다.
“거석의 무덤… 어찌어찌 찾을 수는 있을 것 같네요. 다만 폭발음이 들렸던 곳과는 조금 다른 방향일 것 같은데, 어느 쪽부터 가시겠어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폭발음이 나는 쪽으로 가보고 싶은데 좀 위험할 것 같아요.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거석의 무덤부터 가기로 해요. 뭣하면 저 혼자 갔다가 와 볼게요.”
“혼자서요? 그쪽이 더 위험한데요.”
“저는 패치 중에도 움직….”
“네?”
“저, 저는 발이 빠르니까요! 그리고 귀도 밝고. 정말로 금방 갔다 올게요. 얼마 안 걸려요.”
“그러시다면야….”
이후프는 의문에 찬 침음을 흘리다가도 이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이려고 했다.
중간에 끄덕임이 중단되었다. 로그아웃이 된 닉은 물론 다른 이들도 모두 그 상태에서 시간이 멈추어 움직이지 않았다.
패치의 시작. 아인은 그 한가운데에서 긴장된 얼굴로 침을 삼킨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