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 땅의 정령왕
“따, 땅의 정령왕이라면 트로웰 님이신가요?”
“그렇지. 뭐 그렇게 놀라? 태어나서 땅의 정령왕 처음 보나?”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태어나서 한 명도 보기 힘들다는 정령왕들을 넷 모두 보게 되다니. 아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다가 자신의 볼을 약하게 꼬집고는 에르를 쳐다보았다.
“에르. 요즘에 놀라는 일들을 너무 겪는데 이게 꿈인지 아닌지 내 볼 좀 세게 꼬집어줄래?”
“응.”
“잠깐만 에르. 왜 손에 강철로 만들어진 너클 같은 걸 씌우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세게 꼬집어 달라길래. 불이나 독을 주입하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그것까진 하지 마?”
결국 통증을 통해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포기한 뒤, 아인은 긴장한 얼굴로 땅의 정령왕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는 겉치레식 인사는 싫다면서 가볍게 손짓했지만, 아인이 기억하기로 땅의 정령왕은 예의범절을 중시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땅의 정령왕 트로웰.
세상의 누구나 딛고 있는 광활한 대지를 주관하는 이. 다른 정령술은 물론 웬만한 마법과 비교해도 물리 방어력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특히 바람 마법이나 저주에 관련해서는 면역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마법 방어력도 갖추었다.
그렇다고 공격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자신의 아래쪽은 시야의 사각이기 마련인데 그는 자유자재로 땅속에서 기습을 할 수도 있었다. 정신을 놓고 건방지게 굴었다간 눈 깜빡할 사이에 꼬치구이가 될 위험이 있으니 호의를 받기 전까지는 얌전히 구는 것이 상책이었다.
트로웰은 그런 아인을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보기는 무슨. 땅을 밟은 적이 있다면 나와 악수를 한 거나 다름이 없는데. 처음 본 적도 없고 꿈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희귀하지도 않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볼 거야.”
생각보다는 시원스러운 이미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에 아인이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자, 아인의 표정을 본 트로웰이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자신을 가리켰다.
“혹시 내 이미지가 별로인가? 기록과는 다를 수도 있으니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 괜찮으면 내가 어떤 식으로 묘사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정령이니까 거짓말할 생각은 말고.”
순간적으로 숨기거나 속여서 좋게 말할까 생각하던 아인은, 딸꾹질을 한번 하더니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의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좀 고지식한 면이 없잖아 있… 많은 편이라고 알고 있어요. 성격도 되게 딱딱하고. 특히나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을 종종 시험하듯 굴곤 하셨다고….”
한 나라의 폭군이 트로웰에게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말 그대로 땅에 잡아먹혔다는 이야기는 교훈적인 설화로서 종종 인용된다. 대부분 오래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화 속에 나온 자리에 실제로 뼛조각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
트로웰은 팔짱을 끼고 아인의 이야기를 가만 듣다가, 눈을 위로 하고 과거를 회상했다.
“몇 사람 묻은 건 사실이긴 한데.”
“사실이었어! 그러면 오해가 아니라 편견이 더욱 공고해지기만 할 뿐이잖아요!”
“적어도 일반 사람들한테는 잘 안 그래. 내가 중요시하는 건 예의나 형식이 아니거든.”
“네…? 그러면 오만방자하게 굴었다고 땅속에 생매장시켜서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까지 그 사람의 소리 없는 절규와 눈물을 느끼신 데는 다른 이유가 있나요?”
“뭔가 심한 말이 굉장히 많이 추가됐는데 나 그 정도로 미친 살육자가 아니거든?”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자신의 한쪽 어깨에 달려 있는 갑주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책임감이야.”
“책임감이요?”
“응. 자신의 위치에 걸맞는, 자신이 휘두르는 힘에 걸맞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 난 육체적이나 사회적으로 약자인 이들에게 과도한 책임까지 물을 생각은 없어. 그건 폭력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트로웰은 낮게 웃더니 이내 자신의 발아래를 가리켰다.
“많은 이들이 떠받들 만한 위치에서 힘까지 가진 이들이, 책임을 과도하게 회피하거나 누군가에게 다 맡겨버리면 나는 그때부터 시험을 내리기 시작해. 대지를 딛고 설 자격이 있는지.”
거기에 실패한 결과들은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땅이 직접 자신의 몸 위에 그를 둘 수 없다고 판단해서. 게다가 기록을 보아도 역사 속 모든 폭군들이 땅에 묻힌 것도 아니고 정말로 답이 없다 여겨지는 이들만이 트로웰에게 시험을 당했으니 그 기준은 은근히 느슨했으리라.
“같은 이유로 데이드완도 나한테 인정을 받진 못했어. 그래서 땅의 정령화는 잘 사용 못해.”
트로웰은 평탄한 어조로 말했지만,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아인은 눈을 크게 떴다.
“자, 잠시만요! 데이드완 님이요? 지금 이 주변에 계시는 그… 전 에스텔의 영주님이요?”
“뭐가 좋다고 꼬박꼬박 님 자 붙여. 아무튼 맞을 거야. 하는 짓거리에 비해서 책임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손을 봐 주려고 해도, 자칫하다간 내가 당할 것 같아서 방해만 하고 있지만.”
“방해라면 어떤 식으로…?”
“그 녀석이 피워낸 숲 있지? 뭔지는 몰라도 거기에 주기적으로 계속 마나가 공급되고 있더라고. 결국 그 나무나 식물들은 모두 땅에서 비롯된 거니까. 땅에서 마나를 갈취하고 있는 거야.”
계속해서 공급되는 마나라면 짚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어떤 수를 쓰든 티 하나 나지 않고 멀쩡하던 나무들. 역시 거기에 마법을 사용했다 싶으면서도, 계속해서 마나를 흡수당하면서도 그것을 유지하고 침입자들까지 격퇴하는 데이드완의 마나량이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오히려 영역을 넓히는 것이 데이드완에게 독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데이드완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 답을 이곳에서 찾으려는 것이리라.
“저, 사실은 데이드완 님이 거석의 무덤에서 뭔가를 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여기까지 왔어요.”
아인의 말에 트로웰은 눈썹을 살짝 좁히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은 눈치채고 지키고 있었는데 역시 그랬나. 이제 더더욱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겠어.”
“혹시 데이드완 님이 이곳을 노리려는 이유가 있을까요?”
“여기 있는 걸 사용하면 땅의 친화력을 대폭 늘릴 수 있어. 거의 나와 동등해질 정도의 친화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마나를 흡수해서 억제하던 것이 소용이 없어져.”
현재는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 적대심을 가져 그나마 억제하고는 있지만, 자연 모든 곳에서 마나를 수급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떠한 제약도 없이 고위 마법을 남발할 수 있게 된다.
애초에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의 정령술사이자 마법사인 그가 마나의 제약조차 없다면 그야말로 누구도 손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신화의 영역이자 최고위급 파괴력을 가진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도시에 떨어지는 것을 하루에 수십 차례 목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땅의 친화력을 늘릴 수 있다는 걸 빨리 사용하거나 없애 버려서….”
“안 됩니다 아인.”
아인의 말은 이후프가 단칼에 잘랐다. 이후프가 자신의 말을 자를 줄은 몰랐는지, 아인은 입을 벙긋했다가 결국 말을 멈추었다. 트로웰은 이후프와 아인을 한 번씩 번갈아 보다가 이후프 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감정적인걸.”
“그래서 제가 대륙을 떠도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저 하프엘프가 말하는 것도 사실이잖아.”
“때가 되면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합리성을 추구했다면 살던 곳을 떠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후프 특유의 시원스러운 웃음이 공간을 울렸다.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아인이 눈치만 보며 손을 꼼질거리자, 트로웰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민하다가 턱을 까딱였다.
“따라와. 보여주는 것 정도는 되지?”
“그 정도라면야. 저도 직접 보여드릴 생각이었으니까요.”
일행은 앞서가는 트로웰을 따라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은 더욱 넓어지고 사방에 크고 작은 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공간 전체가 동굴처럼 돌로 덮이기 시작하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어질 즈음, 트로웰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안에는 주먹만 한, 혹은 손가락만 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반짝이는 돌멩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어두운 공간에 주위를 덮고 있는 것은 까만 돌이라, 마치 밤하늘을 바닥에 쏟아놓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아인은 무릎을 굽혀 개중 하나를 짚더니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정말 예뻐요. 자연적으로 형성된 보석인가요? 아니면 트로웰 님이 만들어낸 것? 뭔진 몰라도 가공도 안 했는데 이렇게 빛나는 건 처음 봐요. 밖에 가지고 가면 엄청나게 비쌀 것 같아요.”
“골렘의 핵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인은 어느 때보다도 빠른 몸짓으로 골렘의 핵을 내려놓고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마찬가지로 닉 역시 조용히 골렘의 핵을 제자리에 위치시킨 뒤 아인을 쳐다보았다.
“너 지금 남의 심장 들어 올리면서 예쁘다느니 비쌀 것 같다느니 한 거야? 미쳤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도 된 기분이잖아요! 그리고 용사님도 만졌으면서!”
사하바티는 둘이 투닥이는 모습을 보며 작게 웃더니, 개중 하나를 짚어 가만 쳐다보았다.
“몸에 장식하면 잘 어울릴 것 같네.”
“저 자식 한술 더 뜨고 있어!”
트로웰과 이후프는 한바탕 난리가 난 상황을 가만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트로웰은 몰라도 이후프까지 웃고 있는 상황이 혼란스러웠는지 아인은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평소 골렘들에게 반감을 가졌었거나 하셨나요…?”
“아뇨 아뇨. 아인하고 사하바티 둘 다 올바른 반응이에요. 그러니까 전통적으로는요.”
“골렘의 핵을 팔거나 장식하는 게 올바른 반응이라고요…?”
아인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자, 이후프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과의 조화를 원하는 저희는, 죽을 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단단한 몸체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풍화되거나 필요한 자에게 넘어가고, 가장 단단한 물질인 핵은 마찬가지로 필요한 이가 있다면 모두 내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핵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데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네. 대륙전쟁 헤르도아와 싸우다가 파괴된 골렘들을 제가 모두 여기에 모아놓았거든요.”
지금까지 오면서 보았던 골렘 역시 모두 그들의 몸체였습니다. 아인은 그 말에 한 번 딸꾹질을 하며 뒤와 아래를 바라보았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어, 어째서요? 아까 하신 말씀이랑 반대잖아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좋다고….”
“기분상의 문제입니다.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네요. 희생되고 스러진 그들의 몸들이 어딘가의 건물이나 담벼락, 바닥의 일부로 사용되는 것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이전에 들었던 말. 닉은 가라앉은 눈을 깜빡이고 아인은 입을 다물었다. 트로웰은 한번 눈웃음을 짓더니 이후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것 때문에 부채감을 가진 건지 뭔지. 이 녀석에게 직접 핵을 다 흡수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라고. 하지만 언젠가 사용되거나 부수거나 해야 할 건데.”
그런 의미에서. 트로웰은 나머지 일행들을 보며 바닥에 널려 있는 골렘들의 핵을 가리켰다.
“속세적으로 말하면 일확천금. 좋게 말하면 골렘들의 의지를 이어받을 녀석을 지금이라도 찾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