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6)
16화 : 서풍의 숲으로
“생각보다 기민하게 움직이네.”
“그렇죠? 저도 직접 타 보는 건 처음이에요.”
땅의 중급정령 불칸은 육중한 몸집과는 다르게 민첩한 움직임을 보였다.
말보다 훨씬 빠르면서 땅을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때문에 큰 흔들림도 없었다.
중급정령 정도 되면 여러 방면에서 중간계의 존재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는 편으로, 특히 땅의 정령은 육지에서의 수송, 바람의 정령은 배의 운행, 물의 정령은 농사, 불의 정령은 철의 주조에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전투력으로도 중급 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정령사들은 우대를 받는 편. 자신의 주위에는 대단한 존재들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인은 적어도 그들의 평판에 누만 끼치지 않길 원했다.
또 아인에게서 이런저런 걱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중, 이후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공기가 청명해지고 있네요. 서풍의 숲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 주변의 마나가 점점 깨끗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은 주변에 바위나 흙산밖에 보이지 않는 황야인데도 말이다.
그만큼 서풍의 숲이 영향력이 강하다는 증거. 이를 반증하듯 숨을 쉴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인은 시험 삼아 바람의 하급정령인 윈디를 소환해봤는데, 소환할 때뿐 아니라 유지하는데 필요한 마나도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상쾌한 감각과는 반비례로 아인의 가슴께에 묵직한 부담감도 늘어갔다. 네가 이 공기를 누리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숨을 얕게 내쉬고, 들이킨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들어줄까. 아인이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하고 있자, 닉은 그런 아인을 빤히 보더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수락.”
갑작스러운 소리에, 아인은 제 옆에 앉은 닉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눈앞에 퀘스트 수락 창 들락거리는 게 짜증나서 수락해버렸어. 대체 무슨 퀘스트람. 내용도 안보이고.”
“죄, 죄송합니다….”
각기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며, 동시에 다른 이들의 운명에 필연적으로 얽힌다는 카오스의 조각들.
심지어 ‘퀘스트’ 라는 것은, 자신에게 얽혀 있는 것을 운명이나 신탁처럼 인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존재에게서 뭔가를 숨기거나 끙끙 앓으려고 했던 것이 멍청한 짓일지도. 아인은 속내를 들킨 것처럼 우물거리며 입을 잘 열지 못했다.
“사실 그게….”
“뭐… 됐어. 억지로 듣긴 싫고. 테두리 색 보니 연계 퀘스트니까 차차 알아가겠지.”
“혹시 저 때문에 진행이 늦어지거나 하면 언제든 따로 떼어놓아도 돼요.”
“자책 좀 그만하고. 서풍의 숲에 대해선 정보가 없어가지고 너한테서 이것저것 얻을게 많은걸.”
“너무 어릴 때 나와서 저도 잘 모르는걸요. 서풍의 숲에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해요.”
어느 정도가 필요할까. 아인은 서풍의 숲의 크기와 대략적인 정보값을 계산한 뒤 입을 열었다.
“일….”
“일주일? 조금 더 필요하나?”
“무조건요! 적어도 일 년 정도는 계셔야 할 텐데!”
“1년? 최종 컨텐츠도 아니고 지금 내가 갈 수 있을 정도의 구간에서 얼마나 더 있으라는 거야? 안 해! 못해.”
아인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닉이 이렇게 급하게 굴 줄은 몰랐다는 얼굴을 했다.
불멸의 존재인 카오스의 조각. 엘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을 산다고 알려진 드라이어드. 자연적 사망 사례는 발견된 적조차 없는 골렘.
심지어 이중 가장 수명이 적은 라칼조차 인간보다 두 세배 정도는 더 사는 편이었다.
때문에 다들 시간에 대해서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편인데, 이중 시간에 가장 제약이 없는 닉이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라칼과 이후프, 사하바티도 아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일주일 만에 사태를 해결하는 건 무리다. 더군다나 보통 일이 아닌데 .”
“하하. 서풍의 숲 산책로만 내내 걸어도 일주일이 걸릴 텐데요.”
“이 불칸, 내 뿌리가 너무 깊게 박혔는걸. 정말 화분이 되어버렸어.”
사하바티는 아니었지만.
아인은 서풍의 숲이 만만하게 볼만한 곳도 아니며, 그 넓이와 의뢰의 스케일 때문에라도 짧은 기간 안에 해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어찌어찌 설득을 했다.
하지만 닉은 가능한 빠르게 일정을 소화시키고 싶은 생각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중요한 일만 해결하고 얻을 것만 얻고 나오고 싶다면서.
“뭐가 그렇게 급하신 거예요.?”
“이건… 어쩔 수 없어. 특히 상당수의 한국 겜창들에게 보이는 모습이야.”
역시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인은 이전에 닉이 ‘한국의 핏줄’에 대해 말한 것과 관련이 있다 생각했다.
축복. 혹은 저주에 가까운 ‘핏줄’의 힘. 그것은 아마 카오스의 조각도 피해갈 수 없는 것.
용사님에게 과도하게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아인은 조금이라도 닉을 설득하기 위해 검지를 펴고 조곤조곤 말했다.
“퀘스트라는 것은 사건의 중심에 바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지만요. 너무 마음을 급하게 먹다보면… 으악?!”
아인이 불퉁한 얼굴의 닉을 달래던 중 갑작스레 불칸이 멈췄다. 미리 부탁을 들어놓은 정령이 멈추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거나, 위험요소가 나왔거나.
하지만 아직은 주변이 바위투성이의 황무지였기에, 모두가 위험요소를 염두에 뒀다. 느긋한 사하바티와 눈이 없는 이후프를 제외하고 모두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근방을 경계했다.
그때 아인의 볼에 익숙하고도 신선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마나를 가득 품은, 어쩌면 장난스럽기까지 느껴지는 감각.
그 흐름이 시작되는 곳을 눈으로 쫓으니, 바람의 중급정령인 제피로스 한 개체가 휘파람을 불며 일행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안녕~? 너희는 누구야? 엘프 두 명, 라이칸, 드라이어드, 골렘… 쉽게 볼 조합은 아니네?”
정령. 그것도 중급 이상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령술사가 근처에 있거나, 자연스럽게 중간계에 현현할 정도로 주변에 질이 좋고 농도가 짙은 마나가 산재해있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아인이 귀를 기울여도 근방에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풍의 숲 영향지에 들어왔다는 증거. 관심받길 좋아하고 장난기가 많은 바람의 정령 특성상, 잘만 하면 정보를 술술 불어줄 수도 있었다.
제피로스는 닉과 아인의 주변을 크게 한번 돌더니, 갑자기 뒤에서 바람을 일으켜 머리카락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둘의 길이가 다른 귀가 그대로 드러났다.
“재밌네. 하이엘프와 하프엘프잖아? 둘이 친구? 이런 조합은 그 고명한 서풍의 숲 수장도 살면서 들어본 적 없을 것 같은데.”
“… 친구는 아니지만요.”
“역시 그렇지. 그럼 주종?”
“아니요. 절대로.”
“으하학, 농담이야 농담. 그런 얼굴 하지 마. 하프엘프를 종으로 만들 정도로 저 녀석 속내가 구려 보이진 않거든. 혹시 너희들 행선지가 어디야?”
“저희는 서풍의 숲으로 가요. 에스텔의 데이드완 영주님에게 부탁을 받아서.”
“뭐~? 정말로? 그 녀석한테? 엘프의 배신자!”
험악한 단어를 내뱉었지만, 입가엔 장난스러운 웃음이 슬슬 걸려있었다.
배신자라는 말은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엘프들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보다 서풍의 숲에서 데이드완님의 인지도가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아인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피로스는 데이드완에게 부탁을 받았다는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려는 듯 불칸과 키샤르를 바라보았다.
셋은 잠깐 일련의 교신을 행하듯 시선을 교환하고, 제피로스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공중을 한 바퀴 돌며 깔깔 웃더니,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녀석의 보증이라면 1차는 합격이겠지. 입구가 코앞이니 내가 안내해줄게! 저쪽으로 가자.”
제피로스의 말에 일행들은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은 아직 황무지의 한가운데에 있는데다, 제피로스가 가리키는 곳은 식생 하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돌산이었으니까.
“농담이죠?”
“어라, 이건 농담 아닌데.”
제피로스가 피실피실 웃으며 손을 휘젓더니 돌산과 일행에게 마나가 깃든 바람을 쏘아냈다. 마치 그 위에 덮인 무언가를 벗겨내는 것처럼.
강한 바람이지만 공격을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상쾌해지는 기분. 잠시 눈을 감고, 시간이 지나 떠 보니…
“어어?”
“뭐야 이거!”
“아~ 이 반응들. 언제 봐도 안 질려 정말.”
“청명함을 느낀 순간부터 이미 도달한 상태인 모양입니다. 이 일대 모두에 결계처럼 환각마법이 덧칠돼 있었나 봐요.”
라칼과 닉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재밌어 죽겠다는 듯 자지러지게 웃는 제피로스, 속았다는 듯 허탈하게 웃는 이후프의 목소리가 한데 섞였다.
눈을 뜬 일행들의 시야에는,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울창한 숲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돌산은 빼곡하게 우거진 숲이 되었고, 자갈뿐이던 바닥은 이름 모를 풀과 꽃들로 가득했다.
주변을 길게 훑던 닉은, 지척에 있던 바위가 거대한 나무로 변한 것을 보고 질린 듯 혀를 내둘렀다.
“말 한번 잘못하면 바로 쫓겨나겠는데? 남한테 알려지는 걸 이렇게 싫어해서야.”
“그러게요… 이렇게 숨겨봤자 안에서 더 곪을 뿐인데.”
서풍의 숲이 본래 외부를 경계하긴 했지만, 아인의 기억에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최근에 일어난 현상들 때문에 더욱 폐쇄적으로 변한 것일 터다.
잘못하면 자신은 정말로 문전박대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인은 헝클어졌던 머리를 정돈하고 짧고 뾰족한 귀 끝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위에 덮었다.
아인이 작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스리고 있자니, 길고 뾰족한 자신의 귀를 톡톡 만지던 닉은 문득 무언가 생각나기라도 했는지 아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주의사항 있어?”
“주의사항이요? 많긴 한데. 가장 큰 건 자연파괴라고 생각되는 모든 행위만 안하시면 돼요.”
“생각보다 어려운걸. 다른 건? 생각해봐. 이곳만의 인사법 같은 게 있다든지.”
“인사도 별거 없어요. 틀에 정해진 문구는 없답니다. 그냥 적당히… 감성적인 느낌으로?”
“잠깐. 감성적?”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아인은 침음을 흘리며 오랜 기억을 뒤적였다.
“가령 자기소개를 할 때는, ‘햇빛이 가장 먼저 닿는 숲에서 태어난 바람의 사수 누구누구’ 같은 느낌으로….”
“끄아악!”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닉은 갑작스럽게 주저앉으며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번개에 불타도 ‘따끔하다’ 정도로 끝나고, 어지간한 상황에선 심드렁하고 덤덤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닉이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아인의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이 스쳐지나갔다. ‘핏줄’의 영향일까. 아니면 갑작스레 본체에 이상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지엠’에게서 모종의 수단이라도 가해진 거라면.
스스로도 섬짓해질 정도의 온갖 가설이 흐르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닉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늉늉 오글거려.”
“네?”
“존1나 오글거려.”
“용사님….”
“그건 과몰입충도 힘들어할 거라고! 왜 엔피시가 할 만 할 대사를 내가 해야 하는 건데!”
예상보다 정신적 타격이 컸는지 닉은 한동안 ‘하기 싫다’며 빽빽 소리를 질렀다.
아직 말하지 못한 주의사항이 있는데. 닉의 입을 직접 막아버릴까 고민하고 있던 중, 아인의 귀에 발소리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늦었다.’
미미한 살기마저 느껴지는 기척.
그곳엔, 날카로운 눈매에 하얀색 단발머리를 한 엘프 한 명이 어느새 다가와 나무 위에서 일행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활. 한 손에는 당장이라도 시위에 매달 듯 화살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호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인의 일행들이 엘프나 드라이어드, 골렘이 아니었다면 이미 몸 어딘가에 저 화살이 꽂혔을 것이다.
“긴급상황이 아닌 이상 동물들이 놀랄 수 있는 갑작스러운 소음 금지. 이 기본적인 규칙도 모르나? 하이엘프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