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 사전 준비
“잠깐. 잠깐만요. 지금 저 놀리려고 일부러 아무런 말이나 꺼내는 건 아니죠?”
“너 하나 놀리려고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말을 꾸며낼 필요는 없지. 안 그래?”
갑작스러운 말의 연속이었다. 아인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기다려달라는 듯 손을 앞으로 뻗고 휘적였다. 자작극이라는 말부터 놀랐는데, 데이터 삭제라니. 진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인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영웅의 눈치를 한번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선 수도에서 발생한 사건이 우라노스의 자작극이라는 건 무슨 소리예요?”
“카오스의 조각들이 선과 악의 경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영웅의 말에 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서 카오스의 조각들을 하나의 성향으로 요약하라면 ‘정의할 수 없다.’라고밖에 정의할 수가 없었다. 악마로도 태어날 수 있고 천사로도 태어날 수 있으며, 악마로 태어나 선한 짓을 하거나 천사로 태어나 악한 짓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멋대로 종족이 바뀔 때도 있으니 법으로도 윤리로도 상식으로도 통제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간다고밖에 볼 수 없는 존재들.
“헤르도아의 고위 사제와 황궁과 수도를 잘 알고 있는 우라노스가 결탁을 하고 일부러 수도에 허점을 만들어둔 거라고 생각한다. 황궁 내부라면 자기 안방이나 다름없으니 방어 마법 같은 것도 손 쓸 도리 없이 만들어뒀겠지. 실제로 전투 때 발동하지 않았다고 들었고.”
“…그렇게까지 해서 우라노스가 얻으려는 게 뭐예요?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데.”
황제의 최측근 중 한 명.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길드의 수장이자 카오스의 조각들 중에서도 정점에 선 자. 그런 사람이 뭐가 더 아쉬워서 자작극을 했을까. 아인은 이해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영웅도 답하기 힘들었는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무리 영웅이라도 태생은 이 세상의 데이터이자 NPC인 만큼, 그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순 없으니.
“그러면 데이터 삭제라는 건 무슨 말이에요? 우라노스를… 데이터 삭제시킨다고요?”
NPC들에게 데이터 삭제라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그것도 일반적인 죽음이 아닌, 이 세상에서 관련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누구도 사라진 이를 기억할 수 없는 소멸에 가까운 것.
하지만 카오스의 조각들에게 데이터 삭제는 무슨 의미일까. 아인은 그것이 궁금하면서도 애초에 가능한 일인지 의문스러웠다.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정확하게는 영구정지일까. 이 세상에서 박탈시켜버린다는 거지. 아까 자작극을 벌였다고 했잖아?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카오스의 조각들이 무엇을 하든 그건 자유고, 이 세상이 그걸 제지할 이유는 못 돼. 진짜 문제는 과정에서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거야.”
“제 입장에서는 자작극도 엄청나게 문제고 큰일이지만요….”
바이러스를 퍼트리거나 고의적으로 데이터를 손상시키려는 행위는 카오스도 함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용자가 이 세상의 정점이라면 함부로 건드는 것도 힘들었다.
어설프게 제지를 했다가 역풍을 맞으면 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확실한 문제를 잡고 보내버리거나 어떤 식으로든 재기불능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카오스의 조각들은 여기서 죽어도 본체에 영향은 안 가는 거예요?”
“너는 그 와중에 걱정이나 하고 있는 거냐? 일단 데이터 삭제로는 직접적 피해는 없어.”
그렇다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아인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 할지언정, 데이터 삭제는 아인에게 있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을 위한 일이라면 거들게요. 그런데 제가 지금부터 할 게 뭔가요? 뭔가… 비밀스러운 곳에 잠입하나요? 후드도 쓰고 은신도 하고?”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아인이 긴장과 기대가 섞인 얼굴로 주먹을 꼭 쥐자, 영웅은 아인을 마주보다가 픽 웃은 뒤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뭐 할 필요 없어. 중요한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가능한 너는 눈에 너무 띄지 말아. 어차피 시간 지나면 우라노스 측에서 너를 찾으려고 눈에 쌍심지를 켤걸.”
그건 정말로 싫은데. 아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신음 소리를 옅게 내다가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당신은 그동안 뭘 해요? 중요한 일이라는 건 뭐고요. 혼자 해도 괜찮은 거예요?”
“이런저런 증거를 찾고 있는 중이야. 불법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 그런 잘못 이루어진 데이터가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니까, 뭣하면 헌터 길드 측에도 의뢰하거나….”
영웅의 말을 들으며 아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에 대한 위험성을 한창 설파하던 영웅은 뒤늦게 아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류 데이터인 영웅이 ‘잘못 이루어진 데이터’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오류 데이터인 아인이 듣고 있는 모습이 모순적인 상황. 영웅은 눈을 위로 올리며 볼을 긁적였다.
“괜한 생각은 하지 마. 너나 나는 이 세상을 좋은 쪽으로 고쳐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쪽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은 그의 머리를 한 번 꾹 누르듯 쓰다듬고는 자리를 뜨려다가, 시선만 힐긋 돌려 아인을 쳐다보았다.
“미안해.”
“뭐가요?”
“그냥, 이것저것?”
영웅은 그 말만 하고는 발에 힘을 주고 높게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목소리가 닿지 않을 거리까지 벌어지는 것을 멍하니 보던 아인은, 자신을 지켜주려는 듯 옆에 서 있던 에르를 보았다.
“혹시 방금 미안하다고 할 때 무슨 생각하는지 읽었어?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한순간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서 헷갈려. 문장이랑 기억이 다 뒤섞여서.”
에르의 말에 아인은 찝찝하다는 양 입을 우물거리다가 영웅이 사라진 자리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여전히 마음에 둘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
영웅은 한참 동안 거의 날 듯이 이동하다가, 한 공터에서 멈췄다. 이윽고 한숨을 깊이 쉬는 순간 뒤에 있던 그림자에서 새까만 갑옷을 입은 카오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얘기는 끝마치고 왔나?”
아직 투구를 벗은 상태였던 영웅은 미간을 좁히며 카오스를 죽일 듯 바라보았다.
“끝냈지. 네 덕분에 헐레벌떡 뛰어가서 사정 설명한 다음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고만 말하고 오는 길이야 이 개자식아. 나만 끌어들이면 됐지 아인은 왜 불러들이고 난리야. 뒤질래?”
“먼저 부른 건 아인 쪽이다. 나는 서로에게 이득이 될 만한 거래를 했을 뿐이고.”
“쿨찐 행세하는 거 진심 마음에 안 드네. 아인이 너 불러서 거래 제안하는 순간 속으로 환호성 터트린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우라노스 건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까….”
영웅은 한 손으로 검을 뽑더니 망설임 없이 카오스를 향해 휘둘렀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분명한 형태를 가진 검기가 카오스의 목 쪽으로 정확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카앙!
어느새 뽑힌 새까만 검이 검기를 막아냈다. 무시무시한 쇳소리가 울리며, 양옆에 있던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카오스조차 일순간 비틀거릴 정도의 강한 힘. 영웅은 치켜뜬 눈을 유지한 채 카오스를 보다가 이를 뿌득 갈고 다시 투구를 썼다.
“아인은 이제 평범하게 살게 해 줘. 이런 곳에 말려들게 하지 마. 이제 너도 걔가 이 세상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잖아. 아무리 큰 능력을 가져도 식겁부터 하는 애라고.”
“일부 동의하지만, 때로는 올곧은 선의가 더욱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긴 하지.”
“아인 관련해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땐 의뢰고 자시고 둘 중 하나 소멸할 때까지 싸운다.”
결국 카오스는 먼저 검을 집어넣는 것으로 대답했다. 다만 말은 더 덧붙였다.
“너 혼자 하기에는 힘들 거다. 알고 있을 텐데. 네 사정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적어.”
“태생부터 이렇게 살아왔어. 나를 이해하는 존재는 너 포함해 아무도 없었고. 익숙해.”
“이제 한 명이 있을 텐데. 너 하는 걸 봐선 그 녀석도 곧 혼자가 되겠지만.”
영웅은 카오스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만 다시금 검을 뽑거나 둘 중 하나가 소멸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아닌,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몸을 돌릴 뿐이었다.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최적의 순간이 올 때까지.
***
“저, 저게 뭐야…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공격이 듣긴 하는 거야?”
산적단의 두목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어가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며 전의를 상실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웬 굶주린 꼬마가 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제국 근방의 산맥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자신들은 산적단이라 할지라도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녹록지 않아 제국에서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작은 분파를 쓰러트린다 한들 산맥 어딘가에서 금방 자라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궤멸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엄청난 속도로 곳곳에 존재하는 분파들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본부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닥친 것이다. 그것도 대규모 군대나 강한 용병 집단이 아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기괴한 소년 한 명에게.
그것이 지나가는 곳에는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았다. 바위도 거대한 이빨 자국을 남긴 채 파먹히고, 인간은 통째로 삼켜져 버렸다. 공격에 상처는 입는 듯하나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상처를 입는다 한들 인간 한 명을 먹으면 곧바로 회복했다.
“제기랄. 넌 뭐야. 넌 뭐냐고! 제국의 기사단장이라도 되냐! 왜 갑자기 와서 행패야!”
아까부터 몇 번이나 고함을 질렀지만 그것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라는 듯 산적단의 본부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중 하나를 물어뜯을 뿐이었다.
우라노스는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며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박수까지 몇 번 칠 정도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설마 사흘 만에 깔끔하게 청소를 할 줄은.”
설사 자신이라도 이 산적단을 완벽하게 몰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느껴도 곧바로 도망치는 데다 무시할만한 실력도 아니었기에, 산적단을 물리치기 위해 쓰는 돈이 오히려 더 손해로 이어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에리식톤은 알아서 살아있는 곳이 있는 곳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체력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다친 곳이 있다면 알아서 회복한다. 그야말로 최고의 펫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생각보다도 계획이 훨씬 더 빠르게 이루어지겠는데. 황제에 올라갔을 때 선언문은 아직 준비 못 했는데 말이야.”
제국 내에서 자신의 주가가 올라간 지금 한 번 더 치고 올라갈 필요가 있었다. 심지어 자신에게는 데이터를 조작해 자신의 말만을 듣게 만든 에리식톤까지 있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황궁 내부에서부터 자신의 편을 만들어 놓으며 제국 주민들의 환심을 사고, 이후 황제와 맞먹을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우라노스는 마지막 기둥이 끊어지고 완전히 붕괴하는 산적단의 본부를 보며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