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 저항
우라노스의 말에 페리스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하는 얼굴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렇게 당당하고 오만하게 구는 경우가 있었던가. 다가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겠다만,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러는 건가?”
“페리스 아크라바. 살아있는 전설 중 한 명이자 대륙전쟁 당시 헤르도아를 끝까지 몰고 갔던 영웅이 아닌가? 물론 설정 때문인지 퀘스트 때문인지 이런 신세로 전락했지만.”
자신이 이런 신세로 전락했다는 말 자체는 타격이 없었다. 분명히 페리스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전에는 별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헤르도아에 귀의한 순간부터 들리던 이색적인 단어들.
“설정… 퀘스트… 너희 카오스의 조각들은 그 말을 참 많이도 하더군. 무슨 의미인가?”
“뭐야, NPC인데 이런 대화도 할 수 있나? 쉽게 말하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다.”
“이미 정해져 있다라. 내가 이런 신세가 된다는 것? 운명을 말하는 건가? 그러면 가트도….”
“미안한데 내가 좀 바쁜 몸이라서. 순순히 싸워서 진 후 부하가 되든 해 주지 않겠나?”
우라노스는 이야기도 더 듣기 귀찮다는 양 손을 휘적였다. 그는 RPG 게임을 할 때 모든 스크립트와 트레일러 영상도 모두 스킵을 누를 정도로 스토리나 캐릭터 설정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우라노스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위치와 세간의 관심뿐.
그는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조각을 손에 꾹 쥐었다. 전투에서 이기든 지든 이것만 페리스의 몸에 박아 넣으면 된다. 그 이후에는 페리스도 에리식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말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꼴은 우라노스의 성격에 참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돈 박아서 호감도 아이템이나 포션 주면 알아서 좋은 성향을 보여야 하는 NPC 주제에 이렇게 반항하는 건 정말 싫어. 이 게임은 다 좋은데 이런 부분에서 마음에 안 든다니까.’
페리스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요즘 지명수배라도 걸렸는지 자신을 잡으러 오는 카오스의 조각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와서 베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하다 하다 이런 놈팡이까지 오게 되니 피곤함이 극에 달했다.
“…하긴 내 수준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말도 되겠지. 할 말은 없군. 이러다가 언젠가 잡혀 사형을 당하든 해도, 차라리 마지막은 내가 원하던 사람한테….”
“스킵.”
이번에도 우라노스는 정해진 스크립트만을 읽는 줄 알고 익숙하게 스킵을 외쳤다. 이에 페리스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을 멈추고 우라노스를 빤히 보았다.
“무슨 의미지?”
“네 얘기는 관심 없다는 거. 바쁜 몸이라니까. 얼마나 중요한 NPC길래 이렇게 시간을 끌어.”
페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해는 됐다. 불멸의 존재이자 세상의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카오스의 조각들. 그들에게는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으로 들리겠는가.
“하지만 이해되는 것과 내가 인정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
꺼내 놓은 검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인과의 전투 이후 페리스는 검집 안에 검을 패검하지 않고 계속해서 꺼내 놓고 있었다. 과거의 망령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된 그는 그만큼 전투능력이 높아졌지만 점차 이성을 놓는 시간도 길어지는 중이었다.
“내 삶을 우습게 보지 마라.”
“우습게 보는 게 아니야. 관심이 없을 뿐이지. 넌 그냥 NPC일 뿐이니까.”
“그게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이 별것 없다고 생각하는 반증이 아닌가.”
페리스는 검을 땅에 질질 끌며 천천히 우라노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에 우라노스도 패왕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서로 마주 보는 시간은 짧았다. 페리스는 약간 몸을 기울이나 싶더니,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가 우라노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힌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탁한 보라색 검기과 은색의 검기가 한동안 힘 싸움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은색의 검기 쪽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라노스는 혀를 차고 페리스는 한 번 힘을 주어 밀어낸 후 물러났다.
자신이 들은 데이터보다도 훨씬 강했다. 예정대로라면 자신이 근소한 차이로 이겼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 살짝 모양새는 빠지더라도 부하들을 데리고 올 걸 그랬지만, 자신을 우러러보는 모습들을 포기하긴 싫었다.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뒤에서 말이 나올 테니까.
“복종하라.”
패왕의 특성 중 하나가 발동되며 시각적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기의 파동이 우라노스에게서 방출되기 시작했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기에 눌리게 하는 스킬 중 하나. 약자면 약자일수록 그 효과가 눈에 띄며, 기가 약한 일반인이라면 그것만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자라 할지라도 일순간은 틈을 보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 이 스킬의 장점 중 하나였다. 우라노스는 페리스의 자세가 무너지는 순간을 파고들려 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페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을 경계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야? 오류 난 건가? 무릎 꿇기는커녕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저항 스킬 가지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며 의문을 중얼거리는 우라노스에게 페리스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그건 잘 모르겠지만. 네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겠군. 오로지 남들에게 추앙받고 누군가가 뒤를 봐주는 삶만을 이어왔나? 모든 이들이 네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당연하고?”
페리스 특유의 비릿한 미소와 그 말이 우라노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저 0와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주제에 플레이어인 자신을 이렇게까지 기분 더럽게 만든다니. 이 전투가 끝나면 일대일 고객센터에서 설정을 좀 고쳐달라고 건의할까 싶을 정도였다.
“진짜 이 NPC 말 더럽게 많네…!”
“하하. 그런 말을 종종 듣긴 했지.”
특유의 말투가 무너질 정도로 우라노스가 당황하는 틈을 타, 페리스는 상대방에게 연격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패왕의 기운에도 아랑곳없이 급소만을 파고들며 집요하게 검을 휘두르는 페리스의 모습은 사냥감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 하는 하이에나와 닮아 있었다.
실제로 페리스는 ‘자기 자신만의 명령을 듣는 이.’라는 특성을 가졌다. 그는 최강의 용병으로서 강제성을 지닌 명령, 혹은 권력에 기인한 특성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이상할 정도로 우라노스의 스킬에 아무런 효과를 받고 있지 않았다.
순수한 스탯만 본다면 둘은 비등비등하거나 우라노스가 미세하게 앞서 있었으나, 스킬을 분배하고 몸을 움직이는 측면에서 페리스는 우라노스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오로지 막대한 스탯만으로 상대방을 찍어누르던 우라노스에겐 천적과도 같은 존재.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너를 정말로 죽일 생각이 생겼다. 카오스의 조각.”
페리스는 검을 가로로 그을 듯 자세를 취했다가, 빠르게 자세를 바꿔 세로로 우라노스를 내리쳤다. 방어를 하더라도 그대로 밀고 들어갈 정도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인데, 자세까지 망가졌으니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쾅!! 빠각, 우득.
검기는 물론 우라노스가 입고 있던 방어구에까지 손상이 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우라노스는 입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어깨의 반 이상이 검날에 잘려 나갔지만 방어력과 온갖 스킬 덕에 완전히 양단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미미하게나마 이채를 띄고 있었다. 결국에는 자신이 승리한다는 자신감.
“진짜 늉늉맞게도 강하네.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페리스!!”
우라노스는 광소를 터트리며 가까이 다가와 있는 페리스의 몸에 검은 조각을 박아넣었다. 페리스는 일순간 움찔하며 뒤로 크게 물러났지만 이미 그것은 안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제 저 NPC는 모든 이성을 잃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우라노스는 벌써부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재앙인 에리식톤과 최강의 용병을 얻은 자신은 이제 대륙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황궁에서 이미지 메이킹도 확실하게 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도 정보를 끊임없이 전달해줄 메이드도 점차 잠식해가는 중이다. 자신의 영향력이 황제를 넘어서는 순간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이유로 폐위시킨다면 드디어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달 이상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불법 프로그램까지 사용했음에도 이렇게까지 정상에 등극할 수 없는 게임은 처음이었지만, 그만큼 엄청난 리턴이 올 것이다. 이미 ‘세계에서 영향력 높은 100인’에 자신의 이름이 실렸을 정도인데 황제가 된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 전 세계에서 카오스를 플레이하지 않는 국가는 없을 정도였다. 그 말인즉슨 인게임 안에서만큼은 자신은 전 지구적인 주목을 받는 최고의 스타가 되는 것이다.
우라노스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1위’에 등극해 인터뷰를 하는 상상의 나래까지 펼치고 있는 사이, 페리스는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이질적인 무언가에게 저항하기 위해 이를 깨물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이질적인 것과 대항하고 있는 감각이었다.
이성을 잃고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에게 복종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켜듦과 동시에, 자신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그것을 침범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워하던 페리스는 이내 몸을 축 늘어뜨린 뒤 고개를 숙였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우라노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를 대강 포션으로 치유한 후 가까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이내 바로 손이 닿을 정도로 다가갔을 무렵-
페리스의 새까만 검이 우라노스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우라노스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멍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께와 검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페리스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힘을 주고 더욱 깊이 검을 박아넣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나? 꽤 볼 만한 표정인데.”
“이게 무슨… 내 말을… 들어라… 당장 멈춰….”
우라노스가 더듬거리며 페리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페리스는 일순간 머리가 울리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딱 그 정도였을 뿐이다.
에리식톤에게는 잘만 먹히던 프로그램이 왜 페리스에게는 듣지 않는단 말인가? 우라노스는 의문과 절망,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페리스도, 이 엉망이 된 프로그램을 전해준 이도.
“사람이 사람을 멋대로 부리려면, 그만한 각오는 하고 있어야지.”
페리스는 심장을 꿰뚫은 흑도를 한번 비틀었고, 그 순간 우라노스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지더니 이내 가루로 쇠하기 시작했다. 사망으로 인한 강제 로그아웃. 그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로그아웃이 되기 직전, 우라노스는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 하나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