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8)
18화 : 오류 데이터?
“뭐, 뭐가 깨져요?”
“그러니까 파일이… 저런 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을 풍기기는 해요.”
“아니 늉늉, 그런 허세 넘치는 의미가 아니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진짜로 이 세계의 규칙에 어긋나. 존재하면 안 되는 거야.”
다른 이도 아닌 카오스의 조각이 ‘규칙에 어긋난다’라고 말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규격외의 존재라는 걸까.
아인은 닉이 이런 표현을 쓴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처음이었다.
그 사이에도 ‘무언가’의 기척은 아인 쪽으로 다가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그늘 밑에서 그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 드러냈다는 쪽이 차라리 더 맞았다. 그것이 나오는 순간 유난히 짙었던 나무그늘이 옅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핏 보았을 때는 앳된 인간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키는 아인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큰 정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고 저들끼리 엉긴 채 무릎까지 늘어뜨려진 검은 머리카락. 축 처진 눈매에 새까만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입도 우물거리지만, 절대로 유약해 보이진 않았다.
그것의 오른손이 한번 움찔거릴 때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번개와 불꽃이 튀고, 왼손을 까딱이면 주변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흙바닥이 흥건하게 젖기 시작하더니 이내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체 저건… 뭐라고 정의할 수가 있을까요.”
맨 앞에서 그것을 주시하던 이후프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고, 이후프도 대답을 바란 것 같진 않았다.
어둠의 정령도, 빛의 정령도, 불의 정령도, 번개의 정령도, 물의 정령도 아닌. 하지만 그 모든 것이기도 한 무언가.
일행 중 누구도 쉽사리 가까이 갈 수 없어 망설이던 차에, 닉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너 누구니?”
“….”
“왜 여기 있어? 네가 이 숲을 어지럽혔어?”
“아니야.”
“얘들아 아니래.”
수긍이 너무 빨라! 아인이 다른 쪽으로 말을 붙여보라고 온 힘을 다해 손짓발짓을 하고 있는데,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것’은 느릿하게 얼굴을 들며 닉을 바라보았다.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어?”
“숲을 어지럽히는 거. 그게 내가 태어난 목적?”
“어? 어? 잠깐.”
불길한 기운이 퍼졌다. ‘그것’의 오른손에서 타닥거리며 불꽃을 튀기던 전기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하나의 번개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게 내 이유라면.”
“잠깐 임마!!”
파지지직! 쾅!
닉에게 쇄도한 번개는 목표물을 맞추지 못한 채 뒤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적중했다. 상대방의 힘만큼 강해지는 ‘용사 특성’에 힘입어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반격은 생각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무는 그대로 우지끈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그것’은 여유를 주지 않고 두 번째 번개를 날렸다.
파각!
이번엔 이후프가 자신의 몸으로 번개를 막아냈으나, 그것만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지 파편을 흘리며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진짜 장난 아닌데요.”
“이대로라면 당하기만 한다.”
라칼은 기다렸다는 듯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그것’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닥에서 흙벽이 솟아올랐으나, 라칼이 팔을 휘두르자 벽은 그대로 잘려나갔다.
이후 라칼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달려들어 ‘그것’의 목에 손을 대는 듯 했으나
“윽!”
직전에서 팔을 물리더니 뒤로 크게 물러나 인상을 찌푸렸다.
라칼의 팔은 마치 무언가에 감염된 듯 검게 물들어 있었고, 털과 살점이 썩어 검은 피가 아래로 죽죽 흐르기 시작했다.
“독까지 다루나. 피부가 직접 닿으면 살이 썩어 들어가는군.”
“묶어놓을게.”
사하바티가 한 손을 땅속에 집어넣자 라칼 때문에 뒤로 물러난 ‘그것’의 몸을 굵은 나무뿌리가 칭칭 감았다.
오래지 않아 나무뿌리는 썩어가기 시작했으나, 당장은 그의 몸을 구속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실라가 바람의 중급정령 제피로스를 불러내고, 화살에 바람을 감아 ‘그것’의 가슴에 쏘았다.
빠르게 회전하는 화살은 순식간에 상대방에게 빨려 들어가듯 쇄도했고, 순식간에 관통했다.
“아파.”
하지만 약간의 타격만 입혔을 뿐, 가슴에 난 구멍은 이내 수복되기 시작했다.
“숲을 어지럽히는 거. 이것도 아니야?”
그리고 ‘그것’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손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대답해주질 못해. 내가 누군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 목적이 뭔지 모르겠어. 아니… 목적이 없진 않은데 너무 많아. 다 섞였어.”
“너는 누구야?”
이실라는 다음 화살을 준비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고, ‘그것’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누구야…? 내가 누군지 제대로 말을 못하겠어. 지금도 내 안에 몇 개나 되는 것들이 있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이 나한테 새겨져있는지 모르겠다고…!”
‘그것’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들썩였다. 흙이 요동치고, 세찬 바람이 몰아치더니 나뭇가지 끝에서 별안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모두가 완연한 전투태세를 갖췄다. 사하바티는 두 손을 모두 땅속에 묻고, 라칼은 낮게 울음소리를 흘리며 자신의 육체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후프는 쓴웃음을 흘리며 바위로 된 거대한 방패를 한 손에 든채 빙빙 돌렸다.
“이런 식으로 풀건 아닌 것 같지만요. 대화로 어떻게 못하나?”
이실라 역시 다시금 화살에 바람을 두르며 시위를 강하게 당기는데, 이실라가 소환했던 제피로스가 ‘그것’을 보다가 시원스레 웃었다.
“저게 뭐야. 이길 순 있어?”
“조용히 해. 화살에 깃들게 한 바람의 출력이나 높여줘.”
“뭐, 그건 어렵지 않은데. 오늘로 너와의 계약이 끝나버릴 것 같네. 지금 저건 상급정령인 보레아스는커녕 정령왕이 와도 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인걸.”
“…그 정도라고?”
제피로스의 말처럼, 저것에게서 싸워 이길 승산이 보일 것 같진 않았다. 정면에서 달려들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닉도 이대로 부딪히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는지 허공을 몇 번 휘적이더니 긴 침음을 흘렸다.
“퀘스트 내용이 ‘@@!^&폄꽈질뼸쀍의 폭주를 멈춰라.’거든. 이게 오류라서 글자 깨진 건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쓰러트려라’라는 내용이 아니야.”
“그 그러면….”
“이기라고 만든 게 아니야. 폭주를 멈추는 게 중요한 거지. 보통 이런 경우엔 적절한 대화를 하거나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으면 알아서 자멸해. 일단 끝까지 피해봐!”
닉의 외침에 사하바티와 이후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라칼은 불만을 터트렸지만 그대로 맞붙어 승산이 없으리라는 것은 동의했다.
이실라는 제피로스와 잠시 말다툼을 하는 듯 하더니, 화살을 거두고 그곳에 두른 바람을 자신의 다리로 옮겼다.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회피 위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닉은 용사 특성으로 인해 이미 상당히 강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방패를 들고 버티기만 한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아인은…
“…윈디, 나 잡고 올리긴 힘들지?”
“피이-.”
언제까지 도망쳐야 하는지 모르는 이상 제피로스를 꺼내긴 부담스럽다. 어떻게든 몸놀림을 믿고 도망치자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인의 옆으로 날카로운 칼날 하나가 날아와 꽂혔다.
그걸 누가 던졌는지는, 꾸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에 철갑옷을 덧씌우는 ‘그것’이 잘 말해주고 있었다.
“네가 첫 번째.”
“엄마야아!!”
이실라의 공격방식을 학습했는지, ‘그것’은 허공에서 날카로운 칼날 네 개를 만들더니 바람을 입혀 아인에게 빠르게 내리꽂았다.
공격방향을 예측할 수 있어 미리 몸을 숙였기에 망정이지, 보고 피하려고 했다면 즉시 네 개의 칼날이 아인의 몸을 꿰뚫어버렸을 것이다.
근접하면 오오라처럼 풍기는 질병의 기운에 살이 썩어 들어가고, 멀리에서 어설픈 위협사격을 하면 갑옷이나 돌벽에 막힌 뒤 도리어 번개와 칼날로 저격당한다.
이후프가 일부 땅을 뒤흔들어 넘어뜨리려 했으나, ‘그것’은 허공에 뜨는 것으로 공격을 손쉽게 피하더니
“이렇게 하는 건가.”
되려 이후프의 공격을 흡수하고 모방하듯 이곳 전체의 땅에 지진을 일으켰다.
이후프가 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강한 위력. 땅의 일부가 쩌적이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땅에 있는 이들은 물론 나무 위에 올라선 사람들도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사하바티가 땅에 뿌리를 깊게 내려 버텼고, 균열에 빠질 뻔한 라칼은 사하바티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이실라는 나뭇가지를 꽉 잡은 채 매달려 있다가, 앉아있는 나무가 통째로 썩어가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차고 다른 나무로 풀쩍 뛰어 옮겼다.
시간이 지나고 땅의 흔들림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첨벙거리는 바닥 때문에 움직이기도 번거로웠다.
“…잠깐. 첨벙이요?”
아인이 바닥을 살펴보자 ‘그것’의 발치에서 생성되던 물이 어느새 일대를 채우며 발목까지 올라올 정도로 꿀렁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불안한 예감에 급하게 아무 나무에나 올라가려 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종언을 고하듯 손을 펼쳤다.
“일단은. 내가 할 일은 아마 이거. 그 사람들이. 그랬거든. 아닌가… 어쨌든 날 공격했으니까 그런 걸로 치자.”
‘늦었…!’
그것의 손가락이 까딱이고, 동시에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물로 가득하던 바닥이 얼어붙었다.
아인을 포함해 땅에 서 있는 모두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윽고 연보라색의 안개가 부옇게 깔렸다.
상대방을 강제로 잠재우는 ‘몽환의 정령’의 능력. 예전에 고서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인은 이것에 대한 파훼법만큼은 알고 있었다.
아인은 소환해놓았던 윈디를 이용해 마나를 한껏 담은 바람으로 안개를 흐트러뜨렸다. 안개는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바람에 의해 아인에게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발이 묶인 채 방법을 모르고 있던 라칼과 사하바티, 이후프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이실라와 닉도 같은 처지일까. 아인이 고개를 돌려보려는데, 그 앞으로 거대한 도끼날이 쾅 하고 떨어졌다.
너무 놀라 딸꾹질만 몇 번 하던 아인의 입은, 제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것’을 보고서야 간신히 띄엄띄엄 열렸다.
“사, 살려….”
“살고 싶어? 어떻게? 뭘 위해서? 넌 왜 살고 싶어? 어떻게 살고 싶어? 무슨 이유로 태어났는지 알고 있어?”
소리가 커질 때마다 오른손에서 전기가 파직거리고, 느리고 음울한 말투가 이어지면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듯 물이 흘러넘쳤다.
그것이 아인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피부와 생기 없는 검은 눈은, 방금까지만 해도 느꼈던 두려움 위에 안쓰러움을 덧씌웠다.
“난 뭘 해야 해?”
아인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전 누구예요? 인간인가요, 엘프인가요?’
‘저는 왜 태어났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왜 살아야 해요? 아무도 저한테 가르쳐주질 않아요. 처음부터 버려졌는걸요.’
과거에 수없이 뱉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 질문에는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던 과거가 자신에게도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노예시장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부길드장과 길드장이 각각 그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리고 아인은 그때의 대답을 그대로 입에 담아 자신 앞에 있는 이에게 전해주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어요.”
“…뭐?”
“누구든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진 않아요. 아무도 목적을 줄 자격이 없어요. 그건 나만 결정할 수 있어요. 살아남고. 살아가다 보면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그것을 쫓아가면 돼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살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