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 그렇게 태어났을 운명
에리식톤에게 볼일이 있다는 아인에게 닉은 한쪽 눈썹을 꿈틀하더니 허리에 손을 올렸다.
“무작정 간다고 해결이 되겠어? 다가오는 건 무조건 다 먹어버린다잖아.”
“하지만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어 보이는걸요. 지금이 가장 최적의 타이밍인 것 같고.”
헤르도아의 수도 침략은, 아인이 만들어낸 대륙 퀘스트로 인해 플레이어가 대거 유입되며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승기를 가져온 플레이어 측과 수도의 주민들은 에리식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환희로 가득 찬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에리식톤을 알지도 못하는 지금 이 타이밍이 더욱 중요했다.
마라 역시 아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모두 진정되고 누군가 에리식톤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순간, 레이드랍시고 뭣도 모르는 플레이어나 NPC들이 몰려들어 에리식톤의 옆에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어질 수도 있다.
현재 시스템 보정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에리식톤에게까지 적용되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어쩌면 헤르도아의 침략보다도 거대한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수도가 얼마나 더 황폐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퀘스트 보상 노리고 온 플레이어들이 수도의 파괴를 염두에 두면서 싸울 리가 없지’
마라는 에리식톤이 있는 곳 주변으로는 가능한 한 길드원들을 배치하여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한 뒤 빨리 가 보라며 손을 휘적였다. 우라노스를 완전히 추락시키진 못했어도, 프로토게노이의 민낯이 어느 정도 드러난 지금 마라의 기분은 최고였다.
“정말이지, 유저가 뭐든지 할 수 있는 게임이니까 별별 짓거리가 다 나타나네. 덕분에 한동안 홈페이지나 인벤에서 욕은 들어먹겠지만 말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확 망해버려라.”
이제 남은 건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 우라노스의 증거를 캐내서 나락으로 보내버리는 일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회사의 중역에 앉아 있는 자신의 큰오빠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데, 제대로 도움을 줄지가 의문이었다. 마라는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작자를 설득을 시켜야 해. 그런데 물증은 어디서 찾지.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랑….’
한참 동안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마라는, 문득 아인이 간 길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사람…말이지.”
이내 마라는 특유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잘 될 것 같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확률은 반반. 하지만 물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
아인은 헌터 길드의 도움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에리식톤에게 향했고, 그를 혼자 둘 수 없었던 닉과 에르, 영웅까지 그 뒤를 따랐다. 기껏해야 에르 혼자 데려가려고 했던 아인은 뒤로 우르르 따라오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자, 잠깐만요! 지금 제가 누구한테 가는지 알고는 계신 거예요?”
아인의 말에 에르, 닉, 영웅은 아인을 빤히 보더니 당연한 걸 묻냐는 얼굴로 동시에 답했다.
“에리식톤.”
아인은 멍한 얼굴로 그들을 마주 보았다. 심지어 영웅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쓰러질 듯 움직이기조차 힘들어하던 사람이 아닌가. 아인이 기가 찬 표정을 짓자, 어느새 투구를 착용한 그녀는 한쪽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는 어조로 답했다.
“이제 다 나았어. 힘들면 내가 알아서 빠질 생각이니까 걱정 말고. 움직이는 것도 문제없어.”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에르 있으니까 거짓말할 생각은 말고요.”
“팔을 움직이려고 하면 다리가 움직이고 몸 이곳저곳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물리적으로 울리고 가끔 불길한 알림창이 뜨고 한번 뜀박질하니까 핏물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문제없어.”
“많아요! 문제 심각하게 많잖아요! 끝나면 알아서 찾으러 올 거니까 더 오지 마세요!”
“걱정 마 아인. 이 전투가 끝나면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그전까지는 죽지 않아.”
“지금 하란 말이에요! 이제 그게 사망 플래그라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영웅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인은 울상을 지으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더 다가오지 말라는 양 손바닥을 들었다.
“따라오는 것까지는 안 막을게요. 막아 봤자 듣지도 않을 것 같고. 하지만 제가 휘말릴 것 같으면 그땐 반드시 도망치셔야 해요. 다른 것도 아니고 에리식톤 이잖아요. 상식이 안 먹혀요.”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삼키고, 삼켜진 것들은 어떤 공간에 가는지 소멸하는지 소화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에리식톤의 위장. 공략법이나 피해야 할 것들이 확실했던 이전의 재앙과는 달리 에리식톤은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며 심지어 지금은 그 상태조차 불안정했다.
하지만 아인의 말에 영웅은 짧게 웃음소리를 내더니, 아인과 자신. 그리고 주변에 있는 이들을 한 번씩 가리켰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상식 먹히는 사람들 있어?”
“…….”
태생부터 오류 데이터로 태어났던 이들이나, NPC를 생명으로 인정하느니 마느니 하는 퀘스트에 휘말려버린 PC 한 명. 아인이 ‘그런 말이 아니고요….’라고 우물거리고 있자, 영웅은 아인이 편 손바닥 안쪽까지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어깨를 팍팍 두드렸다.
“에리식톤 포함해서 네가 제일 걱정이다. 상식이 안 먹히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할 건지 당최 감이 안 잡혀. 너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것 같더니, 요즘 보면 또 정의로운 것에 취해서 용사랑 같이 용사 행세를 하고 다니질 않나.”
“취했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싫은 거예요.”
영웅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 결국 아인은 거리도 두지 못하고 주변인들을 모두 바로 옆에 바짝 붙인 채 에리식톤에게 달려갔다.
건물 옥상을 발판 삼아 한 번에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니 에리식톤이 있는 곳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보이기 전부터 그 위치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위압적이고 불온한 기운이 한 곳에 똘똘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하리만큼 텅 빈 공간이 있었다. 황궁이 근처에 있는 수도의 한복판인 만큼 온갖 건물이 그득하게 서 있어야 하는 곳인데도. 언데드에 의해 부숴졌다기엔 폐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섬뜩할 정도로 적막하고 기이할 정도로 넓은 공간.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작은 소리 하나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딱.딱.딱.딱. 단단한 무언가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아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옆에 있던 닉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뒤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그림자 안에서, 광망한 이처럼 주저앉아 하늘을 보며 이빨을 딱딱거리는 소년이 보였다. 마치 주변에서 눈에 띄는 곳이라고는 하늘밖에 보이지 않아 저것조차 먹으려는 듯한.
포식하는 자 에리식톤.
예상은 했지만 그것은 부상은커녕 별다른 상처를 입지도 않은 상태였다. 분명 마주친 존재들은 적잖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에리식톤에게 저항을 했겠지만, 모두가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못한 채 그대로 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천천히 다가가는 아인의 발이 작은 돌 하나를 으스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딱딱거리는 이빨 소리가 멈추고 에리식톤의 시선이 아인 쪽으로 향했다. 아인은 움찔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게 순순히 인사를 해 주겠냐고.”
“다, 당황해서 그랬어요 당황해서! 갑자기 눈 마주치길래!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죠!”
에리식톤은 투닥거리는 닉과 아인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들어둔 명령이 있다는 듯이.
‘우라노스가 가만있으라는 명령어라도 입력해놓은 건가? 그마저도 좀 불안해 보이지만.’
영웅은 에리식톤을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우라노스는 저것을 조종해보려 한 듯싶지만, 데이터가 방대하고 애초에 다종다양한 데이터를 먹어치우는 것이 전제된 NPC에게 바이러스를 심은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령을 불안정하게 어기는 상태인 만큼 언제 어디서 예외적인 상황을 스스로 합리화할지 모른다. 영웅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아인의 뒷덜미를 잡고 얼굴을 까딱였다.
“서로 목소리 들릴 수 있으면 이 정도에서 더 다가가지 마. 애초에 여기도 저놈이 가만히 앉아서 공격할 수 있는 범위에서 아슬아슬해. 반응도 못하고 당할 수 있으니까.”
얼핏 보면 십 미터는 더 떨어져 있었건만, 그것조차 공격 범위가 될 수 있다니. 아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발자국 더 물러서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당신… 에리식톤이죠?”
아인의 말에 반응한 에리식톤은 눈동자를 위로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을 부를 때 저 이름을 사용했으니까.
대화다운 대화는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 정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아인은 감사하고 있었다. 의외로 포악한 성격이 아니라는 쪽도 안심이었다.
“혹시 지금까지 삼킨 것들 있잖아요.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요.”
“그야 당연히 내 뱃속으로 들어가.”
“뱃속에 들어간 건 사라지나요?”
“안 사라져. 소화시키고 싶어도 형태만 일그러지고 그대로 남아 있어. 그래서 항상 배고파.”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온전하게 밖으로 빼낼 수도 있다는 걸까요?”
“내 안에 있는 걸 그대로 빼낼 수 있다면 가능할 거야.”
에리식톤이 고개를 갸웃하며 순순히 대답하자, 아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그러면 혹시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하나만 빼낼 수 있….”
“싫어.”
“단 하나만요. 지금까지 많은 걸 먹었잖아요. 그중에서 딱 하나면 티도 안 날 거….”
“안 돼. 나는 한 번 먹은 건 절대로 다시 뱉지 않아.”
단호하기 짝이 없는 에리식톤의 태도에 아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재앙이라서요? 모든 것 먹어치우면서 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켜야 하니까요? 단 한 번만, 딱 한 번만 도와주면 되잖아요. 당신도 바뀔 수 있어요.”
“맞아.”
그 말에 아인은 눈을 크게 떴다. ‘당신도 바뀔 수 있다.’라는 말에 대한 긍정의 의미인 줄 알고 함박웃음까지 지을 뻔했지만, 이윽고 이어지는 에리식톤의 말에 웃음은 점차 가라앉았다.
“난 재앙이야. 모든 걸 먹어치우면서 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켜야 해. 응. 맞아. 요즘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서 우라노스라는 인간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게 내가 할 일이었어.”
표정은 평온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실리고 있었다. 에리식톤은 그 말을 하며 잠자코 있던 손발을 까딱이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어. 다시 생각나게 해 줘서 고마워.”
재앙으로 태어나고,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도록 만들어진 존재.
결국 퇴치되도록 생성되고, 그렇게 정해진 스토리라인.
에리식톤이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일행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눈앞에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포식하는 자가 다시금 준동합니다.]“카오스 이 개자식아.”
동시에 영웅의 욕설이 투덜거림이 그 안에 섞였다.